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삶을 기르는 길(다산포럼1003호)

지성유인식 2020. 3. 31. 08:16
제 1003 호
삶을 기르는 길
한재훈(연세대학교 연구교수)

   ‘진리’ 혹은 ‘절대적 가치’ 등 인간이 추구해야 할 어떤 것을 일찍이 동양에서는 ‘도(道)’라고 이름하였습니다. 도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우리가 어떤 목적지를 향해 안전하고 정확하게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을 경유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이라는 존재로서 삶이라는 긴 여정을 올바로 걸어가기 위해 따라야 할 그 길을 ‘도’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주만물 속에 사람으로서 가야 할 길, 그 중에서도 자식으로서, 부모로서, 남편과 아내로서, 혹은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으로서, 친구로서, 나아가 사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가야 할 길 등 수많은 길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사는 동안 ‘관계들 속의 나’로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그 길들을 알아내고 걸어가게 되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게 되고 그 밖의 존재들과도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습니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노자 등 수많은 사상가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동양사상의 핵심에 언제나 도가 놓여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장자(莊子) 역시 그의 방대한 저서『장자』에서 ‘양생(養生)의 도’를 언급하였습니다. ‘양생의 도’란 ‘삶을 기르는 길’ 또는 ‘살아있는 것을 기르는 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양생의 도’는 나의 삶 혹은 살아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보살피고 길러내는 방법에 대한 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무거운 주제를 장자는 특유의 흥미로운 예화 속에 날카로운 지혜를 담아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흔히 
라고 불리는 이 예화는 뛰어난 솜씨로 소를 해부하는 포정(소잡는 사람)과 문혜군(文惠君)이라는 임금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느 날 임금은 포정이 마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듯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소를 해부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 훌륭하도다! 기예가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는구나!”라고 탄복해 마지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포정은 가만히 칼을 내려놓으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제가 소중히 여기는 것은 도(道)입니다. 기예를 넘어서는 것이지요. 처음에 신이 소를 잡을 때엔, 눈에 보이는 것이 온통 소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3년이 지난 뒤로는 온전한 소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요즘 신은 정신으로 소와 만날 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감각의 인지는 멈추고 정신이 하려는 대로 따릅니다. 하늘의 이치에 의지하여 큰 틈새에 칼을 집어넣고 빈 곳을 따라 소의 몸 구조대로 할 뿐입니다. 아직 한 번도 살이나 인대를 다치게 한 일이 없는데, 하물며 큰 뼈이겠습니까? ··· 지금 신의 칼은 19년이나 되었고, 잡은 소만도 수천 마리에 이릅니다. 하오나 칼날은 마치 방금 숫돌에 간 것처럼 여전히 날카롭습니다. 저 뼈마디에는 틈이 있고 이 칼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가 없는 것을 가지고 틈이 있는 데에 넣으니 넓고 넓어 칼날을 놀리는 데 여유롭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19년이나 된 칼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 ”

  포정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문혜군은 “훌륭하구나. 나는 포정의 말을 듣고 양생(養生)의 도를 깨달았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소도 몸의 구조가 서로 같은 것은 없습니다. 포정은 그동안 그런 각양각색의 소들을 수천 마리나 잡았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칼은 결코 소의 뼈는 물론이고 소의 살에조차도 부딪힌 적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포정이 소를 잡는 데는 세 단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포정은 선생님이나 선배들이 제공해주는 매뉴얼대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매뉴얼은 소를 잡아야 하는 포정이나, 포정이 잡아야 할 소를 알지도 못하는 제3의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에서 포정은 매뉴얼을 버리고 자신이 축적한 노하우를 사용해서 소를 잡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었습니다. 정작 분해되어야 할 것은 소인데, 엉뚱하게도 포정 자신의 감각에 의지한다는 한계 말입니다. 그래서 포정은 마침내 세 번째 단계인 “감각의 인지는 멈추고 정신이 하려는 대로 따르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포정은 이것을 ‘기예’가 아니라 ‘도’라고 말합니다.

  포정이 이렇게 자신의 감각이나 생각을 넘어서고자 한 까닭은 소들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포정이 잡은 것은 죽은 소였습니다. 죽은 소마저도 그 각각의 생김새대로 다루어야 한다면, 하물며 살아있는 존재를 다루는 사람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문혜군이 터득했다고 말한 양생(養生)의 도는 바로 그가 보살펴야 할 백성들을 염두에 둔 말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들 역시 날마다 죽은 소가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 어떤 삶을 살든 항상 ‘양생의 도’를 생각해봄 직합니다. 제도나 규식적인 기예를 넘어 각자가 맑고 깨끗한 정신으로 사는 것 말입니다. 이 세상은 각각 다른 것들이 모여 함께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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