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민족일보 조용수

지성유인식 2007. 12. 18. 21:54
 

송건호. 군부세력 앞에 거의가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끝까지 올곧은 언론인의 자세를 지켰다. 그런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발족한 것이 청암언론문화재단이다. 이 재단은 해마다 사표가 될 만한 언론인을 가려 송건호언론상을 수여하는데, 올해는 제6회 수상자로 민족일보 사장이던 조용수를 선정해, 17일 유족이 참가한 가운데 시상식을 거행했다.  


조용수가 민족일보 창간호를 낸 것은 1961년 2월 13일이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진 뒤 처음 치른 1960년의 7.29 총선에서 혁신계는 참패를 면치 못했다. 당대 진보주의자들은 혁신계 정당의 대통합과 진보주의 신문 창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조용수는 두 과제 가운데 신문 창간에 전념하기로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민단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모금에 나섰다. 그는 연세대에 재학하다 1950년에 일본으로 밀항해 메이지대학에 다니다가 학업을 그만두고 민단계 기관지 민주신문의 편집부장을 역임하며 재일 한인들과 폭넓게 교유해온 터라, 많은 유지들이 모금운동에 호응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민족일보를 세우고 사장에 취임했다.    




중립화통일론과 반소(反蘇) 노선

 

민족일보가 지면을 통해 역설한 것은 ‘중립화통일론’이다. 민족일보는 통일이야말로 역사적이자 절대적인 과제라고 전제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동과 서, 남과 북이 평화공존할 수 있는 중립화의 길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런 중립화통일론은 김일성의 고려연방제 통일론과는 지향점이 달랐다. 고려연방제가 일국양제(一國兩制)를 겨냥한 것이라면 중립화통일론은 좌와 우를 초절(超絶)하는 제3의 통일된 중립지대를 상정한 것이었다.  


민족일보는 중립화통일론을 펴면서도 반소(反蘇) 반(反)김일성 노선을 분명히 했다. 미국이 '이승만과 같은 반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인 독재자'로 하여금 단독정부를 세우게 하였다면, 소련 역시 '김일성과 같은 괴뢰적 인물'을 내세워 영토와 인민의 분열을 조장했으며, 재통일을 방해해왔고 더구나 전쟁까지 도발했다고 비난했다. 민족일보가 미국이나 이승만 세력에 비판적이었다면 소련과 김일성 정권에는 적대적이었다.   


그런데도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은 군부는 민족일보를 폐간조치하고 조용수를 재판에 회부했다. 사법당국은 중립화통일론이 북한의 주장과 동일하거나 그 기본노선이 동일하다고 규정하고, 결론적으로 북괴를 고무 동조한 것이라고 판단해 조용수에게 극형을 선고했다. 정부는 국제사회의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961년 12월 21일 조용수를 처형했다. 만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조용수는 그렇게 허망하게 저 세상으로 갔다. 



박정희 군사정권, 서둘러 처형

 

군부는 왜 조용수를 죽였는가? 박정희 군사정부는 당시 두 가지 급박한 과제에 당면해 있었다. 그 하나가 대학생과 진보주의자들의 저항 잠재력을 뿌리 뽑는 것이었다면, 다른 하나는 박정희 자신과 그 척족의 공산당 관련 경력에 기인한 미국의 의구심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민족일보와 조용수는 군부가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용할 수 있는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타협가능한, 공존가능한 아이디어는 사상의 공개시장에서 자유로이 거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는 이런 포용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타협주의자였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 누명을 씌워 처단했다. 박정희 시대에도 무수한 사람이 용공분자로 몰려 감옥으로 가거나 사회적으로 매장되었다. 대안에 대한 포용성 결핍은 우리 사회에서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17일 조용수가 시상대에 섰다면 그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박정희가 지금 생존해 있다면 조용수에게 무슨 말을 할까? 두 사람이 마주 서 있다면 우리는 그 두 사람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까?

 

 

 



                                     ^★^




 글쓴이 / 김민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