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소멸, 소멸하는 것들이 내뿜는 찬란한 빛은 아름답습니다. 서쪽 하늘을 주홍색으로 물들이며 사라지는 노을, 존경 받았던 육신을 불태우며 정점에서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하는 다비식의 불꽃, 마지막까지 불타다 가는 단풍의 새빨간 손가락...
빛나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으며 또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어제 한 친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학교 동창인 그 친구는 젊어서 조폭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7, 8년 전 모두 어려울 때, 그는 파산을 했고 아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형제들도 일찍 세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제 그는 늙은 어머니와 궁핍과 병상에 함께 있던 아들 하나를 남겨 놓은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친구는 생의 마지막 몇 해를 하느님께 메달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두 차례 친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합니다. 자기보다 더 가난한 친구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들어 주셨고, 돈이 많은 형을 원망하며 증오의 기도를 올렸는데 그 기도도 들어주셨습니다. 그런데 형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기에 부검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갈가리 찢어지는 형의 육신을 보며 제 눈앞에서 자기가 하느님께 정했던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에 경악했습니다.
친구는 마지막 기도를 청했습니다. 그것은 용서의 기도였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기도했습니다. 쓸모없이 살다가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것과 살려 달라고 청하지 않을 테니 대신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는 친구가 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 마지막 기도를 꼭 들어주실 거라 믿으며 친구는 병든 자신의 몸을 대학병원에 해부용으로 기증한다는 서약을 했습니다. 그 친구의 전화를 받은 것은 그가 죽기 얼마 전, 기증 서명을 한 다음 날이었습니다.
친구는 중․고등학교 때 운동선수였습니다. 후덕하고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주먹들과 어울렸습니다. 그 친구가 어느 날 공원을 지나가다 독재정권 규탄 집회에서 연설하는 나를 보았답니다. 살면서, 그는 강했고 나는 약했습니다. 그런데 약골인 내가 거대한 권력과 맞서는 모습을 오래 지켜보았고 두고두고 그 장면이 잊히지 않았다 했습니다. 친구가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으면서 하느님께 마지막 기도를 한 대상은 나였습니다. 자기가 죽는 대신 나를 낫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고 계시다는 걸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다고 했습니다.
나는 그 친구에게서도 소멸하는 것들 속에 내재한 아름다운 불꽃을 보았을 보았습니다. 내 하루하루의 목숨이 다른 이들의 기도와 소망으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나는 누구를 위해 불타고 있어야 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생각 2005.12, 도종환의 신방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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