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11월 UN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의결된다.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56.47%를 유대국가에, 42.88%를 아랍국가에,
예루살렘은 국제지구에 할당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전 지역의 87.5%를 소유한 반면, 유대인들은 6.6%만을
소유하고 있었고, 나머지 5.9%는 영국 점유였다. 당연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UN 분할
안을 거부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여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한다.
미국과 소련이 이스라엘을 공식적으로 승인하고 나서자 이집트,트랜스 요르단,시리아,
레바논,이라크 등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1948년에 중동전쟁이 발발한다.
전쟁결과 이스라엘은 전 팔레스타인 지역의 78%를 장악하고 나머지 지역중 가자는 이집트,
서안과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의 통치하에 놓인다. 전쟁중에 90만 명에 이르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주변 아랍국가 등지로 피난한다. 이는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 거주 아랍인 인구의 90%에 이른다.
이스라엘은 1950년 '부재자 재산법'을 만들어 피난한 아랍인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동시에 피난
민들이 귀환할 수 없도록 규제한다. 이 법에 따라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의결된 날 이후 아랍국가
의 시민이었거나 아랍국가에 거주하던 사람들, 그리고 팔레스타인 거주자라 할지라도 본인의 거
주지를 떠나 있던 사람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부재자로 분류된다. 부재자의 재산은 점유자에게
귀속되고 다시 이스라엘 정부는 점유자들의 전 재산을 매입한다... ... ...
이렇듯 하루아침에 이방인이 되어 떠도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저항하게 되고,
점령국가 이스라엘은 더욱더 강력하게 팔레스타인을 억압한다. 반 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에 관한 보도를 접하고 있다.
그런데 그 분쟁이란것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막강 이스라엘 군대와 구식 총과 돌로 대항
하는 팔레스타인 민병대간의 충돌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팔레스타인의 눈물』은 팔레스타인 현지에서 생활하는 시인,소설가,대학교수,언론인,건축가 등
열 명의 작가들이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일상을 담은 산문집으로 현지 르포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꾸미지 않은 사실 이야기가 오히려 더 소설같다는 생각이 들게 할정도로
팔레스타인 그들의 삶에는 아직까지 거의 희망이 없다. 하지만 비참하고 암울한 현실속에서
실낱같은 희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들에게 이 책은 전 세계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알릴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희망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감상이나 사족은 빼고 본문에 있는 몇 편의 기록들을 발췌해 보았다.
⊙ 심문
글쓴이 /아이샤 오디(소설가)
1967년 이스라엘 점령에 대항하는 저항군에 참여한 최초의 여성단체 일원으로
1969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0년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 포로
교환때 석방되어 요르단으로 추방되었다.
... ... ...
한 명이 뒤로 묶은 내 머리채를 잡아채어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수많은 발들이 나를 차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머리채를 잡혀 높이 들어올려졌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발길질을 당했다. 무슨 놀이 같았다. 그들은 그 짓을 서너 번 되풀이했다.
나는 고통을 느낄 경황도 없이 뺨 한 대, 발길질 한 번마다 결의를 더욱 굳혔다. 나는 자신에게
거듭 말했다. '내가 맞섰기 때문에 그들이 이러는 거야, 내가 당당하게 맞섰기 때문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 이 갈보가 비명도 안 지르네."
내가 비명도 안 질렀다고? 저 오만한 자들한테 굴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나는 느꼈다.
저들은 내 비명을 들을 자격이 없어. 내가 이기고 있는 거야 아이샤! 우월감에 가슴이 뿌듯하고
나 자신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나 개인을 넘어 우리가 추구하는 대의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 ... ...
아침 햇살이 방 안에 가득 찼다. 누군가 음식 쟁반을 들고와 탁자 위에 놓았다.
냄새 좋은 빵과 뜨거운 차를 내 눈이 쫓아 갔다. 군인이 나이프를 들어 빵을 가르고
버터와 잼을 발랐다. 그리고 맛있게 먹었다. 아니면 나한테 더욱 그렇게 느껴졌든지.
내 위 속에서 효소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배고픔은 또 다른 반갑잖은 손님이었다.
나는 단식을 할 때처럼 배고픔에 저항했으나 어떨 수 없이 입안에 침이 고였다. 내가
몇 번씩이나 침을 꿀꺽 삼키자 군인은 눈치 채고 나한테 차 한 잔 하겠느냐고 물었다.
창피했다. 나는 마치 현행범으로 잡히고도 발뺌하는 사람처럼 재빨리 아니라고 답했다.
그래봤자 내 머릿속에서는 한 잔의 따뜻한 차가 떠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어
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 밥상, 뜨거운 아침 차 그리고 제이트,자타르와 함께 먹는 타분을
생각했다. 집을 떠난 뒤로 내가 어머니를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걸 깨달았다. 어머
니의 이런저런 모습이 영화의 장면들처럼 지나갔다. 어머니가 신의 자비를 구하며 기도하
는 모습은 지나가지 않고 멈추어 내 눈앞에 오래 머물렀다... ... ...
⊙ 취한새
글쓴이/ 자카리아 무함마드(시인,소설가)
... ... ...
한 시간 후 그들은 차를 통과시키기 시작했다. 5분마다 차 한 대가 보내졌다. 보통은
군인들이 차가 지나가도 된다는 신호를 손으로 하지만, 그날은 탑 꼭대기에 의자를 올
려놓고 앉은 군인이 발로 신호를 보냈다. 그래서 우리의 진행은 그의 발에 달려 있었다.
그가 발을 까딱하면 우리는 긴 줄에서 차 한 대가 빠져나갔음을 알았다. 우리의 시선은
온통 그의 다리에 쏠렸다.
하지만 노란 숫자의 차들은 그의 다리에 개의치 않았다. 그들은 즉시 건너갔다. 초록색
숫자의 차들은 반드시 군인의 발동작을 기다려야만 했다. 노란색은 이스라엘 정착민들
이었다. 초록색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초록과 노랑의 전쟁이다. 노랑은 신성한
색이다. 초록은 악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그들만의 넓고도 현대적인 도로로 다닌다. 우리가 그 도로를
지나가려면 우선권을 그들에게 주어야먄 한다. 고가도로가 있어도 그들은 그것을 타
넘지만 우리는 그 밑으로 가야만 한다. 여기에 타협이란 없다. 노랑은 위쪽, 초록은
아래쪽에 있어야만 한다. 그 검문소를 통과하느라고 우리는 한 시간 반을 기다려야
했다. ... ... ...
⊙ 도시에 밀어닥친 폭풍우
글쓴이/ 자밀 힐랄(사회학자)
2002년 4월 1일,
오늘은 이스라엘이 라말라를 침공한지 나흘째 되는 날이다. 갈수록 재점령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탱크들이 라말라의 중심가를 집중 공략해, 건물 네 채가 파괴
되고 불에 탔다. 수많은 팔레스타인 경찰과 보안요원들이 항복하고 끌려갔다는 소식도
있다(일부는 즉결처분을 당했다는 소문과 함께).
목요일 아침부터 최소한 25명이 라말라에서 살해됐다(이는 24시간 통행금지 탓에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아직 병원 시체실에 보관되어 있는 주검의 숫자이다. 시민들은
다쳐도 치료를 받으러 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생필품을 구하러 나갈 수조차
없다). 침략군은 조직적으로 건물을 포격하고 집집마다 수색하여 시민들을 공포에 몰
아 넣고 있다.
오후 3시 30분쯤 탱크 여섯 대와 장갑차 두 대를 타고 특수부대원이 40명 정도 몰려와서
내가 사는 건물을 포위했다. 군인들이 확성기로 열두 살 이상 된 남자와 여자는 모두
건물에서 내려와 거리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내려오지 않으면 건물과 함께 폭탄에 날
아가버릴 거라고도 했다(이 아파트는 대부분 다양한 용도의 사무실이다). 나와 아내,
이웃집 남자와 부인 그리고 두 아이가 내려가니, 이미 10명쯤 되는 사람들이(그들 가
운데 넷은 비르제이트대학 학생들이었다) 벽을 향해 무릎을 꿇고 머리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나도 똑같이 하도록 명령받았다. 여자들은 아이들과 함께 한 아파트에 갇혔다. 그들은
신분증도 모두 걷어갔다.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건물에 있는 살림집과 사무실을 수색하
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어 있는 집들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두 시간 정도 건물을
들쑤시더니 그들은 느닷없이 신분증을 우리에게 돌려주고는 아무 말 없이 탱크와 장갑
차를 몰고 가버렸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와보니 아수라장이었다. 아마도 무기를 찾으려고 한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무기만 찾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지난 목요일 침공당하기 직전에 은
행에서 돈을 좀 찾아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는데(약800셰켈:약3,600달러), 서랍이 부서
진 채 열려있고 돈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집에서는 카메라도 훔쳐가고 생일 케이크도
먹어 치웠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사람들이 이스라엘군에 대해 하는 말이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무기는 제1세계의 것을 갖고 있지만 정신상태는 이디 아민*의 군대라는..., 팔레스
타인 자치정부가 사라진 또 다른 정치 상황이 시작된것 같다. 우리는 무력으로 점
령당한 식민지 상태이며 장기적 저항조직이 필요할 것이다. 탱크가 동네에 돌아
왔지만(저녁 8시), 다행히 내가 사는 건물에는 오지 않았다.
* 이디 아민(1928~2003): 우간다의 독재자, 영국 식민지 부대에서 근무하다 1962년
우간다 독립후 우간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71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 5만여
명의 우간다 거주 아시아인을 추방하였고, 반대파를 대량학살하는 등 군부 독재자
의 표본이 되었다. 리비아로 망명하였다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죽었다.
『팔레스타인의 눈물』
수아드 아미리 외 지음/ 자카리아 무함마드, 오수연 엮음/ 도서출판 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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