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시대]<1>압승의 의미와 과제
대한민국은 ‘열매없는 이념’보다 ‘실용’을 택했다
《국민은 실용(實用)을 선택했다. 이유는 자명하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잃어버린 10년’의 ‘열매 없는 이념’에 지쳤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5년의 ‘편 가르기’와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에 데었기 때문이다. 이런 민의의 결과인 10년 만의 정권교체는 다의(多義)적이다. 좌파 정권의 교체일 뿐 아니라 민주화로 상징되는 ‘87년 체제’의 종언(終焉)이다. 직업 정치인 출신이 아닌 대통령의 첫 등장은 ‘여의도 정치’의 교체도 예고한다. 여기에 담겨 있는 국민의 목소리는 단순하다. 이제 그만 분열과 이념, 과거에서 벗어나 화합과 세계로, 미래로 가자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그 역사적 소명을 이명박 당선자의 어깨에 지웠다.》
이명박 당선자는 곧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로 주소를 옮긴다. 영광 속에 입성하되, 단 한 번도 박수 받으며 나온 이가 없는 청와대가 그곳이다. 이 당선자는 청와대에 들 때는 물론 날 때까지 이번 대선의 민의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은 ‘이명박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노무현을 더 미워했기 때문에’ 그를 뽑았다는 점이다.
돌아보면 이번 대선 과정에서 이 당선자의 최대 우군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어떤 네거티브 공격에도 지지율이 빠지지 않는 ‘이명박 현상’의 가장 단단한 버팀목은 노무현 정부에 대한 피로감이 빚어낸 ‘노무현 효과’였다.
이는 선거운동 과정에선 행운이었지만, 이명박 정부 탄생의 태생적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제 ‘노무현 효과’나 ‘이명박 현상’ 같은 보너스는 없다. 노무현 정부에 질린 국민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대감은 훨씬 커졌다. 조금만 엇나가도 ‘노무현 정부와 다른 게 뭐냐’는 볼멘소리가 금방 터져 나올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당선자는 첫째도 겸허, 둘째도 겸허해야 한다. 무엇보다 역대 대선 사상 최저 투표율은 이 당선자를 포함한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민의를 잡는 첩경은 이 당선자의 표현대로 ‘말보다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국내외적으로 ‘잃어버린 10년’의 적폐(積弊)가 곪아 터지는 지경이다. 우선 좌파정부 10년의 적폐를 청산하는 데서 이명박 정부 개혁의 첫 단추를 끼워야 한다.
작금의 한국 경제는 아마추어 무능 정부의 비능률과 관치(官治) 경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대변되는 세계적 경기 둔화의 늪에서 몇 년째 저성장의 쳇바퀴를 돌고 있다. 먼저 경제를 시장에 돌려주고, 정부 기능 축소와 능률 제고, 획기적인 규제 완화 등을 통해 성장의 동력을 되살려야 한다.
올 하반기 본보가 실시한 여론조사 가운데 ‘차기 대통령이 역점을 두어야 할 분야’를 묻는 5번의 조사에서 ‘경제 성장’을 첫 번째로 꼽는 국민이 항상 60%를 넘었다. 경제 성장만이 청년실업 문제 등 산적한 사회문제를 타개할 열쇠다.
이른바 ‘3불정책’(본고사 고교등급제 기여입학제 금지)과 ‘수능등급제’로 대변되는 오도된 ‘평등 교육’도 교육의 질과 경쟁력 저하를 불러왔다.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의 피눈물을 쏟게 했다.
본보가 지난달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은 ‘차기 정부에서 반드시 이뤄야 할 국정과제’의 1순위로 ‘교육개혁’을 꼽았다. 본보가 지난달 전문가 5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차기 정부 국정 개혁과제’에서도 1순위는 ‘공교육 정상화 등 교육개혁’이었다. 그만큼 이명박 정부의 교육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구는 절실하고 절박하다.
대부분 역대 정부가 임기 초에 시도했으나 어떤 정부도 성공하지 못한 것이 정부와 공공부문 개혁이다. 참여정부는 청개구리처럼 오히려 공공부문을 키웠다. 그러고도 ‘그래 큰 정부 맞다’고 배짱을 부려 국민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다.
국민이 ‘여의도 정치’의 때가 덜 묻고, 합리성과 ‘규모의 경제’를 중시하는 최고경영자(CEO) 출신을 대통령으로 뽑은 데는 역대 어느 대통령도 해내지 못한 ‘금단(禁斷)의 개혁’에 대한 기대가 담겨 있다.
이와 함께 비대한 정부의 무능과 비능률, 부정을 감시할 국민의 눈과 귀를 닫은 허울 좋은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에 따라 기사송고실에 박은 대못을 뽑는 일도 급선무다.
단일화 추진 등 정치공학과 네거티브만 횡행하고 정책 검증이 실종된 이번 대선은 또 다른 구조적 개혁의 숙제를 남겼다.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어두운 그림자다. 이 당선자는 장기 공약으로 개헌 검토를 밝힌 바 있다. 개헌을 하려면 임기 초반부터 충분한 연구와 국민적 합의 과정을 거쳐야 참여정부의 개헌 추진처럼 ‘정략’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
대외적으로는 북한 핵문제의 현상 유지를 인정하는 듯한 ‘대북 눈치 보기’ 정책을 끝낼 때가 됐다. 한국의 국제적 좌표를 착각한 ‘동북아균형자론’류의 이상주의 외교정책도 폐기해야 한다. ‘한미일 삼각동맹’을 복원하고 더욱 공고히 해 궁극적으로 북핵 포기를 유도하는 것이 이명박 정부의 절체절명의 과제일 것이다.
이처럼 산적한 개혁과제의 추동력을 얻기 위해선 인사개혁이 선행돼야 한다. 낙선한 사람에게 장관 자리로 보상하는 식의 ‘코드’ ‘보은’ ‘낙하산’ ‘돌려막기’ 파행 인사로는 어떤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 참여정부 5년의 교훈이다. 결국 ‘잃어버린 10년’으로 비뚤어진 국정을 정상화하는 것이 이명박 개혁의 기본방향이 돼야 할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이 모든 개혁을 밀고 나가야 할 이 당선자에게 승리의 기쁨은 찰나에 불과하다. 그는 지금 벼랑 위에 서 있다. 대통령 당선자를 겨냥한 사상 유례없는 ‘이명박 특검법’의 칼날이 겨누고 있다.
정치를 안정시키고 당선자가 국정운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노 대통령이 이명박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그러나 대통합민주신당 등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지수다.
현직인 노 대통령이 사사건건 이 당선자의 발목을 잡는, 지금까지의 정권 인수인계 과정에서 볼 수 없는 희한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더구나 이명박 특검에 삼성 특검까지 겹친 ‘쌍끌이 특검’으로 정권 인수 과정에 혼란이 빚어질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정치적 액션’이 지향하는 바는 한곳, 바로 내년 4월 총선이다. 대선에서 패배한 대통합민주신당과 이회창 측 세력의 유동성 증가는 정계개편으로 이어질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친노세력을 움직여 총선에 직접 가담할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총선까지는 대치와 혼돈 정국이 이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도 예산안 처리 △자이툰부대 주둔 연장 여부 결정 △신임 총리와 내각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당선자의 정치력이 첫 시험대에 오르는 것이다. 지난(至難)한 정국 상황에서 이 당선자가 보여야 할 정치력의 첫 번째 덕목은 화합이다. 우선 대선에서 패한 사람들을 껴안고, 패배한 세력들을 보듬어야 한다. 무엇보다 당내 경선의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와 지지세력을 배려해야 한다.
한국의 대통령제 아래서 대통령은 단순한 국가의 최고경영자가 아니다. 나라를 대표하는 국가원수이자 국가의 명운과 미래를 기원하는 제의(祭儀)적 성격까지 띠고 있다. 이 당선자는 한반도 무게만큼의 엄숙한 소명의식을 절감해야만 실패한 전임자의 전철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가장 먼저 자신을 따라다니는 도덕성 논란을 불식시켜야 한다. 부패한 실용주의나 부도덕한 실적주의는 권위주의 체제로의 복귀와 다름없다.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엄격한 도덕성으로 재무장해야만 자신의 희망대로 국민에게서 ‘고맙다’라는 인사를 들으며 청와대 문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린, 정말, 국민의 진정한 박수를 받으며 서울 종로구 세종로 1번지를 떠나는 이를 보고 싶다.
박제균 기자 phark@donga.com
-donga.com.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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