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도서출판 '작가'가 시인, 평론가, 편집인 등 150명을 대상으로 작년 발표된 시편 가운데 가장 좋은 시를 설문 조사한 결과 선정된 김신용 시인의 '도장골 시편-넝쿨의 힘'
도장골 시편-넝쿨의 힘
집 앞, 언덕배기에 서 있는 감나무에 호박 한 덩이가 열렸다
언덕 밑 밭 둔덕에 심어 놓았던 호박의 넝쿨이, 여름 내내 기어올라 가지에 매달아 놓은 것
잎이 무성할 때는 눈에 잘 띄지도 않더니
잎 지고 나니, 등걸에 끈질기게 뻗어 오른 넝쿨의 궤적이 힘줄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무거운 짐 지고 飛階를 오르느라 힘겨웠겠다. 저 넝쿨
늦가을 서리가 내렸는데도 공중에 커다랗게 떠 있는 것을 보면
한 여름 내내 모래자갈 져 날라 골조공사를 한 것 같다. 호박의 넝쿨
땅바닥을 기면 편안히 열매 맺을 수도 있을 텐데
밭 둔덕의 부드러운 풀 위에 얹어 놓을 수도 있을 텐데
하필이면 가파른 언덕 위의 가지에 아슬아슬 매달아 놓았을까? 저 호박의 넝쿨
그것을 보며 얼마나 공중정원을 짓고 싶었으면―, 하고 비웃을 수도 있는 일
허공에 덩그러니 매달린 그 사상누각을 보며, 혀를 찰 수도 있는 일
그러나 넝쿨은 그곳에 길이 있었기에 걸어갔을 것이다
낭떠러지든 허구렁이든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갔을 것이다
모랫바람 불어, 모래 무덤이 생겼다 스러지고 스러졌다 생기는 사막을 걸어 간 발자국들이
비단길을 만들었듯이
그 길이, 누란을 건설했듯이
다만 길이 있었기에 뻗어 가, 저렇게 허공중에 열매를 매달아 놓았을 것이다. 저 넝쿨
가을이 와, 자신은 마른 새끼줄처럼 쇠잔해져 가면서도
그 끈질긴 집념의 집요한 포복으로, 불가능이라는 것의 등짝에
마치 달인 듯, 둥그렇게 호박 한 덩이를 떠올려 놓았을 것이다
오늘, 조심스레 사다리 놓고 올라 가, 저 호박을 따리
오래도록 옹기그릇에 받쳐 방에 장식해두리, 저 기어가는 것들의 힘.
- 프레시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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