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양만리(楊萬里) 집안의 청백

지성유인식 2007. 6. 8. 09:23
 

중국 남송(南宋)의 양만리라는 관리는 학문이 높은 학자이자 뛰어난 청백리로서 역사에 길이 이름을 전하는 분입니다. 『목민심서』에서도 여러 차례 거명되고 있습니다. 양만리는 호가 성재(誠齋)로 『성재집』이라는 높은 수준의 문집을 전하고 있으며, 보문각대제라는 높고 귀한 벼슬로 치사(致仕)하여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인 양장유(楊長孺)도 아버지에 버금가는 청백리로 역사에 이름을 전하고 있어 아름다운 가문임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양장유의 호는 동산(東山), 복건안무사를 역임하고 시호가 문혜(文惠)였는데 목민관 시절에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습니다. 『목민심서』 귀장(歸裝)조목에 나오는 그들의 청백한 공직 생활은 이렇습니다.


“양성재가 강동지방의 조운(漕運)을 맡고 있을 때 봉급으로 받은 돈이 1만 민(緡)이었는데 벼슬을 그만두고 오면서 관고에 그대로 두고 왔다. 그의 아들 동산(東山)도 오양성을 다스릴 때에 봉급 7천 민을 하호(下戶)에 대하여 조세로 내어주었다. 그의 집은 짧은 서까래에 흙으로 섬을 만들어 농부의 집같이 짓고 살면서 삼대(三代)에 걸쳐 증축하거나 장식하는 일이 없었다. 사미충(史彌忠 : 자는 양숙)이라는 여릉 태수가 임기를 마칠 무렵 양씨의 집을 방문하니 문에 들어서나 마루에 올라서나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 존경하고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래서 그림쟁이에게 명하여 그의 집을 그려가지고 갔다.”(귀장)


높은 벼슬아치로, 대단한 세력을 지닌 사람들이 허름하고 낡은 집에 살면서 3대에 걸쳐 증축이나 보수도 하지 않고 검소하게 살았다니, 그림으로만 그려서 남길 일인가요. 청백은 그래서 천추에 꽃다운 이름을 전하게 해주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양성재와 양동산의 청백한 공직생활도 아름답지만, 사미충의 청백리를 부러워하는 심정이 더욱 아름답습니다. 초가 3간의 허름한 고관대작네 집의 그림이 어딘가에 전해지고 있을까요. 우리네의 고관대작들도 그런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간다면 세상이 얼마나 맑아질까요.


다산연구소 박석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