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신념, 철학이란

지성유인식 2012. 7. 13. 10:41

금 장 태 (서울대 종교학과 명예교수)

  세상에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공들여 일을 추진했는데도 그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상과 전혀 다른 온갖 황당한 일들을 겪게 되면, 너무 억울해서 하늘을 원망하거나 남을 탓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세상의 책임이거나 남의 탓은 아니다. 오히려 일상에서는 자기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방심이나 독선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경우가 더욱 흔하고 더 큰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을 탓하기 보다는 자신의 과오 때문에 초래되는 손실이나 실패를 깊이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로 백성을 죽이고, 학술로 천하 후세를 죽인다”

  북송(北宋) 말엽 유변공(劉卞功)은 여러 차례 부름을 받고도 끝내 나오지 않으니, 황제가 그에게 ‘고상’(高尙)이라 호를 내려주었다. 유변공은 단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고상’하다고 높여졌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경계하는 말 한마디를 남겨 유명하다. 곧 “사람들은 욕심으로 자신을 죽이고, 재물로 자손을 죽이고, 정치로 백성을 죽이고, 학술로 천하 후세를 죽인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이 구절을 끌어다가 자신을 경계하는 좌우명을 삼기도 하고, 남을 비난하는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욕심이나 재물이나 정치나 학술이야 무슨 잘못이 있으랴. 인간이 욕심을 부리고 재물을 모으고 정치를 담당하고 학술을 펼치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방심이나 독선 때문에 일을 망쳐놓고 엄청난 폐해를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욕심 때문에 자기 일신을 망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다. 탐욕은 자기 한 몸만 망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끝내는 나라까지 망치고 말 것이니, 치료가 시급한 망국병으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비해 재물 때문에 자손을 망치는 일이야 한 집안의 문제라 피해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지만, 그래도 가정이 무너지면 그만큼 그 사회도 허약해질 위험이 따른다. 나아가 정치를 한다고 나서서 백성을 고통과 죽음 속으로 몰아넣었던 사례들은 역사책의 갈피마다 흘러넘치고 있다. 지금 우리도 자신이 직접 투표하여 선출해놓은 정치인들에 대해 불신과 좌절감에 빠져 있으니, 백성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정치란 아득한 신화 속에서나 있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가운데 가장 두려운 것은 “학술로 천하 후세를 죽인다”는 말이다. 우리는 다양한 학설이나 여러 갈래의 신념들이 뒤얽혀 부딪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느 쪽이 진실하고 어느 쪽이 거짓인지 제대로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 무지와 독선에 맹목화 되어 지금도 잘못된 판단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생각이 든다.

자기 주장만 거칠게 외쳐대는 것은 폭력일 뿐

  맹자는 그 시대를 휩쓸고 있던 사상조류인 개인주의자 양주(楊朱)와 박애주의자 묵적(墨翟)의 학술에 대해 천하를 어지럽히는 이단(異端)이라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맹자가 전부 옳고 양주와 묵적은 아무 할 말이 없는지 다시 묻게 된다. 주자학이 군림하고 있던 조선후기 사회에서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은 “도덕과 학술의 미혹은 천하를 어지럽게 한다”고 선언하면서, 당시의 주자학자들을 향해 도덕과 학술에 미혹됨이 있다고 과감히 비판하였다.

  어떤 학설이나 신념도 그 자체로 절대적인 진리일 수는 없다. 상황이 바뀌면 적합성을 잃을 수도 있고, 적용을 잘못하면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경우를 포함하여 어떤 학설이나 신념체계도 한 시대의 천하를 어지럽히고 만대의 후세를 파탄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자신만이 옳다는 독선을 경계하는 것이 중요하고, 언제나 상대방의 견해를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독선에 빠진 학설이나 정치적 신념이 바로 천하를 파괴하고 후세를 어지럽히는 해독을 끼친다는 사실을 각성한다면 오늘의 우리 사회가 보수와 진보의 대립이나 좌와 우의 대결로 파국을 향해 치달리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진리는 나의 힘이 상대방을 제압할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호소가 상대방의 가슴에 감동을 일으키고 한 마음으로 소통할 수 있을 때 드러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욱 큰 목소리로 자기 주장만 거칠게 외쳐대는 것은 폭력일 뿐이다. 서로가 공감할 수 없는 주장이라면 자신의 학설이나 신념이 잘못된 것임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마음의 눈이 열리는 세상이 과연 우리에게 오기나 하려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