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역사의 논란(왜곡) 편린

지성유인식 2017. 2. 27. 00:59

사육신 논란: 유응부와 김문기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 사육신 중 한 분이신 문화류씨 柳誠源은 한글로 "류성원"으로 표기해야 합니다. 이 글은 그 분에 대해서 논하지는 않습니다.]

1. 들어가는 말

기존의 사육신에 포함되어 있던 유응부를 김문기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1977년부터 제기되어 왔다고 한다.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김재규가 중앙정보부장일 때 권력으로 김문기를 사육신에 넣었다고도 하며, 그때 찬동했던 학자들을 어용학자로 매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사편찬위원회가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실인 듯한데, 확실한 것은 이 위원회는 김문기를 사육신으로 판정한 적은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위원회가 직접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김문기를 "현창(顯彰: 밝게 나타냄)하는 것이 옳다"는 구체성이 없는 의견과 함께 "김문기의 묘를 사육신 묘역에 쓰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낸 것 또한 사실인 것 같다. 그를 사육신으로 해석할 수도, 해석하지 못할 수도 있는 모호한 구절들이다. 위원회는 현재는 묘나 위폐는 자치단체들이 알아서 할 일이고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라고 완전히 발을 빼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태도는 종합하면 김문기가 사육신은 아니되 사육신처럼 기리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유응부를 넣은 사육신도 존재하고, 김문기를 넣은 사육신도 존재하며, 또 모두 넣은, 명칭만 사육신이면서 실제는 7명인 사육신도 존재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이 백과사전들마다 달리 쓰여 있을 정도이다. 이런 것 하나 말끔하게 처리하고 국민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위원회를 보며, 어쩐지 우리 사회 곳곳에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기관들이 많음을 새삼 느낀다.

역사적 사실은 단종복위 시도 때문에 사육신(유응부 포함)들처럼 김문기도,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수 십명의 신하들도, 그리고 연좌된 수백 명의 사람들도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한편 유응부를 주장하는 측과 김문기를 주장하는 측의 싸움에서는 김문기가 거사(擧事)의 배신자인 것처럼 그려지기까지 하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른 표현으로 보인다.

2. 김문기를 주장하는 논의

김문기를 주장하는 논의 중 강력한 두 가지는 다음과 같다.

(1)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2년 6월 8일조에 몇 명의 거열형을 행한 후에 주동자 몇 명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이 왕(세조)을 시해하려한 동기를 밝히고 있다. 이때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그리고 김문기의 6명까지만 이야기한다. 이를 두고 이 6명이 세조 때 인정된 사육신이라고 주장한다.

(2) 사육신에 대해 최초로 기록으로 남긴 책은 남효온의 "육신전"인데, 이 개인 기록과 실록의 정사 기록을 비교해보면 상이한 점이 여럿 발견된다. 가장 심한 경우가 유응부인데, 벼슬이나 행적 등을 보아 남효온이 김문기를 유응부로 오인해서 기록한 것이라는 주장까지 있다.

필자의 생각에는 (1)은 그렇게 6명만이 언급되었지만, 거기서 그들을 (사)육신으로 명시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반드시 사육신을 정의하는 것이라고 볼 근거는 되지 못한다. 사육신의 명칭과 개념은 대략 남효온에게서 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그가 언급한 것과 동일한 명단이 뒤에 언급할 정조대왕 때 확실시 된 것을 보면, 세조 때 비록 중요인물로 언급된 6명 중 하나에 김문기가 들어가지만 사육신 개념 자체가 그것과는 별개이다.

(2)는 남효온은 벼슬 관계 등의 사실에서 오류를 범한 예가 다른 사람에서도 발견되는데, 이것은 직접적인 사료를 보지 못하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정리한 근본적인 한계에서 오는 것이다. 만일 유응부의 경우만 벼슬을 오인했다면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도 대개 벼슬이나 자세한 행적이 실록과는 달리 나오는 것을 보면 절대적인 오인의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육신전이 김문기를 유응부로 오인했다고 내세우는 또 하나의 근거는 '불복'이란 말에서 나온다.

곧 실록의 세조 2년 6월 2일(거사가 발각되던 날) 다른 사람들은 다 공초에 복(服)하는데 김문기만 불복했다고 나온다(餘皆服招, 惟文起不服). 다른 사람들은 범죄 사실을 인정했는데 김문기는 범죄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자신은 거사 모의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부인한 것으로 볼 수 있기도 하고,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이 아니고 정당한 일이라고 끝까지 버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나중에 거열형을 당한 것을 보면 후자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육신전"의 유응부의 묘사에도 '불복'이란 말이 나온다. 세조가 단종 복위를 핑계로 나라를 뒤엎으려고 한 것 아니냐고 추궁하고 살갗을 벗기고 쇳덩이로 지졌지만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며 불복(不服)이란 말을 두 번 쓰고 있다.

이 둘을 연관 지어서 실록에 김문기만 불복했다고 나오니 육신전의 유응부가 불복했다는 기사는 김문기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실록에는 신문(訊問) 할 때 곤장을 쳤다고만 나오며, 유응부는 특별히 어떠했다는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엄밀하게 보면 불복이란 말이 실록과 육신전에서 다른 상황에서 쓰이고 있다. 반드시 실록의 김문기*만* 공초에 불복했다는 표현이 육신전의 유응부의 모진 고문에도 굽히지 않았다는 불복의 표현과 상충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육신전에는 유응부의 아우, 어머니, 처자 등의 언급과 그의 행적, 성품, 외모 같은 것들이 표현되어 있는데 반드시 김문기로 잘못 알고 기록한 것이라 보기에는 아주 어려운 사항들이다.

3. 유응부를 주장하는 논의

반면에 유응부를 주장하는 편에서는 다음과 같은 강력한 근거가 있다.

(1) 제목에서부터 사육신을 강조하고 사육신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한 남효온의 "육신전".

(2) 정조 15년(1791년) 2월 21일조에 보면, 육신(六臣)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충절을 보였음을 밝히며 그들을 장릉(莊陵 = 단종(端宗)의 능)에 배식(配食 = 배향)하고 있다. 이때의 묘사가 이렇다.

"이달 경술일에 사관이 실록을 상고하고 돌아와 아뢰어 더욱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되자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을 편찬하였다." ("어정배식록"이란 왕이 단종의 능에 배향할 사람들을 정해 기록해 놓은 것을 말함.)

그 내용으로는 정단(正壇)에 32명, 별단(別壇)에 198명을 배향했다. 정단에 배향한 사람들의 순서를 보면 육종영(六宗英 = 6인의 종친), 사의척(四懿戚 = 4인의 외척), 삼상신(三相臣 = 3인의 재상), 삼중신(三重臣 = 3인의 판서), 양운검(兩雲劒 = 2명의 무관), 박중림(후에 왕이 추가함), 사육신, 사육신의 아버지와 아들 중 특별한 사람들, 그리고 기타이다. 사육신은 종2품 이하의, 최상위급이 아닌 문반과 무반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서도 32명 중 20명째에서 시작한다. 앞에 있는 삼중신에는 민신(이조판서), 김문기(공조판서), 조극관(이조판서)이 해당된다.

이 기사에서 김문기는 "육신이 화를 당하던 날 함께 죽었다"고 표현된다. 확실히 사육신의 개념에서는 벗어난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의 사실(史實)들은 추가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명확한 사실(事實)들을 직시하고 있다.

4. 문제의 해결

이상의 논의를 고려하면 문제가 의외로 단순하게 풀릴 수 있다.

곧 김문기는 사육신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거사를 도모하다 죽었고, 그중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 어떤 이유에서건 그중 여섯 명이 사육신으로 정조 때에도 이미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다. 그 명단을 정조 이후로도 200년도 넘은 지금에 와서 바꾼다거나 7명을 가지고 사'육'신으로 부른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래도 정조 때까지 사육신의 개념과 명단이 확정된 것에는 남효온의 영향력이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비록 남효온의 기록에 실록과 비교해서 오류가 발견되는 것 때문에 비평의 여지가 있어왔지만 앞서 유응부의 경우에서 논한 것처럼 그 기록의 가치를 부정할만한 정황은 있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용에서 아주 다른 측면의 인식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실록에서 보면 정조 때에도 이미 사육신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충절의 대표로 인식되어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사육신을 포함한 32명의 배향을 정할 때에도 다른 사람들의 충절도 사육신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으로 정했으며, 대략 왕의 종친과 벼슬의 순서로 정한 것이어서 그 시대의 관념으로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 기림(배향)의 순서에서 사육신보다 앞선다. 그 가치에서 차등이 있는 사람들은 198명을 따로 별단으로 위치시켰다. 이렇게 보면 3중신에 해당되는 김문기도 사육신과 그 정도에서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동일한 충절을 지닌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문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문기를 충절이 높고 사육신보다도 앞서 있던 지위의 사람이었음을 인식하고 자부심을 가지면 되고, 대신 그가 사육신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반면 유응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육신에 김문기가 아니라 유응부가 포함되어 왔음을 자부심으로 삼되, 단종 복위 사건에서 사육신의 충절만이 유일하게 추앙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김문기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동일한 가치를 지녔음을 깨달아야 한다.

사육신묘는 그게 그대로 사육신묘로 유지된다면 사육신(유응부 포함)이 우선이다. 그렇다고 거기서 반드시 김문기를 포함한 다른 절신(節臣)들을 배척할 이유도 크지 않다. 김시습이 당시 찢겨 죽은 이들의 시신 조각들을 모아다가 만들어 시작된 무덤이지 사육신이라는 개념이 있어 그들만을 모시자고 시작된 무덤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에 김문기를 적극적으로 숭상하고 싶다면 3중신묘나 3중신전, 아니면 더 크게 해서 단종충신전 같은 것을 만들어 해결하면 된다.

5. 결어

이렇게 명확한 사안을 가지고 광고전에 비방까지 난무하게 된 현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실록에 나란히 묻힌 세 명의 무덤 앞에서 술을 올리는 순서를 누가 임의로 바꾸었느니 어떠니 하면서 서로 목숨 걸고 싸우는 예도 보인다. 아직도 위패의 순서가 어떠니, 제를 올리는 순서가 어떠니, 하면서 지루한 감정싸움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아주 작은 차이라도 차별할 수 있을 때 한껏 부풀려서 맘껏 차별해야 이익이라는 잘못된 생각에 굳어져 온 우리 사회이다. 관직 하나 혹은 명칭 하나로 인간의 진심과 충정의 경중이 따져질 수는 없는 법이다. 또한 명백한 사실(史實)을 무시하고 왜곡하는 일도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 한편 다른 많은 단종 충신들이 있었는데 유독 사육신의 충절만이 강조되어 있지는 않는지도 검증해 봐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바로 정조 15년의 일이 이런 작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성(理性)과 인간의 가치가 항상 빛으로 인도하는 세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2008년 12월 7일

채하 류주환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바이오응용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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