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와 5.18 참고인ㆍ증인 요구 일체 불응
강제구인돼 법정 섰을 때도 진술ㆍ선서 거부
(서울=연합뉴스) 강의영 기자 = 22일 서거한 고 최규하 전 대통령은 우리 현대사의 중요 격변기였던 12.12 및 5.18사건 당시 최고 국정 지도자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로 '참고인'이나 '증인' 자격으로 검찰의 소환이나 법정의 출두를 숱하게 요구받았으나 단 한차례도 스스로 응하지 않았다.
1996년 11월 5.18 및 12.12사건 항소심에서 강제 구인돼 딱 한번 법정에 섰지만 역시 선서나 증언은 일체 거부하는 바람에 신군부의 정권찬탈 과정을 낱낱이 밝히려던 법원의 노력은 한계를 보였다.
"대통령 재임 중의 공적인 사건에 대해 일일이 검찰 조사에 응하거나 법정에서 증언하는 것은 헌정사에 나쁜 선례를 남긴다"는 게 최 전 대통령의 일관된 `침묵의 이유'였다.
검찰과 법원, 나아가 국민이 12.12 및 5.18 사태와 관련해 최 전 대통령의 입을 통해 규명하려던 대목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임 ▲5.17 비상계엄 확대 ▲국보위 설치 ▲본인 하야 등 일련의 사건을 재가하는 과정에서 신군부측의 강압이 있었는지 여부.
이들 전직 대통령이 검찰이나 법정에서 '역사적 진실'에 대해 속 시원하게 밝혀야 한다는 게 국민적 요구였지만 전ㆍ노 전 대통령은 `모르쇠'로 일관했고 최 전 대통령은 '나쁜 선례'를 이유로 끝까지 침묵을 지켰다.
고인에 대한 검찰의 첫 접촉은 1993년 12.12사건에 대한 서울지검 수사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서 1990년 국회가 광주특위 출석과 동행 명령을 거부한 최씨를 고발하자 3년 후 검찰은 별 조사 없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던 것.
평민당이 법무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검찰이 최씨를 적극 수사하지 않은 데 대해 "최씨가 예우를 받을 만한 훌륭한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느냐"며 따지자 허형구 당시 법무부장관은 "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나 심판은 역사와 국민 몫으로 본다"고 답했다.
이후 서울지검 공안1부는 1993년 8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12.12 주모자 34명에 대해 정승화 전 육군 참모총장 등 22명이 군형법상 반란 및 형법상 내란 혐의 등으로 대검에 고소한 사건을 배당받아 수사하면서 최씨가 정 총장 연행을 재가했는지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검찰은 피고소인인 전ㆍ노씨를 직접 조사하지 못한 채 다음해 9월 두 전 대통령에게 질의서를 보내 답변을 받아냈으며 참고인이었던 최 전 대통령에게도 질의서를 보냈으나 답변을 거부당했다.
최씨는 답변 대신 서한을 보내 "대통령 재임 중에 일어난 공적인 사건에 대해 일일이 검찰의 조사에 응하는 것은 헌정사에 나쁜 선례를 남기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므로 답변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이는 이후 고인이 검찰 소환이나 법정 출두를 요구받을 때마다 반복됐다.
검찰이 전ㆍ노씨를 서면 조사하고 최씨가 답변을 거부하자 같은 해 10월 전ㆍ노씨를 기소유예 처분하는 것으로 수사를 마무리한 것만 봐도 당시 전 대통령을 검찰이 조사하는 게 '엄청난 사건'이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고인에게는 당시 민주당 등으로부터 "역사적 책무를 저버린 무책임한 보신주의",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당한 사람으로서 역사적 반성도 할 줄 모르는 행위"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서울지검 공안1부는 1994년 말 12.12사건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되자 곧바로 정동년 '5.18광주항쟁 연합' 상임의장 등이 고발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수사에 착수했으며 1995년 5~6월 역시 전ㆍ노 씨에 대해서는 서면조사를, 이전 답변을 거부했던 최씨에게는 방문조사를 추진했다.
그러나 고인은 "대통령 재임시의 공적인 행위에 대해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는 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특히 5.18사건에 대한 질의 내용이 대통령 통치 행위와 직접 연관돼 있고 원만한 국정 수행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선례를 남길 우려가 있다"며 조사를 거부했다.
또다시 정치권.시민단체 등의 비난이 빗발쳤고 5.18 관련 단체는 진압작전 주도자에게 훈ㆍ포장을 수여한 최씨를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검찰 고발하기도 했다.
최씨의 침묵 속에 1995년 7월 5.18 관련자 전원에게 '공소권 없음'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초 검찰이 12.12및 5.18사건에 대해 재수사에 들어가 전씨를 전격 구속하면서 최씨의 입에 국민의 시선이 다시 한번 모였고 검찰은 공식 소환장을 보내 출두를 요구했다.
'소환에 응하라'는 시위가 최씨 자택 안팎에서 잇따르고 검찰이 몇 차례 방문조사를 추진했으나 고인은 끝까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특히 검찰은 2차 방문조사에서 정승화 전 육참총장의 연행을 재가할 때 강압이 있었는지 여부 등에 대한 신문을 했으나 최씨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답변을 거부한 뒤 조서의 서명날인도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와중에 고인이 전씨 측으로부터 거액을 수수했다는 폭로성 주장까지 나와 검찰이 계좌추적을 벌이기도 했다.
고인은 국민의 비난이 그치지 않자 대국민 담화를 발표, "국정행위에 대하여 후일에 와서 일일이 조사를 받아야 한다면 국정은 소신대로 처리할 수 없으며 조사받는 전례는 앞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될 소지마저 없지 않다"며 기존의 입장을 반복했다.
검찰은 1996년 1월 전.노씨 등 8명을 내란 혐의로 기소하고 최씨는 법정 증인으로 채택했다.
고인이 법정에 딱 한차례 나온 것은 이 사건 항소심 때.
최씨는 증인 소환 및 재소환 요구에 요지부동의 자세를 보이다 1996년 11월14일 서울고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1부(당시 재판장 권성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11차 공판에서 구인장을 갖고 자택을 찾아간 검찰에 의해 반강제로 끌려나와 법정에 서게 된 것.
가족이나 수사관들의 부축을 받지 않은 채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자택 현관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이 내.외신에 대서특필됐다.
그러나 고인은 증언대에 선 뒤에도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행위에 대해 후일 소명이나 증언을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고 이러한 전례를 만들어 앞으로 배출될 대통령들의 직무 수행에 부담을 주는 것은 국익에 손상이 된다"며 증인 선서와 증언을 거부했다.
한편 그날 최씨의 입정에 앞서 변호인 측이 전두환ㆍ노태우 피고인의 일시 퇴정을 요청해 검찰과 전ㆍ노씨가 동의하고 재판부가 이를 수락함에 따라 전직 대통령 3명이 법정에 함께 서는 초유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날 "최 전 대통령에 대한 더 이상의 제재 조치는 부끄러운 일"이라며 증인 선서 및 증언 거부에 따른 각각 10만원씩의 추가 과태료는 부과하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들을 구속하고 수많은 재벌과 정치인을 사법처리한 검찰과 법원도 '역사 바로 세우기'를 열망하는 국민적 염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한 최 전 대통령의 비밀을 풀지 못했고 이젠 이 비밀은 영원히 역사 속에 묻히게 됐다.
keykey@yna.co.kr
(끝)
용각산 대통령의 ‘항룡유회(亢龍有悔)’
지난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88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그는 당시 국무총리로써 대통령 권한대행을 하다가 그해 12월 6일 이른바 ‘체육관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고 12월 21일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의 대통령 재임 기간 중, 1979년 12월 12일에는 전두환, 노태우 등이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체포하는 하극상이 일어났고, 1980년 5월 18일에는 저 끔찍한 광주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이후 10·26이 가져다준 ‘서울의 봄’을 얼어붙은 겨울로 만든 신군부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대통령의 자리에 앉아서 이 모든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기만 하던 그는 그해 8월 돌연 하야(下野) 성명을 내고 8개월간의 대통령직을 마감했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단명한 대통령이었다.
침묵으로 진실 규명 외면
그 후 군사정부가 물러가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12·12와 5·18의 진실 구명(究明)을 위한 노력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진실 규명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최규하 전 대통령은 시종일관 침묵으로 일관해왔다. 대통령 재임시에도 급변하는 사태에 대해서 한 마디 말이 없었던 그였다. 그래서 국민들은 그를 ‘용각산 대통령’이라 불렀다. 당시 용각산 광고에 “이 소리도 아닙니다, 저 소리도 아닙니다. 용각산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그를 용각산에 빗대어 비꼰 것이다. 그는 대통령에서 물러나 죽을 때까지의 26년 동안에도 검찰의 조사를 거부하며 철저히 용각산임을 고수(固守)했다.
12·12와 5·18 사건 수사 당시 대검 공안부장이었던 최병국 의원의 회고에 의하면 “최 전 대통령은 검찰의 조사 요구를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로 완강히 거부했다”고 했다. 신문에서 이 기사를 읽고 나는 그의 한문 실력에 적지 않게 놀랐다. 그러나 이것은 항룡유회라는 말의 본뜻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항룡유회’는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주역』의 건괘(乾卦)에는 4가지 모습의 용(龍)이 나오는데, 잠룡(潛龍), 현룡(見龍), 비룡(飛龍), 항룡(亢龍)이 그것이다. 용은 양기(陽氣)의 상징으로 임금에 비유된다. 잠룡은 물속에 숨어서 때를 기다리며 장차 비상(飛翔)을 준비하는 용이고, 현룡은 세상에 나타나서 자기의 실력을 시험해보는 용이며, 비룡은 드디어 때를 얻어 천하를 다스리는 임금의 지위에 오른 용이다. 항룡은 너무 높이 올라가서 내려올 수 없는 용이다. 비룡은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聖君)에 해당한다. 요임금은 자기 자식이 아닌 순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었고 순임금 역시 자기 자식이 아닌 우(禹)임금에게 천하를 물려주었다. 그들은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았던 임금이었다. 반면에 항룡은 나아갈 줄만 알았지 물러날 줄을 모르는 용이다. 자기의 지위가 영원할 줄 알고 끝까지 올라가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용이니 폭군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니 종국에는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회해도 소용없는 용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항룡의 상태에까지 이르지 않는다.
그가 진심으로 후회했다면
최 전 대통령이 항룡(亢龍)의 본뜻을 알았다면 자신을 항룡에 비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그는 대통령으로서 신군부의 전횡(專橫)을 견제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뜻으로 이 구절을 인용한 듯한데, 그가 진심으로 후회했다면 역사적 진실을 밝혀 진심으로 참회했어야 한다. 또 8개월 만에 사임한 것으로 자신의 과오를 어느 정도 씻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사임이 군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는 건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끝까지 용각산임을 자처하고 ‘모르쇠’로 일관한 그의 자세와 『주역』의 “항룡유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짧은 기간이나마 대통령직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장을 치러 주는 것은 좀 과분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항룡유회(亢龍有悔)』란 숙어를 어떤 의미로 쓰셨는지는 최규하 전 대통령님만 아시지 않을까요!
글쓴이 / 송재소
·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 저 서 : <다산시선>
<다산시연구>
<신채호 소설선-꿈하늘>
<한시미학과 역사적 진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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