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협약은 식민 청산의 마지막 과제 : 조선 외교권 빼앗긴 상태 조약 무효
1909년 청(淸)과 일본의 간도협약을 인정한다면 한중 국경은 압록강∼백두산정계비∼두만강이 되고, 백두산 천지조차 중국에 속한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철도 탄광 등 이권을 넘겨받은 만주협약의 대가로 청에 간도 영유권을 넘겨 준 간도협약은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에서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강박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무효이기 때문에 을사늑약을 근거로 청과 체결한 간도협약도 무효”라고 설명한다. 사실 일본도 간도협약 체결 전까지는 간도가 한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구축한다’는 조항을 명시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을 수용했기 때문에 간도를 1909년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야 옳다.
포항공대 박선영 교수가 “간도협약은 제국주의가 청산된 뒤에도 원래대로 환원되지 않은 거의 유일한 조약”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5년 후면 간도협약이 체결된 지 100년이 된다.
●백두산정계비는 의미 있는 국경조약 : 옌볜자치주-연해주일부 한국領 해석
조선과 청이 공식적으로 국경 문제를 논의한 것은 1712년이다. 당시 청의 목극등(穆克登)은 ‘서쪽으로는 압록, 동쪽으로는 토문을 경계로 삼는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내용의 백두산정계비를 백두산 병사봉(장군봉)에서 남동쪽으로 4km가량 떨어진 지점에 세웠다. 서울대 백충현 교수는 “이 정계비가 현대적 의미의 양국간 협정의 근거로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한중간 국경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정계비를 국경조약이라고 보면 북간도 지역(지금의 옌볜조선족자치주 일대)과 연해주 일부는 한국 영토에 해당하며,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 지역은 중국 영토가 된다. 정계비 내용을 엄격하게 해석하면 연해주도 한국의 영토가 된다.
당연히 중국 학계에서는 정계비의 국제법적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 주류다. “정계비를 조선이 임의로 옮겨 놓은 혐의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정계비는 양국간 협정이 아니라 단지 청의 변방 답사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은 정계비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목극등 심시비(審視碑)’라 부르기도 한다.
●先占 이론에 따르더라도 결론은 같다 : 朝鮮관리 파견 ‘봉금지역’ 되찾아야
정계비와는 별도로 간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은 17세기 중반부터 간도지역에 봉금령(封禁令)을 내리고 19세기 초까지 자국민이 들어가는 것을 막은 반면 조선은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산 것이 여러 기록을 통해 입증된다.
중국 역사서에도 이미 15, 16세기부터 봉금지역에 조선인이 상당수 거주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조선이 1902년 이범윤(李範允)을 간도시찰사로 임명했을 때 이 지역 인구는 무려 2만7400여호에 10만여명이나 됐다.
따라서 국제법상 영토취득 방법의 하나인 선점 원칙에 따르더라도 간도 영유권은 한국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동간도 지역에 대해서는 △조선인들이 개척한 점 △조선이 시찰사를 임명한 점 등을 근거로 든다. 또 서간도 지역에 대해서는 △무인지대 관할권이 조선에 있었던 점 △조선이 변계감리사를 임명한 점 등을 근거로 든다.
간도 영유권 문제는 독도 문제보다 훨씬 복잡하다. 명백한 우리 영토인 제주도에 관해 국제조약이 없듯이 독도에 관한 국제조약은 없지만, 간도에 관해서는 중국과 조선, 중국과 일본, 중국과 북한 사이에 여러 개의 국제조약이 있다. 간도 문제 논의는 이들 조약에 대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
조약만 보면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데 있어서 한국측 논리가 우세하다. 하지만 간도 문제는 법적 문제인 동시에 정치적 문제이고 영토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국 정부가 끊임없이 간도에 대한 권리의식을 갖고 국제사회에 주장해야 하는 이유다.
간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광물이 많이 매장돼 있다. 어업자원과 산림자원도 풍부하다. 또한 한 중 러 3국의 세력이 닿아 있는 전략요충지. 중국이 동북공정를 통해 간도에 부쩍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그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이다.
1712년 조선과 청(淸)의 백두산정계비 건립은 주권을 가진 양국의 대표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경문제에 합의한 것이었다. 이후 두만강이 아닌 다른 물줄기 ‘토문(土門)’의 존재를 알았던 조선인들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훗날 간도라 불리게 될 황무지를 억척스럽게 개척했다.
청이 간도 주민들을 자국민으로 편입하려 하자 1882년 이 지역의 조선인들은 조선 조정에 보호를 호소했다. 그러나 기울어지는 국운은 이들을 외면했다. 그리고 1909년의 간도협약은 조선을 배제했고, 1962년의 북-중밀약엔 남한이 빠졌다. 정계비 건립 이후 292년이 지난 지금도 간도의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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