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에 대한 우리의 의견

고구려

지성유인식 2002. 11. 15. 08:35

고구려담론1-그 미래모델의 의미

윤명철 (ymc0407@netsgo.com)
고구려연구회

1.서 언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밀레니엄이라는 21세기를 맞아 엄청난 대 변혁의 폭풍 가운데서 휩쓸려 다니고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두에 걸쳐 개편된 세계질서가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진동과 큰 진폭으로 다시 재편되고 있다. 앞으로 몇년 간에 짜여진 기본 틀은 인류의 장래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적으로 각 민족과 국가들의 50년 내지 100년의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도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세계화가 추진되고 新文明이 도래하는 현실을 맞이하면서도, 우리는 나아갈 座標를 설정하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 안으로는 인간성을 잃어가고, 도덕적으로 황폐화 되며, 사회질서는 뿌리채 흔들리는 등 혼란이 심해지고 있다. 한편 밖으로는 세계질서에 대하여 어떻게 적응할까하는 對應論理가 성숙되지 못했다.

또한 정제되지 못한 외부문화가 범람하면서 진정한 의미의 世界化(globalization)마져 이루지 못하고 있다. 더우기 IMF사태가 발생하여 국가의 금융위기는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 남북정상이 만나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모색하는 움직임을 속도감있게 전개하고 있다. 바햐흐로 민족사의 최대위기이면서 동시에 도약할 수 있는 호기이기도 한 매우 중대한 시기이다.

이러한 상황을 맞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방법을 모색하고, 적합한 對應方法論을 만들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가치관을 만들고, 또 방향을 결정하는데 남의 눈을 통하고, 남의 입장에서 하였다. 다른 세계를 해석한 틀로 우리의 삶과 미래를 규정짓고, 남의 모범 답안지를 갖고, 우리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정답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한 집단을 기본적으로 해석하는 일은 그 집단 스스로가 하는 것이 순리이다.

일을 주체가 해석을 하는 것은 名分으로나 實質로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야말로 모든 일을 같이 체험했고, 절실함을 느끼며, 또 집단의 지향점과 생각을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남의 생각을 흉내내고 남의 모델을 빌어서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비현실적일 가능성이 많으며,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도 미리 알 수 없다. 또한 다양한 실험과 치밀한 검증작업이 미흡하거나 생략되어 있으므로 실패할 확률이 그만큼 많아진다. 이러한 이유때문에 한 집단의 경험과 역사는 바로 主體集團의 言語와 생각을 바탕으로 해석해야하며, 문제의 해결방법 또한 스스로가 찾아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천 수백년 동안 종교 사상 이데올로기 등의 남의 이론과 모델을 빌어다 허겁지겁 전면적으로 적용하려는 서글픈 노력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고, 결과적으로는 자기역사에서 마져 周邊部로 밀려나 傍觀者的인 태도로 살아왔다.

이러한 과거에 행해졌던 한계를 극복하고, 주어진 몇가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한 모델을 우리 역사에서 찾고자 한다. 우리에겐 남의 모델을 적용하고 유예기간을 갖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상황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사실을 고증하고 내용과 본질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what)이고, 왜(why) 그렇게 되는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어떻게(how) 해결하는가 하는 방법론을 추구하고, 제시하는 것도 중요한 사명이다.

역사학이 야말로 경험과 실험과 사실을 바탕으로 한
학문이다. 이미 검증한 사건을 수단으로 삼음으로서 실패율이 적은 해결방법론을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숱한 역사과정 속에서 가장 바람직한 모델을 설정할 수가 있다.

때문에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未來學인 것이다.

몇 년전부터 고구려에 대한 열풍이 불고 있다. '고구려연구회' 등 전문학회가 만들어지고, 관련된 학술회의가 자주 열리고 있다. 또한 전공학자들이 늘어나면서 고고학적인 발굴도 이루어지고, 전문서나 대중적인 책들이 출판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장르를 넓혀 생활이나 예술 등에 영향을 끼치면서 그림 연극 춤 노래 컴퓨터 게임 등 고구려를 주제로한 다양한 장르의 활동들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들은 왜 일어나고 있을까?

고구려는 우리에게 뭔가 강하고 의미있는 메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고구려는 현재 우리 민족이 추구하고, 달성해야할 목표들을 이미 천 수백년 전에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실천했으며, 또 실패했던 경험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사관에 젖은 현재와는 달리 제국을 지향했으며, 오랫동안 넘볼수 없었던 중국과 북방국가들, 심지어는 일본에 대하여 자주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가졌다.

우리가 마음속 깊은 곳에 숨기고 있는 '넓이 콤플렉스', '대국 콤플렉스' 등을 풀어버릴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 우수한 고유문화를 開花시키고, 自意識을 지닌 나라였다.

때문에 우리민족의 역사를 해석해온 몇가지 고정된 틀과 관념을 깨고, 변화시킬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숨겨지고 왜곡되었던 진실들을 알려줄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농경민족이었다.' '반도민족이었다.' '중국문화의 아류였다.' '오랫동안 중국의 주변부로서 정치적인 지배를 받았다.' '停滯性을 갖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었다.' '恨의 민족이었다.''고구려는 지배계급의 내분으로 망했다.' 등등의 주장은 적어도 고구려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는 것들이다.

필자는 고구려의 성격과 발전과정, 그들의 세계관 등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서 우리 역사와 정체성에 대한 근거없는 편견을 불식하고, 고구려를 통해서 구할수 있는 21세기적인 의미와 대안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래서 앞으로 생존전략의 차원에서 우리민족이 설정해야할 패러다임의 한 모델로서 고구려를 삼고자 한다.


2. 민족 정체성의 확립과 고구려 정신

우리는 고구려를 통해서 우리민족의 자아(정체,identity)를 찾고, 확립할 수 있다.

당면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21세기에 자주적인 역사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해야할 일은 많이 있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1차적인 과제는 잊어버렸고, 잃어버렸던 민족의 자아를 찾고 회복하는 일이다.

개인에게 自我가 있듯이 민족에게도 自我가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하여, 사회가 사회답고, 민족이 민족답게 존재하기 위하여는 자신에 대한 自覺, 민족에 대한 자각이 투철해야 한다. 자아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삶에 대해 자신감도 갖지못할 뿐 더러, 자존심도 약하고, 의미있게 살려는 노력도 게을리 한다. 집단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민족은 항상 다른 민족과 구별되려고 하며, 경쟁의식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으므로 자아가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역사에서 진보의 동력은 자아의식에서 부터 나온다.

자아의식이야 말로 사회를 밝게하고 민족과 역사를 진보시키는 에너지이다. 정체성이란 Harald Muller의 말처럼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류의 역사과정이 말해주듯이 민족자아의 상실은 사회와 역사발전의 왜곡을 가져오고, 내부의 인간들로 하여금 自由意志를 포기하고 非主體的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 당연히 그 사회는 生命力과 진실을 잃어버리게 되고 인간성은 오염되며, 다른민족과의 경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외세에 의하여 자주적인 역사발전이 오랫동안 저해당해왔고, 영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다.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발전의 단계는 고구려의 멸망, 발해의 멸망으로 인하여 저지당했다. 그리고 만주일대에 뻗쳐있던 광활한 영토와 삶의 터전을 앗겨버렸다.

영토의 상실이란 단순한 땅이나 자연환경의 손실이 아
니다. 그 땅과 인연을 직접 간접으로 맺은 삶의 상실, 역사의 상실이다.

때문에 문화가 왜곡되거나 감추어져왔을 뿐 만 아니라 자기문화를 현장체험을 할 기회마져 봉쇄당했다.

천여년 이상 우리는 잃어버린 땅에 삶의 흔적을 묻힐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찾을 기회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또한 외부문화를 능동적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비자발적으로 수용했고, 외부문화에 수동적으로 편입되었다.

그 때문에 우리문화에 대한 자의식이 약할 뿐만 아니라 정체성(identity)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갖지 못한채 어정쩡하게 지내왔다. 특히 근대화가 시작되고, 현재 우리의 운명을 규정한 20세기는 주체적으로 맞이할 시대가 아니었다. 세계사의 조류에 흽쓸리고,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하여 피동적으로 강요받은 시대였다.

따라서 자기의 역사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해석을 할 기회가 적었다. 스스로를 비하하게 되었고, 왜곡된 문화를 강제로 수입당했을 뿐 만 아니라, 民族自我를 상실하였다.

그 결과 닥쳐온 현실을 능동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으며 20세기를 맞이할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도 없었다. 물론 지배계급에서는 開化運動, 自强運動 등을 추진하였고, 농민들은 동학농민혁명을 통해서 나름대로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탁류를 거슬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식민지가 되었고, 민족이 분단되었으며, 급기야는 한국전쟁이라는 동족간의 살륙전이 벌어졌다. 이후에도 근대화를 비자발적으로 추진할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독재정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역시 우리의 역사발전은 왜곡되어왔다.

이제 뒤늦게나마 역사를 정상적으로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방법에는 총론적, 각론적으로 여러가지가 있다. 경제능력의 강화, 消費의 量을 증가시키는일, 합리적인 제도를 구비하는일 등 다양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토대가 되는 것은 우선 민족자존심을 회복하고, 역사의 주체는 바로 자신들이라는 자아의식을 갖는 일이다.

그러기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이라는 存在의 原根據를 탐구하고, 또 인식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민족의 고질적인 성격으로 알려져있는 강요받은 사대성, 주변성, 대국콤플렉스 등을 말끔히 해소하여야한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역사에서 모델로서 본받을 자격을 갖춘 자의식이 강했던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제국이 되었고, 문화적으로도 매우 성숙하였다.


바로 고구려이다.


고구려는 고조선과 부여를 이어받았다는 계승의식이 강하였고, 또 실제적으로도 그러하였으므로 건국한 출발부터 자의식이 강했다.

고구려인들은 해를 숭배하고, 자신들을 천손이라고 선언했다. 주몽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는 解慕漱 解夫婁 등의 부여계와 解明태자 解朱留王(3대 大武神王) 解憂(5대 모본왕,解愛婁라고도 함) 등 고구려의 초기왕족들은 이름이 解와 관련이 있었다. 이때 '解'는 물론 한자의 의미는 없고, 태양을 의미하는 우리 말이다. 각저총, 오호묘 등의 고분벽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는 三足烏는 태양을 상징하는 새이다.

고구려는 정복활동에서도 그러한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고주몽은 건국하자 마자 松讓의 沸流國을 정복한 다음에 多勿都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는 영토팽창이 고토회복 행위임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전성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하고 주변의 다양한 종족과 문화를 흡수해갔다.

그런데 북방과 동방의 새로 편입된 국민은 언어와 혈통이 다른 종족들이었다. 예를 들면 靺鞨은 고구려와는 언어와 풍속이 달랐다.

활동범주와 생활양식도 달랐다. 요하의 상류지역에는 契丹이 살고 있었고, 오랫동안 고구려와 요동을 둘러싸고 쟁패전을 벌이다가 광개토대왕 시대에 평정한 燕은 鮮卑族이 세운 나라들이었다. 장수왕시대에는 地豆于를 분할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이로보아 동몽골지방의 유목종족들도 흡수하였다. 그외에도 남으로는 낙랑 등에 거주하고 있었던 漢族도 고구려의 주민이 되었다. 이렇게 多文化國家, 多種族的 國家가 되면서
고구려인들은 종족으로서 자아확인을 더욱 중요시했다.

또한 그것을 외부에 전파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고구려인들은 출발부터 천손(天孫)의식을 더욱 강조하였으며, 언제부터인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특히 광개토대왕이 죽고 나서 2년후인 414년에 세워진 거대한 기념물인 릉비는 높이가 6,39m에다 4면의 44행에 1775자가 음각되어 있다. 그 곳에는 광개토대왕이 생전에 이룩한 정복활동과 업적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형식미는 상징과 논리를 함유하고 있다. 그 장엄미를 내뿜고 흠모와 경외심을 일으키는 몸체 속에 고구려인의 언어로 역사관 및 세계관 등을 응축시켜 놓았다.

비는 자국민들에게는 물론 주변종족들에게 오랫동안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발전의 기본방향을 제시하므로서 '역사의 里程標' 내지 '민족의 座標'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 비문에서 가장 의미있는 귀절은 '出自北扶餘天帝之子 母河伯女郞'로서 고구려가 天孫民族이라는 自己宣言이다. 비문은 이어지는 문장에서도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郞 鄒牟王'이라고 반복하여 천손임을 강조하면서 자존의식을 드높이고 있다. 비문보다 바로 전시기에 만들어진 牟頭婁塚의 묘지에는 시조가 '日月之子' 라고 하였다.

이로 보아 그것이 그 시대에 보편적인 인식이었음을 알려준다. 건국신화에서도 건국자가 하늘과 땅 혹은 하늘과 물의 결합에 따라서 탄생된 존재임을 알려주고 있다. 고구려가 곧 우주, 혹은 세계의 중심이며, 하늘의 피를 받은 민족이라는 인식을 반영한다.

그 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충북충주시의 '中原高句麗碑' 등 당대 일부 사료에는 大(太?)王, 奴客 東夷寐錦 등의 표현이 있다.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나 國史 高句麗本紀를 인용한 三國遺事에서도 東明聖帝라고 하였으며, {隋書} 高麗傳에는 昭列帝라는 표현이 있다.

고구려는 그 외에도 '天王郞'(天王地神塚)이라는 표현 등 거룩하고 성스러운 용어들을 썼다. 李奎報가 쓴 東國李相國集의 동명왕편에 실려있는 건국신화에서 주몽의 아버지인 해모수는 하늘과 땅을 오고가며 정치를 했다.

주몽 또한 黃龍으로 표현되었다.

살아있을 때는 麒麟窟을 통해서 하늘을 오고가다가 죽을 때도 옥채찍 하나만을 남긴채 하늘로 올라갔다.

고구려인들이 그린 고분의 중요한 벽화(五 墳 4호묘,5호묘)에는 해신과 달신이 우미하게 그려져 있고, 천정에는 황룡이 고결한 모습으로 그려져있다. 이때 해신과 달신이 단순한 신화에 나오는 伏羲와 여와가 아니라 주몽의 부모인 해신 解慕漱와 달신 柳花婦人을 상징하는 것임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安岳3호분(북한에서는 美川王陵으로 보고 있다.)에는 큰 규모의 행렬도가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 '성상번(聖上幡)'이란 글자가 쓰여진 깃발 등이 있다.

벽화내용 중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天孫民族이라는 고구려인들의 自意識과 그것을 확인하고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자신감은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화현상이나 고구려인들의 말, 역사활동을 볼 때 정체성과 자의식이 매우 강했음을 알수 있다. 이러한 자아의식은 당연한 귀결이지만 고구려인들로 하여금 넘실거리는 주체의식을 가지고 했고,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하였으며, 역사의 주인으로서 창의력과 강한 자유의지(free-will)를 갖게 하였던 것 같다.

특히 남에게 굴복하지 않는 저항정신 등은 민족의 발전과 자주성을 수호하는 고결한 행위로 나타났다.

늘 외세와 대결하면서 주로 民族戰爭을 치루어야 하는 고구려인들의 감동적인 전투과정, 아름다우면서도 긴장감 넘치고 치밀한 성벽구조 등은 그러한 자유의지를 느끼게 한다.

3. 민족문제의 대응방법과 고구려의 국제정책

고구려는 21세기에 당면한 민족문제의 대응방법론을 모색하고 설정하는데 참고해야할 모델이다.

고구려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동아시아 역학관계의 기본틀을 이해할 수가 있다.

현재 세계의 각국들은 군사동맹 외에도 나름대로 EC(유럽공동체) EU(유럽연합) NAFTA(북미자유협정) ASEAN 등 국가간의 결합을 매개로 광범위한 블록화를 추진하고 있다.

소위 유사한 문명권, 종족, 지역을 중심으로 이익을 극대화시키려는 '自集團主義'를 실현하고 한다.

Ghassan Salame는 地域化는 새로운 영향권 형성을 위한 완곡한 위장술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최근에는 미국이 초강대국을 선언하고 있고, 유럽은 EU(유럽연합)를 넘어서 합중국을 지향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는 동아시아 지역 역시 자국의 이익을 최고목적으로 삼고 각국 간의 역학관계와 위치조정을 숨가쁘게 조정하고 있다.

아시아는 7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을 필두로 해서 급하게 성장하고 있다. "이제 성년이 된 아시아는 세계최고라는 꿈을 꾸고 있다."라는 마이클 블라오스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말레이지아 국제전략연구소장인 Noordin Sopiee는 동 아시아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서기 2000년이 되면 동아시아의 GNP가 북미나 서유럽보
다 커질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나머지 세계가 '황인종에 대한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도록 세계를 설득해야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곳에서 말하는 동아시아는 현재 동남아를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추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소위 동아시아의 핵, 동아지중해 국가들은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군사적인 역할과 영향력, 경제력의 향상과 체제의 개편, 정치적인 영향력의 확대 등 많은 면에서 서로 간에 경쟁을 하거나 갈등을 빚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근의 사태에서 보듯이 세계 여타의 강력한 블록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협력체 내지 내지 블록을 결성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葛藤과 競爭의 관계'이면서 동시에 필요에 따라서는 '協力과 同盟의 관계'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오랫동안 갈등을 계속해온 각 나라들은 물리지 않은 疑心과 緊張의 視線으로 상대국을 바라보았다.

특히 한국전쟁의 군사적인 충돌 이후에는 더욱 첨예하게 대립해 왔다.

그 후유증 때문인지 아직은 정치적인 것 보다는 경제나 교역, 문화교류 등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다. 보다 실질적인 이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조심스레 협력체의 결성과 파트너쉽의 가능성들을 시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좀더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협력체제로 갖추기 위해서는 각국들은 서로간의 역사적 경험을 이해하고, 어떠한 역할분담이 가장 바람직한가를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특히 우리민족은 주변국들에 비하여 정치 군사 경제 문화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 속에 있다. 그러므로 역학관계의 본질을 신속하고 정확히 파악해서 능동적으로 질서재편에 임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이러한 동아시아의 역학관계는 고구려가 발전했던 당시와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다. 地政學的 要因에 큰 변화가 없으므로 북방의 유목종족, 중국, 우리와 일본이라는 4각의 기본적인 구도와 정치적인 역학관계에는 거의 변함이 없다.

다만 일본이 7세기 이전까지는 우리의 영향을 받는 종속적인 존재였고, 고구려의 발전기에 중국은 南北朝
로 분단되어 있었던 반면 현재는 우리가 분단된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중국은 동 아시아의 강력한 중심부였고, 패권을 오랫동안 장악해왔다.


이러한 기본구도 속에서 고구려는 자기의 대응방식을 갖고 발전하면서, 동 아시아의 강국이 되었다.

우리민족사에서 중국세력과 대등하게 관계를 맺고, 때로는 외교적으로 주도권을 쥐었으며, 상당기간 동안 전면전을 치룬 나라는 고구려였다.

우리는 고구려의 정치체제와 외교전략, 경제체제 및 주변국에 대한 문화정책, 군사전략 등에 대한 기본
패턴을 이해하므로써 현재는 물론 향후 전개될 질서재편의 방향과 내용을 예측할수 있다.

또 그 과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교훈을 얻을수 있다.

필자는 좀더 구체적으로 고구려가 추진한 정책을 '東亞地中海 中核調整論'이라고 설정하고 그것을 모델로 하여 동아시아의 기본구도와 함께 향후 우리민족의 위치와 역할을 모색하고자 한다.


< 동아지중해론>
먼저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자.
주목하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동아시아의 각국들은 대륙과 한반도, 일본열도 및 여러 군도들에 둘러싸인 황해 남해 동해 동중국해 등을 포함하고 있어 지중해적 형태와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런데 소위 역동적인 동북아경제권(Dynamic North-East Asian Economies)은 동아시아에서도 중심부인 동아지중해 지역이 된다. 따라서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동아지중해(EastAsian-mediterrean-sea)라고 명명하고 역사를
해석하는 모델로 삼은 것이다.

지중해는 나름대로 몇가지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데 해양문화의 성격을 구비하고 있는 만큼 이동성(mobility)이 강하다. 각 나라들이 내해(inland-sea)를 공유하고, 긴 沿岸이 여러나라로 갈라져 있으므로 국경이 불분명하고 변화가 심하다. 때문에 해역지배권(海域支配權)의 대립을 둘러싸고 국가간의 다툼이 벌어지며, 해양력(sea-power)이 모든 것을 좌우한다. 또한 지중해는 정치 군사적인 것 보다는 교역 문화 등 구체적인 이해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는 완전한 의미의 지중해는 아니지만 바로 多國間地中海(multinational-mediterrean-sea)의 형태로서 모든 나라들을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동아시아는 변화하는 세계질서 속에서 공존하며 협력해야할 단계에 이르렀다.

동아시아가 협력체 내지 연합체, 불록, 혹은 그 이상을 구성한다면 해양을 매개로한 지중해적 질서 속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유럽지중해와 카리브 및 걸프지중해, 동남아지중해 등과 경쟁하고 대결하는 동아지중해의 형성이 절실한 것이다.

최근에 일본의 학계에서 지중해이론을 제기하며 21세기 일본의 앞날을 조망하고자하는 시도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면 이러한 지중해적 질서 속에서 우리의 위치는 어떻게 설정하며, 어떠한 역할을 해야할까?

남북통일은 불투명하며, 주변국의 방해로 인하여 民族力의 결집 또한 매우 어렵다. 남북통일이 이루진다해도 향후에 경제 정치 군사력이 주변강국들에 비해 열세를 면할 가능성은 별로 없는 회의적인 처지이다. 그러나 신질서가 편성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정말로 중요한 하나의 강점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는 지리적으로 동아지중해의 中核(core)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분단시대, 냉전시대에는 적대적인 양대 힘이 격돌할 수 밖에 없는 부정적인 요인으로, 스스로 풀어버릴 수 없는 굴레가 씌워졌었다.

그러나 이제는 '連結과 協力의 시대'이다. 남북이 긍정적으로 통일될 경우, 한반도는 대륙과 해양을 공히 활용하며, 동해 남해 황해 동중국해 전체를 연결시켜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특히 모든 지역과 국가를 전체적으로 연결하는 해양 네트워크는 우리만이 가지고 있다. 우리 바다를 통해서만이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이 안심하고 본격적으로 교류할 수 있다.

이러한 동아지중해의 역학관계와 한반도의 中核調整地로서의 바람직한 역할과 가능성을 우리는 지나간 고구려의 역사를 통해서 가늠할 수 있다.

고구려가 진정으로 발전한 이유는 강력한 군사력을 뒷받침할 경제력 문화력은 물론 국제정치력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은 바로 해양활동이 활발하였고, 해양을 장악하므로써 주변국들간의 외교망을 통제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국제정치에 해양력(sea-power)을 본격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해양전략은 이미 3세기 전반부터 魏와 吳의 갈등을 이용하면서 사용하였으나, 4세기를 거쳐 5세기경에 이르러 광개토대왕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국제전략으로 채택하고, 지중해적 국가로서 발돋움 하였다. 즉 대륙의 동 서 북으로 팽창하여 만주지방을 완전히 석권하고, 남으로 과감하게 진출하여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지역까지 국가전략수립의 영향권하에 두었다. 뿐만 아니라 동해는 물론이지만 해양력을 바탕으로 황해중부 이북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장수왕 시대에는 남진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여 중부지방은 소백산맥의 이남, 동으로는 포항 근처의 興海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대륙과 한반도와 주변 해양을 한 틀속에 넣고 조정할수 있는 동아시아의 완전한 中核자리를 확보하였다.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질서의 형태가 변화되었다. 그 전 시대처럼 몇 개의 線이 중간국가를 경유하여 평면적으로 연결되는 외교형태가 아니라 다수의 선이 동시에 연결되는 '多重放射狀' 혹은 '多核放射狀'형태로 되었다.

즉 분단된 南北朝(상해와 북경), 북방의 柔然(러시아,몽골), 그리고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동등한 中心核이 되고, 백제 신라 가야 왜 거란 말갈 등 주변국들은 서로간에 교섭을 갖게되었다. 지금의 구도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과거에는 중국이 분단되었고, 지금은 우리가 분단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고구려는 대륙과 해양을 공유하면서 각국들의 교섭을 管理하고, 統制하고, 調整했다.

백제, 신라, 가야, 왜 등이 북중국정권(현 북경)과 교섭하는 것을 막는 것은 물론 때로는 남조정권과의 교섭마져 막았다. 뿐만 아니라 海洋通路의 確保를 잇점으로 분단된 중국세력들(북경, 상해)간의 복합적인 갈등을 等距離 海洋外交로서 적절히 이용했다.

통일된 나라가 분단국가를 대상으로 등거리 외교를 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것이다.

그 후에 고구려는 경기만을 상실하는 등 해양력이 약화되므로써 정치군사력은 물론 외교력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질서재편 과정에서 중핵조정 역할을 상실하였다.

그 후 7세기에 벌어진 소위 東亞地中海 國際大戰의 결과로 인하여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실패하였다.

결국은 고립된 채 주변국들의 협공을 받아 역사의 무대에서 탈락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흥망은 동아지중해의 성격과 유용성을 우리에게 교훈으로 알려주고 있다.


한편 동아시아의 입장에서도 고구려의 역할은 향후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효한 모델 이 된다. 21세기의 신질서 속에서 동아시아는 협력이든 동맹, 혹은 보다 더 강고한 형태로의 결속이 필요하다.

다른 지역에 대응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내부간의
보다 긴밀한 협력이 필연적이다. 이때 그 동안의 역사적 경험이나 地政學的 조건, 地經學的 조건, 地文化的 조건, 그리고 현실적인 필요로 보아 그 결속의 공통분모로서는 해양을 매개로한 동아지중해적 형태가 가장 유효하다.


그런데 이 결속은 국가들의 단순한 지리적, 물리적 연합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일정한 조건이 성숙되어 있어야 한다.

첫째, 국가들 간에는 철저한 힘의 均衡(balance of power)이 필요하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에 비하여 국력이 현저히 약하면 종속되거나 주변부화될 우려가 있다. 반대로 한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서 힘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으면 패권국가를 지향하거나 盟主로서의 유혹을 느낀다. 동일한 민족 내부에서도 지역 간의 갈등, 계급간의 차별과 모순이 있게 마련이므로, 신협력체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일어날 가능성은 다분하다. 그러므로 구성되는 첫단계에서부터 내부 소단위인 기존의 국가들은 힘의 균형을 이루어야 큰 단위인 동아시아의 안녕과 존속, 효과적인 운영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앙금과 균열이 있는 단위가 다른 단위와 효율적으로 경쟁할 수는 없다. 고구려가 중핵조정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그 시대에 동아시아에 평화구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가 다른 2개의 힘, 즉 중국세력과 북방세력에 비하여 힘이나
문화 경제 등에서 대등하였기 때문이다. 중간에 있는 힘이 약할 경우에는 조정역할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향후 신동아시아 질서에서 중핵조정역할을 해야만하는 우리는 남북통일이 되어야 능력을 갖추고 균형축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동아시아는 견제와 균형속에서 평화와 협력구도를 연출할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주변국가들도 인식하고, 이를 인정하면서 실제로 우리의 통일을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도와주도록 설득해야한다.

둘째, 신질서는 각국가들간의 역할분담이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협력체의 결성은 자연환경에 걸맞게 역사적 경험과 문화, 구성원들의 능력과 지향성, 군사적인 능력과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제형태를 고려하여 갈등이나 경쟁 등 충돌이 일어나지 않게하고, 분업과 상호협조로서 시너지(相生)효과를 창출시킬수 있도록 해야한다. 다행하게도 현대의 동아지중해 삼국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문화 지리 군사력 정치체제 경제체제 등이 차별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오랜 역사속에서 형성된 共質性을 갖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必要充分條件을 서로 만족시켜줄 수 있는 상호보완성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경제적으로는 발전단계와 양식이 다르므로 결합하면 강력한 힘을 지닌 하나의 단일경제공동체가 완성될 수 있다. 중국이 주장했던 D-N-U (D는 선진일본, N은 신흥한국,U는 중국 북한) 즉 橫向聯合은 한반도의 그러한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은 이미 그러한 단계를 뛰어넘은 것 같다. 아시아의 거인인 중국은 경제규모가 현재의 보통 추세대로 한다면 21세기 중반에는 7배나 확대되어 규모면에서 미국과 겨루게 될것이며, 만약 낙관적인 고도성장을 할 경우에는 현재의 11배로 확대되어 세계최
대를 자랑하게 될 것이다. 고구려는 매우 독특한 자연환경 속에서 중국세력, 북방세력과는 다른 체제를 유지하며 동이시아 역사형성에 역할분담을 하여 왔다. 경제적으로는 말 貂皮 등 북방의 산물을 중국지역이나 남방에 수출하고 반대로 남방의 물품들을 북방으로 수출하는 중계무역 등을 하였다. 해양로와 육상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면서 物流體系를 원(circle)으로
서 연결시켰다. 문화적으로는 영역 내부에 농경문화 해양문화 초원유목문화 수렵삼림문화 등을 공유하고 발전시켰으므로 서로 다른문화들을 수용하여 충격을 흡수하면서 발전시키거나 전달할수 있었다. 동이시아 문화가 생동감있고, 停滯性을 띄지않고, 環流시스템과 均衡感을 유지한 것은 고구려문화의 역할이 크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핵에서 균형과 조정자 역할을 하면서 동아의 평화구도를 만들었고, 物流體系와 文化體系의 거점 내지 중계로 역할을 하였다. 21세기의 신질서 속에서 통일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동아시아 각국은 이해가 잘 조정된 협력체 내지 공동체를 구성하여 세계사속에서 東亞의 이익을 지켜야 한다. 그럴 경우에 우리의 입지는 더욱 중요해진다.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열세에 놓여있는 한반도는 통일을 한 후에 고구려처럼 지리적으로 중핵에 있는 조건을 잘 활용하여 정치적, 경제적 문화 군사적으로 조정역할을 하면서 정당한 자기 위치를 확보해야만 한다. 더욱이 정치 문화 경제 사상 등 모든 면에서 극단적인, 20세기 구 질서(냉전질서)의 양극단인 남과 북이 만나 이루어졌으므로 적지않은 차별과 충격을 흡수
하고, 대립과 갈등 등을 조정하면서 역할분담을 유효하게 할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는 살아있는 역사로서 21세기를 코앞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절박한 메세지를 전달해준다. 통일한국이 활발한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적 인식을 토대로 동아질서의 재편을 유리하게 주도하고, 동아지중해의 중핵조정 역할을 수행한다면 우리민족은 21세기를 보다 긍정적으로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더불어 동아시아도 지구라는 거대한 단위 속에서 영향력있는 중간단위가 될 수 있다.

4. 21세기문화의 방향설정과 고구려문화

고구려는 흔히 군사전에 능하고 약탈경제를 바탕으로한 군사지향적 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그러한 식으로 평가하였고, 우리는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정치 외에도 문화의 방향과 성격을 설정하는데 본받아야할 유효성있는 모델이다. 고구려는 개방적인 태도로 다양한 외부문화를 수용하는 세계국가적 성격을 지녔으며, 그러면서도 自文化를 발전시킨 문화국가였다.

고구려 문화의 성격과 문화의 바탕을 이루는 에너지의 정체, 그 논리와 정신성은 무엇일까?

또 미래에게 전해주는 멧세지는 무엇일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물음이고 모두의 관심사이다.

하지만 이미 다른 글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언급했고, 오늘은 주제를 압축시키기 위하여 다만 고구려의 문화국가설과 문화의 특성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 문화국가론 >
21세기는 문화의 세기라고 할 만큼 문화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특히 문명이 전환하는 과도기에는 문화력(culture power)이 정치 및 군사는 물론 경제질서의 방향과 위치에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샤무엘 헌팅톤(Samuel Huntington)은 {The Crash of Civilizations}에서 의미있고 중요한 말들을 하였다. 세계정치는 多極化 多文明化하였으며, 문명에 기반을 둔 세계질서가 태동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 국가들은 자기 문명권의 주도국 혹은 핵심국을 중심으로 뭉친다고도 하였다. 가능성은 다분히 있다. 그는 또 탈냉전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이념이나 정치 경제가 아니라 바로 문화이며, 가장 중요한 국가군은 일곱 내지 8개에 이르는 주요문명이라는 의미있고 심각한 말을 하였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러한 헌팅톤의 이론에 대하여 하랄트뮐러(Harald Muller)는 {문명의 공존}(Das Zusammenleben der Kulturen)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에서 보여지듯이 반대이론을 주장하였다. 우리 동양인의 세계관과 역사를 볼 때는 헌팅톤 보다는 뮐러가 펴는 문명의 공존이 더 설득력 있어보이지만 아무래도 서구의 현실은 헌팅톤의 주장에 더가까운 것 같다. 사실 21세기의 문턱을 막 넘은 지금 세계에서 문화란 현실적인 힘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거대한 공룡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여튼 세계는 문화의 비중을 높히고, 일종의 전략으로서 문화를 배양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수출을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거래와 교류에서 주도적 역할을 해온 것은 서구이다. Edward.W.Said의 (ORIENTALISM)에서 문제를 제기했듯이 서구에게 동양은, 비록 자이드의 동양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동양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너무 종속되어 있었고, 문화는 교류가 아닌 비자발적인 移植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동아시아는 '他'를 의식하면서 공동의 대응이란 차원에서도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동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각국 간에 균형있는 발전을 꾀하고, 자기문화를 성숙시켜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오랫동안 독점적으로 중국문화만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므로 문화의 環流현상이 불충분했으며, 挑戰과 應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화적 에너지의 양이 적어서인지 전반적으로 停滯性을 탈피하지 못했으며 교조성이 강했다.

특히 정치적 주변부로 밀려난 우리는 농경문화의 산물인 정착성에 매몰되어 있었고,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변화와 운동(辨證法)을 소홀히 하였다. 뿐만 아니라, 정치적 억압에 따른 식민문화의 잔재인 周邊性과 맹목적인 排他性을 아직도 다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중국의 주변부이며, 중국문화의 亞流로서 인식되어 왔고, 지금도 일본 및 외래문화의 강한 영향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견해와는 다르지만 헌팅톤이 중국과 일본을 다른 문명으로 분류하여 일본문화의 독자성을 인정한 것은 문화적으로는 일본보다 우월하다는 의식을 지닌 우리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우리가 세계문화속에서 자신감을 갖고, 동아시아 정체성을 일구어가는 과정에서 긍정적인 자기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의 개념과 역할에 대해서 인식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 문화란 사람과 다른 생명체를 구분짓는 가장 분명하고 포괄적인 개념이다. 레이몬드 윌리암스는 문화라는 단어가 영어에서 가장 까다로운 두세개의 단어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1952년에 알프레드 크로버와 크락혼이 {문화 : 개념과 정의의 한 비판적인 검토}에서 175개의 서로 다른 정의를 검토해보았 정도로 문화에 대해서는 실로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그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제는 특정계급의 전유물이거나 여가선용으로 여겨지거나, 소비지향적인 것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生存과 戰略의 문제로서 문화를 마주해야 한다. 실질적인 이익을 주고 집단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 사람은 문화적 質을 보다 높히고, 세계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세계문화를 선도해야한다. 이러한 과제들은 몇가지 조건을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실현이 가능하다. 사고가 자유롭고 문화가 다양성이 있어야하며, 사회체제는 탄력성이 있어서 모든 일에 적응력이 뛰어나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自意識(self-consciousness)에 충실해야한다. 문화를 창조하고, 수용하고, 누리는 존재가 자아에 충실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혼란이 발생하고 불행해진다.

우리는 비교적 이러한 조건에 걸맞고 모델이 될만한 문화를 발전시킨 역사가 있다.

흔히들 고구려는 軍事動員體制에 능숙하고 掠奪經濟를 영위한 정복국가로 알고 있다.

그러나 고조선과 부여의 오랜 문화적 전통을 이어받았으므로 출발부터 이미 문화적인 성숙함이 배어있었다.

그 후 긴 역사동안 매우 드물게 특성있는 문화를 소중히 발전시켰다.

고구려가 文化國家였음은 현재 국내외에 남아있는 숱한 유적 및 고분벽화 같은 질적으로 뛰어난 유물과,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백제나 신라의 문화적 유산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면 미래모델로 설정한 고구려는 어떤 성격의 문화를 꽃피었을까? 그 꽃향기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고구려문화는 매우 다양성이 있고, 개방적이며 보편성을 띄웠다. 자연환경과 땅은 지리정치적(geo-politic)인 영토의 의미 만은 아니다. 지리경제적(geo-conomy)으로도, 지리문화적(geo-culture)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런데 발전기의 고구려는 넓은 영토를 가졌으므로, 한반도내의 백제 신라 북방의 유목종족이나 서쪽의 漢族들이 세운 나라들과는 다른 특성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많은 강들, 연해주 지역과 흥안령의 대삼림, 요동의 넓은 평원, 초원, 호수 등을 골고루 소유하였으며, 남쪽으로 진출하여 비옥한 농토를 얻었다. 자연환경은 사막과 유사한 건조한 기후의 초원, 겨울에는 온도가 급격히 내려가는 수렵삼림대, 따뜻한 온대, 온도가 높고 강수량이 많은 남방 등 다양했으며, 植生帶도 아주 다양했다. 이러한 자연환경 속에서는 필연적으로 경제형태나 교역방식 역시 다양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거주하는 종족들과 그들의 언어, 관습도 달랐다.
참고로 살펴보면 고구려의 영토를 계승한 渤海는 경제형태도 대체로 자연환경에 따라 3가지로 유형화시킬수 있다. 북만주에 해당하는 송화강과 嫩江 일대의 松嫩평원일대는 농업과 목축 등을 하는 농업지구였다.

만주 한복판에 해당하는 지역은 농업과 어업수렵을 겸하는 지역이었다. 목축업도 매우 발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시대에는 松嫩지구도 유명한 말산지였다.


산이 높고, 삼림이 우거진 동부와 북부지역은 어업(바다 포함), 수렵, 채집경제가 발달하였다. 고구려도 대체로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고구려 영역은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수렵삼림문화, 동몽골과 북방방면의 유목문화, 화북에서 올라오는 중국의 漢문화, 해양을 통해서 들어오는 해양남방문화, 한반도 남부의 문화 등이 하나로 모인 집결지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동 아시아에서 고구려는 해양과 반도, 대륙을 동시에 가지고 있고, 성격이 다른 여러 종류의 문화가 한군데로 모인 유일한 지역이었다. 열린공간이 될 수 밖에 없는 자연환경을 지닌 것이다.

이처럼 하나의 국가영토 안에 다른 종족과, 색다른 자연환경, 이질적인 문화가 存在하므로써 複合的인 歷史空間이 되었으며, 국가의 성격에는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고구려는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국제성있는 지중해문화의 전형적 특성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多種的國家, 多文化國家가 되면서 제국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다양성과 국제화는 실제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발생시킬 수가 있다. 물론 레비 스트로스가 {역사와 문명}에서 이야가 하였듯이 문화적 진보는 제휴이고 문화에서는 다양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多樣性은 단순히 양적인 集積에 불과하고 적절한 調和를 이루지 못한다면 오히려 역사발전에 부정적으로 작용한다. 최근의 실패에서 보듯이 운영을 잘못하면 오히려 심각한 혼란을 일으키며 방황을 하게된다.

때문에 문화적 다양성과 사고의 자유로움 외에 민족정체성의 확립이라는 일견 상반된 것 처럼 보이는 몇가지의 과제들을 동시에 실현해야 한다.

고구려는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방향성을 모색하는 하나의 척도로서, 또는 우리 및 동아시아가 추구할만한 모델로서 설정이 가능하며,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고구려제국으로 편입된 新國民들은 엄청난 문화충격(culture shock)과 혼란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Geert Hofstede({세계의 문화와 조직})는 Joseph cambell({The Power of Myth} 등 신화에 관한 다양한 저서를 남겼다.)의 신화연구를 통해서 인류사는 문화
집단간의 전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였다. 주변종족들간의 경제양식과 생활습관 등 실질적인 것은 물론이고, 의식과 가치관을 구성하는 建國神話 象徵 祭祀儀禮 등도 차이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종족들 간의 문화적인 충돌을 예방하고, 이질적인 요소들을 적절하게 타협시켜가면서 제국내의 국민으로 통치하기 위해선 다양성을 긍정적으로 수용해야한다. 그러나 조화로움의 과정이 없이 다양성을 무조건 수용한다면 混沌이 불가피하다.

문화를 창조하는 중심핵이 사라질 뿐 아니라, 문화의 기본방향 조차 설정될 수 없다.

한편 고구려인들 역시 본래부터 지키고 가꾸어온 기층문화가 파괴되고,
또 본질이 왜곡될 가능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하였을 것이다.

특히 당시는 주변국들과 경제 문화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으로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집단 내부에서 발생한 문화의 혼란이란 곧 정치의 혼란, 사회의 혼란으로 비화가 될 수 있다.

만약 자기문화의 독창성이 약하거나, 주변문화 보다 토대가 허약하다면 한국의 근대화 과정이 증명하듯이
결국 문화적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종속당할 우려가 있다. 빠른 속도로 量的인 成長을 하는 고구려는 소위 속도감있게 세계화를 추구하는 현재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딜레마에 빠졌다.

고구려인들은 슬기로웠다.

고조선과 부여의 계승의식이 강한 그들은 출발부터 자의식을 바탕으로 자기보호의식이 강했다. 영역의 확대와 함께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다른 문화와의 혼재 속에서 自己文化의 고유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기위해선 內的鍛鍊을 거듭하면서 자아의식을 강화시키고 독창성있는 자문화(自文化)를 형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양성을 混亂이 아닌 調和, 集積이 아닌 統一性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선 전체를 관장하고 연결시켜주는 中核이 되는 문화가 필요했고, 그 중핵은 정치력을 토대로 강한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고구려인들은 바로 중핵(core)역할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중핵의 내용이 무엇이어야하는가를 고민하였다.

때문에 세계국가로서의 새로운 자각을 하면서, 동시에 민족으로서 자아의 확인을 매우 중시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외부에 전파하는 일에도 힘을 썼다.

그래서 가장 근본적인 존재의 원근거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즉 천손(天孫)의식을 강조하므로써 주변세계와 차별성을 꾀하였다.

고분벽화는 天孫民族이라는 고구려인들의 자아의식과 그것을 확인한 자신감을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반영하고 있다. 하늘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다양한 상징물을 창조하고 등장시켰을뿐만 아니라, 그것을 현실의 생활과 연관시켜 자신들의 세계관과 시대정신을 논리화 시켰다.

벽화에서는 고구려인들의 자유로운 사고와 활기찬 力動性이 흘러넘치고 있다. 각종의 수렵도와 씨름도, 力士 등 현실적인 소재들은 화려한 색상과 거침없는 붓길로 力動性있게 표현되었다.

이는 고구려인들이 事物과 事件은 운동하고 있다는 변증법적 인식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대평원과 삼림 해양을 역사의 무대로 삼고있는 그들은 본능적으 '네오필리아' 즉 새것을 좋아하고 모험을 지향하는 성격을 가질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또 歷史에 대하여 강한 자신감을 갖고 있어서인지 우주를 보다 자유롭게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미있는 것은 매우 다양한 소재들과 주제들이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일관된 統一性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외부에서 수용한 문화라도 高句麗的인 精神을 주조로 재해석, 재구성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자기역할과 자기정체성(identity)을 자각하고 역사에 대한 자신감과 진보의 의지를 가꾸고 승화시켜 고구려를 재발견(re-discovery)하였다.

색깔있고, 다양한 주변문화를 자기문화 속에 흡수하고 용해하여 훌륭하게 조화시켰다. 그 결과 새로운
형태의 고구려문화를 만들어냈고, 질이 높은 문화국가로서 성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 문화를 내적도약의 에너지로 삼아 세계화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였으며, 신질서에 걸 맞는 보편정신과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렇게해서 고구려는 문명개화의 절정시대renaissance)를 맞이했으며, 고구려인들은 세계국가적 성격을 갖고 동아시아의 중핵국가로서 성격을 재정립(re-foundation)하였다.

고구려가 제국적이고 세계국가적인 성격을 지닌 것은 바로 문화적인 토양이 다양했고, 이러한 다양성을 수용하면서도 고구려적인 정신과 문화를 끊임없이 재창조해낸 역동성과 문화적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가장 세계화를 지향했고, 적극적으로 문화를 개방했던 바로 그 시대에 역설적으로 集團正體性을 확립하는데 가장 주력했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인의 지혜이었다.

고구려가 문화가 발전하고 문화국가화한 것은 민족문화는 물론이고, 거시적으로는 동 아시아 문화의 형성과정과 성격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만주지역이 문화적 공간의 기능을 상실했고, 동아시아는 중국한족문화의 일변도가 되어 停滯性을 띄게 된것은 고구려가 가꾸어낸 문화적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나를 알려준다. 이제 세계화 속에서 동아시아의 문화는 역동성과 창조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면서 동아시아의 정체성을 공동으로 추구하고 형상화시켜야 한다. 문화적 패권의식을 지닌채 내부에서 갈등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상호협력과 수용을 통하여 물리적인 힘을 바탕으로 비자발적인 수용을 강요하고 있는 서구문화에 대응해야한다.

Tommy. T.B. Koh가 동 아시아인들이 對立보다는 合議를 선호한다고 하였듯이 그것은 서구인들이 갖지 못한 장점이다.

世界化와 民族主義 혹은 東亞主義는 서로 괴리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엘빈 토플러가 1993년에 펴낸 {권력이동}(Power Shift)에서 미국인들의 속내를 드러냈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당하고 있듯이 서구인들이야말로 미명인 '세계화의 덫'을 친 다음에 자집단주의를 철저하게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덫에 걸려 자아마져 포기한채 허우적 대다 지금 막 그들의 먹이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는 이러한 시기에 우리와 동아시아가 본받고 추구할 만한 모델로서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5. 민족통일의 모델과 고구려

고구려는 그 밖에도 우리에게 닥친 여러가지 절실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임새있는 방법론을 제시해준다. 통일에 대한 고구려적인 접근방식과 그것이 실패한 과정, 멸망과 그것이 가져온 결과와 역사적의의 등은 21세기를 맞이하고 남북정상회담이 성공리에 끝난 현시기에 민족모두가 지향하고 있고, 당위의 문제로서 접근하고 있는 통일에 대하여 매우 쓰임새 있는 교훈을 제공해준다.

역사적으로 평가하면 고구려는 끝내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멸망한 나라이다. 물론 실패한 역사는 아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대왕이 정치하던 무렵인 5세기의 고구려는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북방과 서방으로 영토를 확장하였고, 주변종족들에 대한 통제력도 지니고 있었으며, 自國內의 신민으로 편입시켰다. 뿐만 아니라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백제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으며, 신라는 강력한 정치적인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이 시대는 북방전선에서 긴장이 완화되었던 만치 군사력을 남으로 전면배치하여 공격을 하였다면 통일의 가능성도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적어도 사료를 보면 고구려는 그러한 노력을 기울인 흔적은 별로 없다.

왜 그랬을까?

통일의식이 없었을까? 한 민족 아니면 한 종족이라는 인식이 없었을까?

삼국사기에 보면 김유신 등은 '一統三韓' '三韓一家'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정당성이 결여된 행위가 통일을 목적으로 한 것으로 치장하기 위하여 후에 명분으로 선택한 용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사료를 그대로 신뢰한다면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은 하나의 종족 내지 文化共同體라는 의식은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러한 인식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唐 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周以封箕子爲朝鮮,漢分置三國, 謂玄 樂浪帶方(北帶方)'라고 하였으며, 帝王韻紀 권 下에는 '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皆檀君之壽也.' 또 같은책 [漢四郡及列國紀]에는 '--三韓各有幾州縣---數餘七十何足徵,於中何者是大國,先以扶餘沸流稱,次有尸羅與高禮 南北沃沮穢貊부---世系亦自檀君承'라고 하였다.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 濊傳에는 '濊及沃沮 句驪本皆朝鮮之地也.'라하여 중국인들이 인식도 대체로 이와 같았음을 알수 있다. 중국의 사서에는 열전 동이전에 삼국을 같이 언급하고 있어 적어도 그들에게는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인식되었음이 확실하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는 동일한 조상에서 출발했고, 동명신앙이라는 공동의 시조를 모시는 제사를 지냈다.

{魏書}에는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다. {北史}에서도 백제는 索離國의 東明으로부터 나왔다고 하고 있다. 결국 三國 내지 四國은 서로를 동아시아의 다른 종족들과는 다른 관계라고 구성원들이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를 분점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통일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결국은 신라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고구려는 왜 전성기에 四國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우리는 당시 고구려의 지배방식이나 통치방식을 이해하지 못한채 평가한 것일 수도 있다.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는 달리 삶의 터전도 농토만이 아니라, 삶의 양식도 농경문화의 그것이 아니다. 국가의 성립과정과 발전과정에서 많이 나타나지만 영토와
주민을 지배하는 방식도 백제 신라 같은 농경위주의 나라들과는 다르다.

정복국가와 유목종족들의 지배방식을 염두에 둔다면 고구려 역시 直接統治 외에 間接統治나 影響力을 擴大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종족내부의 질서를 느슨한 형태의 간접지배나 영향력확대라는 수준에서 접근한 것은 아닐까하는 가능성도 고려해본다.

中原高句麗碑에서 보이는 용어와 그 곳에 담겨진 인식들은 나름대로 천하의식을 지니고, 역사공동체의 대표자라는 인식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만약 그러한 시도마져 하지 않았다면 당시 고구려인들은 민족의 시대적 책무를 게을리 한 것이다.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가 통일하지 못했고, 민족간의 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신라가 자구책으로 추진한 외세의 참여로 인하여 强制的統一이 시도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었고, 오늘날까지 답습해내려온 불행의 씨를 잉태하였다.

고구려로서는 전성기에 북방종족들과의 대결구도보다는 같은 종족의 통일을 이루는데 비중을 두었어야 했다.

지배방식이나 통일방식 또한 현실과 지역에 걸맞는 방
식을 취했어야 했다. 결국 한 집단의 운명은 동일한 역사공동체의식을 강화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시기를 잘 선택하는데서 결정되는 것이다.


고구려는 멸망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의미있는 모델이 될 수 있다.

고구려가 멸망한 원인을 몇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중국세력과 무모한 전쟁을 벌이다가 결국은 패망했다는 의식(이러한 의식은 발해의 高王인 大祚榮의 작은아들, 즉 武王의 동생인 大文藝가 발해와 갈등관계를 맺으면 안된다고 주장하는데서도 나타나고 있다.)을 바탕으로한 비판이 있다.

또 고구려의 내부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淵蓋蘇文이 독재정치를 해서 내부의 균열이 생기고, 그가 죽은 후에는 형제들 간에 권력쟁탈전이 일어나 결국은 패망했다는 비판이다. 위만조선이 한나라와의 전쟁을 1년간 계속하다가 패배한 것도 그렇게 돌리고 있다.

물론 내부분열때문이라는 이러한 주장은 패망의 한 원인이 될 수있으나 중요한 因子가 되지는 않는다.

고구려와 중국세력간의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동아시아의 서쪽에서 수백년 만에 분단된 중국을 통일한 隋 唐과 동아시아의 동쪽에서 이미 600여년이상을 발전해온 고구려가 대결한 것은 국제환경과 역학관계의 피할수 없는 산물이었다.

東 아시아의 宗主權과 東亞地中海의 交易圈을 둘러싸고 양 세력은 전면전을 벌였으며, 주변의 국가와 종
족들이 참여하는 국제대전으로 확대되었다. 고구려 내부의 세력들은 다양한 대응정책을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고, 정변이 일어난 것이다.


고구려는 통일된 중국세력과 598년부터 659년까지 전면전과 국지전을 벌이면서 국제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660년에 백제가 급습당하면서 멸망하자, 신라와 당의 挾攻을 받으면서 다시 8년을 버텼다. 이러한 전쟁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고려한다면 고구려의 멸망은 정권내부의 분열 때문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희박하다. 국력의 약화와 국토의 황폐화, 인민의 희생 등은 일반적인 전쟁의 기본요인이다.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요인으로서 단기적으로는 신라와 당의 협공이었고, 장기적으로는 당시의 國際秩序를 認識하고, 活用하는 戰略에서 問題點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 전쟁은 분명히 배경이나 전개과정, 결과 등을 놓고볼 때 분명히 동 아시아 국제대전이었다. ]

그렇다면 고구려 역시 국제질서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중국세력의 潛在的인 假想敵國이지만, 필요와 상황에 따라서는 友軍으로 변신하여 고구려에 적대적인 관계가 될 수 있는 북방세력을 동맹국으로 삼거나, 아니면 최소한 중국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작업을 소홀히 하였으며,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중국의 서방세력은 물론이고, 契丹 靺鞨의 일부 突厥 등 북방세력은 고구려에 적대적이었다.

고구려의 결정적인 외교적 실패는 한반도, 즉 민족내부에 있었다. 고구려는 신라를 적대국가로 삼았다. 백제 또한 긴밀한 동맹관계를 맺지 못했다. 심지어는 수나라와 전쟁을 벌일 당시에는 신라는 물론 백제도 오히려 고구려를 쳐줄 것을 수나라에 청했었다.

高唐전쟁을 벌이고있을 당시에도 백제는 고구려를 도와주지 않았다. 고구려는 최소한 백제를 戰略的 同伴關係로 삼지 못했었다. 그리고 백제가 항복했을 때라도 신속하게 백제 부흥군, 왜국 등과 남북으로 연결하여 羅唐의 東西同盟과 대결구도로 만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모두 뜻한만큼 실현되지 못했다.

고구려가 외교적으로 실패를 하게된 데에는 국제환경에 대한 인식에도 문제가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해양능력이 약화되었고, 海洋秩序의 중요성을 경시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6세기 중엽에 경기만을 신라에게 빼앗기므로서 황해중부의 해상권을 잃었다.

그 결과 백제, 신라 등은 중국세력과 독자적으로 교섭을 하게 되므로써 외교적 주도권마져 상실했다. 그 후에 신라는 해양을 활용하여 당나라와 오고 가면서 군사동맹을 맺었고, 당나라는 13만의 병력이 선박을 이용하여 황해를 건넌 다음에 신라의 水軍과 연합하여 금강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사비성을 점령했다.

그 후, 광복운동을 펼치던 百倭聯合軍은 663년에 최후로 羅唐軍에게 白江전투, 즉 해상전에서 패배하였다. 당시의 전쟁에서 해양은 이처럼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전에 비하여 해양의 중요성을 덜 인식하였고, 결국은 멸망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제질서를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했고, 외교전에 실패했으며, 해양에 대한 인식을 소홀히하므
로써 당시 최대의 장수국이었던 고구려는 역사에서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 동아시아의 질서는 唐을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교역의 형태는 물론 문화가 질적으로 변화되었다. 우리는 신라가 존속하면서 南北國시대가 되었으나, 대신 민족적 패배를 하였으며, 민족사는 주체성을 잃어가면서 동아시아의 주변부로 전락하여 갔다. 종속의 논리, 타협의 논리, 대국중시의 논리, 주변부의식 등에 젖어들면서 正體性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고구려의 패배와 멸망은 주체적인 민족의 굴복과 패배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심각한 의미와 불행한 결과를 낳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인들의 역사의식이나 국제질서에 대한 인식, 국제환경에 대응하는 방식 등을 통해서 21세기 남북통일의 의미와 가치, 방법론 등에 대한 다양하고, 실질적인 교훈을 얻을수 있다. 민족의 공질성 회복과 민족국가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수 있다.


고구려의 역사는 우리에게 또 다른 유용성이 있다.

남과 북은 향후에 전개될 상황을 염두에 두고 통일의 과정과 통일이후에 주도권을 잡기위한 노력을 각 방면에서 추진하고 있다. 특히 한민족의 역사상에서 正統性을 찾고, 그 작업을 누가 주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남북 양체제가 民族國家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民族正體性을 회복해가는 일을 하고자 할 때 가장 우선적으로 제기되는 것은 존재의 시원인 壇君(檀君)의 실존여부, 역사적 역할, 민족논리로서의 기능 등의 단군문제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는 통일의 추진과정과 민족사적 의미를 놓고 신라정통론, 고구려정통론의 남북논쟁이 가열될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 고조선 계승의식이 강했던 고구려는 남과 북이 모두 거부감없이 수용할 수 있는 역사이다. 최소한 미래를 지향하는 우리에게 자긍심을 불러 일으키는 역사이다. 고구려와 관련하여 민족문제, 영토문제, 외세에 대한 대응태도, 민족문화의 성격 등은 향후 남북관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고구려는 더 적극적으로, 새로운 각도에서 연구하지 않으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 한 예로 고구려를 地域的개념 領土的개념으로만 파악할 경우에는 民族內部나 民族外的으로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팽창지향적 국수주의로 흐를수도 있으며, 주변국들에게 경계심을 불러일으켜 자극할 우려가 있다. 내부적으로는 민족적개념으로 인식해야 南北韓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는 계승성을 주장할 수가 있다. 외부적으로는 역사적 문화적 경제적개념으로 파악해야 주변국들의 우려를 불식하고, 또 공존을 모색
할수 있으며, 목적인 '東亞地中海中核調整役割'을 수행할수 있다.

6.맺 음 말

서문에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21세기를 맞아 몇가지 중요한 당면과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 세계화를 하나의 適應論理로 선택하고 저돌적으로 추진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 세계화라는 명제는 비록 타당하고, 시대적으로 선택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으나, 그 개념을 설정하는데 오류가 있었고, 추진과정에선 방법론의 실패가 있었다. 인간의 경험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설정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그 때문에 역사는 과거학이면서 동시에 未來學이다. 우리는 길고 긴 역사에서 고구려를 미래의 모델로 설정하고 하나의 가능성을 추출해볼 수 있다. 고구려는 정치 군사적으로 강국이었을 뿐 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중핵조정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여 각 나라와 지역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또한 고구려는 제국적인 성격을 띄었으나, 다른 종족들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또한 우리 역사상에서 가장 自我에 충실하였고, 동시에 세계보편적인 인식으로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킨 문화국가였다. 그 포용력 있는 文化生態와 自由를희구하는 정신성은 찬란한 고분벽화나 장대한 광개토대왕릉비문 같은 유물 유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의미있는 멧세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잊혀지고, 잃어버렸던 고구려를 이해하고, 특히 고구
려문화의 현재적 의미와 기능을 모색해야한다. 그리고 고구려 정신과 그들의 세계관, 국제질서에 대한 대응태도 등을 지표로 삼아 이미 다가온 21세기의 發展指標를 설정하는데 도움받아야한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실패를 냉정하게 비판하고, 세밀하게 분석
하여 남북통일의 方略과 바람직한 세계화를 성공시켜야 한다. 1300여년 전에 사라진 고구려가 가진 가장 중요하고 절박한 의미는 21세기에 우리민족을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바람직하고 유용성 있는 모델이 된다는 것이다.

***필자
이 글은 고구려의 가치유용성을 담론의 형식을 빌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쓴 글이다. 역사학 뿐만 아니라 각 분야의 연구를 반영하였다. 평소 공부하고 생각한 것을 사고의 흐름을 따라 서술하였으므로 논문처럼 각주를 세밀하게 달지 않았다. 또 역사학관련 부분은 필자가 발표한 글들을 바탕으로 서술하였으므로 극히 필요한 부분만 언급하였다. 고구려와 관련해서는 능력이 닿는대로 몇차례의 담론을 발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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