기본

上善若水

지성유인식 2012. 7. 11. 14:59

폭우를 잉태한 가뭄
조 상 호 (출판인)

  조금은 불편하게 사는 것이 올바른 길일 때도 있다. 이상기후라고 호들갑을 떠는 자연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는 요즘이 더욱 그러하다. 자연은 지구탄생부터 자연그대로 일 뿐 사람들이 이에 적응하고 활용하며 살아왔다. 요즘 겪고 있는 기후변화는 너무 편하게 살자고 뿜어대는 이산화탄소의 과도한 배출로 극지의 빙하가 녹고 오존층이 뚫리면서 예견된 당연한 결과이다. 조금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길밖에는, 딱히 가뭄과 폭우가 반복되는 자연재해에 대비한 뾰족한 수도 없는 것 같다. 다양한 사회를 꿈꾸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하듯이 자연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하여야 할 것 같다.

100년만의 폭우와 가뭄이 매년 되풀이?

  요즘 지구환경에 관한 TV 다큐멘터리가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인기를 끌고 있다. 며칠 전의 프로그램에서 수천만리를 이동하는 철새떼들이 도시의 상공을 이용하여 비행하는 것은 인간탐욕이 만들어 내는 상승기류를 활용하여 편하게 날기 위한 것임을 알았다. 생존을 위해 대륙을 넘나들던 그들이 히말라야 산맥을 넘기 위해서는 거기에 걸맞는 기류가 찾아올 때까지 인내하는 모습에 감동을 받기도 한다. 인간중심의 자연환경보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서 우리의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는 암시를 받는지도 모른다.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낮은 곳을 찾아 산을 에둘러 가며 결국 바다에 이른다. 뒷 물결이 앞 물결을 추월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전혀 서두르지 않고 낮은 곳은 다 채우고 나서야 앞으로 나아간다. 해서 우리네 삶의 진선미를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중부지방에 단비가 내렸다. 남쪽에서 장마구름이 북상하면서 천둥과 번개도 함께하는 장대비였다. 석 달째 계속되던 가뭄으로 논이 갈라져 모내기도 할 수 없었고 산촌에는 식수를 배급해야 했으며, 철쭉, 회양목 등 도회지의 조경용 천근성 관목들도 타 죽었다. 언론은 처음에는 이례적인 봄가뭄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104년 만의 가뭄이라고 숫자나 희롱한다. 바닥난 저수지나 타들어가는 밭작물의 사진이나 보도하면서 농민의 애타는 심정을 읽는 의무를 다했다는 투다. 농사를 망친 그들의 한 해 삶에 대한 대책은 관심도 없다. 전체인구의 7퍼센트에도 못 미친다는 소수로 전락했다고 그러는 걸까. 어느 관리의 생각인지 호들갑을 떨며 물주머니를 매달고 있는 도시의 가로수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표를 의식한다는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작 농심(農心)의 유권자들을 간과하고 있다. 도회지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허둥대면서도 자연의 삶을 그리는 수많은 도시농부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중적인 욕망까지 부끄럽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잠시 후면 조금 불편하게 살면서라도 녹색의 원형질을 실천하고자 자연에 발 벗고 나설 그들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자연을 파괴하면서 자연재해 핑계만

  작년 이맘때는 100년 만의 폭우였다고 야단이 났다. 기후변화에 따른 결과라고는 하지만 5월부터 3개월 동안 계속 비가 내렸고 7월말에는 집중호우가 내렸다. 가장 원시적인 자연재해라 했지만 서울의 우면산에 산사태가 나 40여명이 죽고 다쳤으며 가옥들을 덮쳤고, 곤지암천이 범람하여 논밭이 떠나려갔다.

  내가 애써 가꾸던 포천 신북의 나남수목원에도 산사태를 당했다. 18만평의 산림의 한 골짜기에서 일어난 자연재해이기는 했지만 가슴이 무너지는 힘든 상처였다. 신령스럽기까지 했던 100년 넘는 산뽕나무가 토사에 묻혔다. 거목이 된 잣나무 숲에도 나무가 뿌리 채 뽑히고 용암같은 토사가 깊게 할퀴고 간 자리에는 짐승의 이빨자국처럼 바위가 드러났다. 임도가 끊기고 개울은 두세 배나 넓어졌다. 넓은 호수는 토사에 묻혀 그 자리만 얼추 짐작할 뿐이었다.

  지난 가을 초겨울은 석축을 쌓고 조그만 산봉우리 하나를 털어내 그 흙을 메워가면서 나무를 다시 심고 복구작업에 온 정성을 다한 장엄한 시간들이었다. 자연이 다시 금을 그어준 자연 그대로의 물길을 존중해야 했다. 인간의 눈높이로 자연을 재단할 수 있다는 오만부터 버려야 했다.

  이제는 100년만의 폭우가 일상화 될지도 모른다. 이른바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이 만든 문명의 잣대는 자연 앞에 얼마나 왜소한 것인가. 인간이 자연의 생태계를 파괴하면서도 천재지변이라거나 자연의 재앙이라는 허위의식 뒤에 언제까지 웅크리고 숨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