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에 대한 우리의 의견

나라 이름 "대한민국"은 이렇게 태어났다

지성유인식 2004. 9. 1. 09:36

우리 한민족은 한반도와 그 북쪽의 광활한 만주 벌판을 무대로 하여 고조선 시대(古朝鮮 時代)를 시작으로 삼국시대(三國 時代),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 時代), 후삼국시대(後三國 時代), 고려시대(高麗 時代)로 이어지며 수 천년 동안 면면히 내려오다

마지막으로 500여 년 간 지속되어 온 조선 왕조(朝鮮 王朝)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과학기술로 무장한 서양세력과 우리보다 일찍 서양의 물질문명을 받아들인 일본의 세력간에 국제적인 각축장으로 변모함으로써 나라의 장래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과거의 틀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 근대적인 부강한 나라로 탈바꿈하기 위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과 을미개혁(乙未改革)을 추진하고,

이어서 나라의 체제를 근대 국가로 전환시키고자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중국의 소방(小邦)으로 자처해 오던 당시의 조선 정부는 이로써 중국과 동등한 지위의 자주국가임을 대내외에 선포하는 의례로서 지금의 서울특별시청 앞 소공동의 웨스턴 조선호텔 자리에 환구단(?丘壇)('원구단'이라고도 하나 1897년 당시의 「독립신문」에서는 '환구단'으로 거듭 쓰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환구단'으로 한다)을 짓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높이 걸어 애국심을 표하는 등 경축분위기 속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완성된 환구단의 모습을 당시의「독립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이전 남별궁(南別宮) 터전에 단을 모았는데 이름을 환구단(?丘壇)이라고도 하고 황단(皇壇)이라고도 하는데 역군과 장색 천여 명이 한달이 못되어 거의 다 건축을 하였는데 단이 삼층이라.

맨 밑층은 장광이 영척으로 일백 사십 사척 가량인데 둥글게 돌로 쌓아 석자 길이 높이를 쌓았고,

제이층은 장광이 칠십 이척인데 밑층과 같이 석자 높이를 쌓았고,

맨 윗측은 장광이 삼십 육척인데 석자 길이로 둥글게 석축을 쌓아서 올렸고,

바닥에는 모두 벽돌을 깔고 맨 밑층 가으로는 둥글게 석축을 모으고 돌과 벽돌로 담을 쌓았으며 동서남북으로 황살문을 하여 세웠는데 남문은 문이 셋이라.

이 단은 금월 십이일에 황제폐하께서 친행하시어 거기서 백관을 거느리시고 하느님께 고하시는 예식을 행하실 터이라.」(《독립신문》, 광무 원년 10월 12일자, 논설)

 

고종 임금님은 이곳에서 천지(天地)에 제사를 올린 후 칭제건원(稱帝建元)하고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하였으니 때는 1897년 10월 12일이었다. 이를 천명하는 황제의 반조문(頒詔文)은 다음과 같다.

 

「짐(朕)이 생각건대 檀君(단군)과 箕子(기자) 이래로 강토가 나뉘어 각각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서로 雄(웅)함을 다투다가 高麗(고려)에 이르러 馬韓(마한) 辰韓(진한) 弁韓(변한)을 呑倂(탐병)하였으니 이것이 三韓(삼한)을 統合(통합)함이다.

우리 太祖(태조)께서 용흥하는 처음에 輿圖(여도)로써 밖으로 개척한 땅이 더욱 넓어져 북으로 靺鞨(말갈)의 界를 다함에 상아와 가죽을 생산하고 남으로 耽羅國(탐라국)을 걷움에 귤과 풍부한 여러 해산물을 貢(공)하는 지라. 폭원이 4천리에 一統의 業을 세우시며 禮義法度(예의법도)는 唐虞(당우)를 조술하고 산하가 공고하여 福을 우리 子孫萬歲(자손만세) 반석의 宗에 드리셨거늘 오직 짐이 不德하여 여러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上帝께서 돌아보시어 위태함을 돌려 平安함을 갖게 하고 獨立의 기초를 창건하여 自主의 權利를 행케 하시니, …… (중략) …… 금년 9월 17일(양력 10월 12일)에 白嶽〔백악 : 북악산을 말한다〕의 남에서 天地에 祭를 올리고 황제의 즉위하며 천하에 號를 정하여 '大韓(대한)'이라 하고 이 해로써 光武 元年을 삼는 것이다.」(『고종실록』권 35, 광무 원년 10월 11일)

 

즉, 大韓은 朝鮮의 부정이나 혁명이 아니라 도리어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래의 분립, 자웅을 다투던 여러 나라를 통합하고 나아가 마한·진한·변한(馬韓·辰韓·弁韓)까지 탐병(呑倂)한 고려(高麗)를 이은 조선의 유업을 계승, 「독립의 기초를 창건하여 자주의 권리」를 행하는 뜻에서 국호를 정하였다고 밝힌 것이다.

 

황제 즉위식이 거행된 다음날 조정에서는 '朝鮮(조선)'이란 국호를 '大韓(대한)'으로 변경하여 마침내 '大韓帝國(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이후 대한제국 헌법의 의미를 가지는「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가 1899년 8월 17일 반포됨으로써 비로소 법률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총 9조로 구성되었으며, 황제의 육해군 통수권, 계엄·해엄령 발포권, 법률의 제정·반포 등 일체의 법률권을 황제에 귀속시키고, 문·무관의 출척·임명권, 외국과의 조약·선전·강화·사신파견 등을 규정하고 있다.) 국호를 결정한 것은 고종과 대신들로서, 그 날 국호를 변경한 이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나라는 옛 나라이나 天命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 이래로 황제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 조선은 기자(箕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大韓이란 이름을 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이런 이름을 쓴 적이 없다. 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 등 원래의 三韓을 아우른 것이니 큰 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고종실록』권 35, 광무 원년 10월 11일)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 정부에서는 이를 곧 국민에게 알렸다. '독립신문'의 영문판과 '한국휘보' 등에서 이 내용을 내외 국민에게 상세하게 보도했다.

「금월 십 삼일에 내리신 조칙으로 인연하여 조선 국명이 대한이 되었으니 지금부터는 조선 인민이 대한국 인민이 된 줄로 아시오」(《독립신문》논설, 광무 원년 10월 16일)

 

여기에서 저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高麗(고려)에 이르러 馬韓(마한) 辰韓(진한) 弁韓(변한)을 呑倂(탐병)" "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 등 원래의 三韓을 아우른 것이니 큰 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

이를 유추해 보면 삼한의 韓을 이어 받은 것으로 되며, 큰 韓을 의미하는 데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 삼한의 경계는 한수 이남으로 일반적으로 마한은 한강유역으로부터 충청·전라도에 걸쳐 있었으며, 진한은 경기·강원도 일부, 변한은 낙동강유역 경상도인데 韓이라는 의미가 아무리 국호의 의미로 좋다고 하여도 영토적인 면은 너무나 초라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중국과 대등한 위치로 올라서고자 왕을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바꾸는 것인데...

아니면, 삼한이 조선말에 어떠한 국가(?)나 부족(?)으로 각인(또는 재조명)되고 있었을까요?

그리고, 여기서 高麗라함은 고구려로 보여지는데 우리는 고구려의 지리적 위치를 한수 이북으로 배웠는데, 삼한을 탐병한 고구려의 지리적 위치와 한수 이남의 삼한의 위치와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정현아는 역사 인식이나 의식이 많이 부족해요.
나는 새 님의 글 스크랩 할께요?
이해 바라고요.
늘 가가운 곳에 두고 읽어볼께요.

저녁으로 달려가는 시간이
즐거움으로 가득 너울거리길 바랄께요.
 

이 2장의 사진은 (사) 국사광복중앙회 그 소속 한국상고역사교육원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 회원 중 한분으로부터 교육자료로 받은 것인데

결론은 삼한은 상고사에 속하는 역사로 강단사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마한.진한.변한의 국토가 중고대륙 포함은 물론

그 보다 더 넓은 지역을 지배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정하고 보면 "高麗(고려)에 이르러 馬韓(마한) 辰韓(진한) 弁韓(변한)을 呑倂(탐병)" "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 등 원래의 三韓을 아우른 것이니 큰 韓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는 말이 수긍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