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민초

억울하면 권력을 잡아라

지성유인식 2013. 6. 20. 05:00

신상필벌(信賞必罰)이란 말이 있다. ‘공이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상을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는 반드시 벌을 준다’는 뜻이다. 상과 벌을 공정하고 엄중하게 하는 일은 국가경영의 기본으로 일컬어져 왔다. 한 엘리트 중견 외교관의 사표가 ‘정부의 신상필벌 원칙은 무엇이고,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다.

지난해 한일 정보보호협정(GSOMIA) 밀실처리 논란의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던 조세영 전 외교부 동북아국장(52·외무고시 18회)이 최근 사표를 낸 것으로 18일 확인됐다.

조 전 국장은 지난해 6월 외교부가 ‘상반기 내에 일본과 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한다’는 이명박정부의 방침에 따라 국무회의에서 협정안을 비공개 처리했을 당시 실무 책임자였다. 일본과 군사 정보를 공유하는 민감한 내용을 충분한 공론화 절차도 없이 서둘러 밀실 처리했다는 여론의 비판이 거셌다. 그 책임의 1차 화살은 이른바 ‘정권 실세 중 한 명’이던 김태효 대통령대외전략기획관을 향했다. 그 무렵 익명의 청와대 고위인사가 조 전 국장의 실명과 함께 그의 책임론을 한 언론에 거론했고 외교부는 곧바로 조 전 국장을 직위 해제하고 본부 발령 조치를 내렸다.

조 전 국장은 그 후 1년간 아무 보직 없이 대기 발령 상태였다. 이명박정부도, 박근혜정부도 그에게 ‘책임의 끝’이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고 사실상 방치했다. 외교부의 대표적 아시아통이자 ‘에이스 외교관’으로 평가받던 그는 결국 스스로 옷을 벗는 선택을 했다. 그의 사의를 말렸던 한 지인은 “아무런 기약 없이 손놓고 대기하면서 세금으로 나오는 월급을 받을 수 없다는 조 전 국장의 생각이 확고했다”고 전했다.

조 전 국장의 사표 소식이 퍼져나가면서 정부 안팎에서는 몇 가지 의구심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그의 죄가 무엇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한 중견 외교관은 “한일 정보보호협정은 국익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청와대와 외교부 내에 있었다”며 “그 추진 방식(밀실 처리)만 문제된 것인지, 아니면 그런 공감대 자체도 문제인지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국민대 행정학과 홍성걸 교수는 “정권의 주문을 집행하던 관료가 나라를 위해 더 일할 기회만 놓치게 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이번 사안은 상과 벌이 공정한지도 묻고 있다. 지난해 당시 민주당은 “청와대와 국무총리, 주무 장관인 외교 및 국방 장관이 책임져야 할 일을 일부 실무자에게 떠넘긴 국민 기만 조치”라고 비판했다. 협정의 비공개 처리를 보고받아 경고 조치를 받았던 안호영 외교부 1차관은 이번 공관장 인사 때 주미대사로 영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정부 관계자는 “조 전 국장의 사표 소식을 접하고 ‘억울하면 더 높이 출세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말했다. 결국 정치적 부담이 있는 사건이 터지면 ‘꼬리 자르기’식 책임 추궁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한 당국자도 “이런 식으로 공무원을 쓰고 버리면 앞으로 누가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온몸을 던지겠는가”라고 말했다. 조 전 국장은 9월부터 지방의 한 대학에서 특임교수로 활동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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