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랫만에 영원지기, 둘째 딸과 설국열차를 관람하였다.
고 3인 아들은 같이 가자 했으나 예나 다름없이 거절하여 3명이 갔다.
성경의 노아의 방주, 즉 배가 기차로 바뀌고 홍수가 빙하로 바뀌며
현대의 자본주의, 계급사회를 반영하고
점진적이 아닌 단절적 인류창조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참고로 영화평론가 황진미님의 평론을 전제한다.
< 설국열차 > 는 인류종말의 미래를 담은 동명의 프랑스만화를 봉준호 감독이 영화화한 대작이다. 박찬욱 감독이 제작을 맡고, 송강호와 고아성이 출연했으며, 홍경표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맡았지만, < 설국열차 > 를 한국영화로 단정해서 말하긴 힘들다. 크리스 에반스, 존허트, 틸다 스윈튼 등의 외국 유명 배우들이 출연했고, 미술감독, 음악감독, 무술감독 등으로 미국, 영국, 체코의 유명스태프들이 합류했다.
대부분의 촬영은 체코의 스튜디오에 만들어진 세트에서 이루어졌으며, 언어는 영어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송강호와 고아성만이 한국어를 사용한다. 한국이 제작의 핵심을 맡았지만, 가히 세계를 아우르는 글로벌 프로젝트라 할만하다. 판매 역시 글로벌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후반작업 중이던 작년 11월에 이미 전 세계 167개국에 선판매 되어 국내개봉 이전에 400억 원이 넘는 제작비의 절반 이상이 회수된 상태이다.
◆ 계급사회와 혁명에 대한 은유를 품고 달리다
영화 < 설국열차 > 는 제작과 배급뿐만 아니라, 내용의 측면에서도 글로벌한 스케일을 지닌다. 지구온난화가 심해지자, 각국 정부는 인공기온강하제를 대기 중에 투하한다. 그 결과 지구는 신빙하기를 맞는다. 자연을 100%통제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인간의 오만이 부른 끔찍한 재앙인 것이다. 인류의 대부분은 얼어 죽고, 설국열차에 탑승한 승객들만 살아남아 17년째 눈 덮인 대륙 위를 달리고 있다. 설국열차는 폐쇄된 생태계이자 계급사회의 축소판이다. 승객들은 탑승당시 정해진 계급에 따라 기차 안에서의 위치를 부여 받는다. 가까스로 꼬리 칸에 탑승한 승객들은 포로수용소 혹은 노예선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엄격한 규율을 강요받는다.
그들은 앞 칸으로부터 나오는 단백질블록을 배급받아 살아갈 뿐, 노동도 하지 않는다. 이따금 몇 명만이 차출되어 앞 칸에서 노동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앞 칸의 승객들은 호화생활을 한다는 소문이 무성한 가운데, 가끔씩 특정연령대의 아이를 강제로 징발해가는 일로 인해 꼬리 칸 승객들은 분노로 들끓는다.
까뮈가 말했듯, 저항하니까 인간이다. 꼬리 칸의 사람들은 반란을 계획한다. 17년 동안 몇 번의 반란이 시도되었지만, 모두 도중에 진압 당했다. 꼬리 칸에서 '성자'로 추앙받는 길리엄(존 허트)과 냉철한 혁명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새로운 시도로 반란을 획책한다. 감옥 칸에 감금되어 있는 열차의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송강호)를 탈출시켜, 차례로 객차의 문을 열고 진격하려는 것이다. 가장 앞 칸에는 열차의 심장에 해당되는 '성스러운 엔진'과 열차의 창조자이자 엔진의 수호자인 윌포드가 있다. 마침내 유혈이 낭자한 충돌을 시작으로, 꼬리 칸의 반군들이 남궁민수와 그의 딸 요나(고아성)와 함께 객차의 문을 열고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가는데....
< 설국열차 > 는 계급사회와 혁명에 대한 은유를 노골적으로 품고 있다. 칸칸이 나누어진 공간에 의해 계급사회의 위계가 선명하게 제시된다. 꼬리 칸의 반군들이 앞으로 전진하며 보게 되는 앞 칸의 모습은 실로 별천지이다. 초반의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가 연설하는 내용은 계급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균형과 질서를 강조한다. 꼬리 칸 승객들은 열차에 대하여 아무런 권리도 가지지 못하며, 절대 권력자인 윌포드의 자비에 의해 살아남게 된 '잉여'들이다. 절대 다수인 그들이 열차 내에서 생산자로서의 위치도 부여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시스템은 역사상 어떤 계급사회보다도 현재의 신자유주의의 세계를 닮았다.
그러나 완벽하게 설계되어 윌포드에 의해 성스럽게 굴러간다는 그 엔진은 기실 꼬리 칸의 잉여들에 의해 공급되는 특정한 생체노동에 의존한다. 설국열차는 완벽한 관리에 의해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외부와 차단된 세계인만큼 조금씩 멸종되고 고갈되는 것들이 생긴다.
절대다수의 잉여를 보유한 채, 그들에게 공포와 무기력을 내면화시키며, 그들 중 가장 약자의 희생을 기반으로 굴러가는 이 시스템은 사실 영구히 굴러갈 수 없는 체제이다. 그러나 이처럼 '지속 불가능한 사회' 임에도 불구하고, 모순은 균형과 질서의 이름으로 은폐되고, '체제 바깥은 죽음뿐'이라는 대안부재로 인해 '성스러운 엔진'은 유일하고 영원한 것으로 추앙받는다. 액션의 템포를 늦추어가며, 이례적으로 길게 찍은 학교 칸 장면은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가 어떤 식으로 절대화되고 재생산되는지를 징그러울 정도로 잘 풍자한다.
◆ 봉준호가 제시하는 혁명의 두 가지 모습
< 설국열차 > 가 보여주는 혁명의 모습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혁명군이 국가권력을 장악하여 통치기구를 접수한 다음, 그 통치기구를 그대로 활용하여 혁명정부를 수립하는 것이다. 정권교체를 위주로 하는 개혁주의는 물론이고, 국가사회주의나 스탈린주의 역시 국가권력의 해체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 통치주체는 바뀌었지만, 통치의 방식은 그대로인 상태. 사실 이것은 체제를 더 오래 유지시키는데 도움이 된다.
커티스가 마지막 엔진 칸에 도달했을 때, 그는 윌포드의 초대를 받는다. 그는 엔진이라는 권력을 향해 돌진했을 뿐, 그것을 탈취한 후 이 시스템을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가진 것 전부를 몰수당한 채, 약자를 잡아먹는 인간이하의 상태에 내몰린 꼬리 칸에서 자신의 팔을 내주었던 '성자' 길리엄 역시 윌포드의 시스템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길리엄은 혁명도중에 이만하면 됐다고 말 한 적이 있다. 그가 윌포드와 내통해왔다는 말은 윌포드의 악의적인 과장일 수도 있지만, 길리엄이 윌포드의 수권자로서의 고뇌를 가장 잘 이해했다는 것만은 진실이다.
커티스 역시 막상 권력 앞에 도달하자, 이 시스템을 윌포드와 다르게는 커녕 그 만큼이나 잘 운영해나갈 자신이 없다. 결국 그는 '권력을 잡고 나니 똑같아진 변절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피를 흩뿌렸던 장엄한 혁명도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조절책일 뿐이었단 말인가! 이는 수많은 혁명이 실제로 봉착했던 역사철학적 딜레마이다. '아버지'를 죽이러 왔으나, 자신의 존재가 통째로 부인당하는 아이러니 앞에서 커티스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고, 그 균형과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괴롭혀왔던 윤리적 죄의식을 씻기 위해, 자신의 팔을 내어주고 엔진의 부속품이 된 소년을 끄집어낸다. 윌포드의 시스템전체를 어떻게 부인해야 할지 대안을 갖고 있진 않지만, '가장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을 부인함으로써, 혁명가로서의 자기완결성을 이룬 것이다. < 설국열차 > 가 지닌 진정한 정치적 전복성은, 유혈참극이 벌어지는 전반부가 아니라 커티스가 윌포드를 만난 이후에 있다.
< 설국열차 > 가 보여주는 또 다른 혁명은 바로 체제 바깥을 사유하며 체제를 폭파해버리는 것이다. 남궁민수는 객차 사이에 가로놓인 문이 아니라, 열차 밖으로 나 있는 문을 가리킨다. "이게 하도 오래 닫혀 있어서, 다들 벽인 줄 아는 모양인데, 이게 사실은 문이야." 그는 첫 봉기의 실패 후 '체제 바깥은 죽음'이라는 교훈으로 제시되는 '얼어 죽은 7인'의 자리에서, 바깥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한다. 그는 결국 밖을 향해 열차를 폭파시킨다. 물론 시스템의 파괴는 대량살상을 초래하는 폭력이다.
시스템을 그대로 둔 채 국가권력을 탈취하려는 잘못된 혁명론에 대한 반편향으로, 아예 어떠한 시스템도 부정해버리는 이 결말은 분명 아나키즘적이다. 커티스의 독단이 아닌 민주적인 과정을 통해 권력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를 창안해나가며, 엔진의 상태와 바깥세계의 변화에 대한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연착륙을 시도하지 않은 것을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 결말이 허망하고 자멸적이며 냉소적이라는 비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열차 밖은 모든 생명이 절멸했다는 믿음과는 달리, 북극곰이 살고 있을 만큼 생태계가 회복 중이며, 처음으로 땅을 디딘 소녀와 소년은 인류의 새로운 시작을 기약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함께 태어난 근대의 상징, 철마는 그렇게 파괴되었다. 새 눈을 살포시 디딘 순연한 유색의 혼혈종족은 그렇게 탄생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