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행불경

지성유인식 2018. 6. 30. 05:04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 (佛說觀普賢菩薩行法經) 강의

 

설(說) 불설관보현보살행법경 (佛說觀普賢菩薩行法經) 이란 행법경 이라고도 표현하며,

법화경의 마지막 경문으로써 성불에 이르는 수행법에 관한 직접적으로 설하신 경문입니다.

그 제목에서부터 알수 있듯이 부처님의 눈으로 보현보살의 행을 관하신 경입니다.

 

경(經) 제자들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멸도 하신후 어떻게 하면 중생이 보살의 마음을 일으키며, 대승의 방등경전을 닦고 행하며 올바른 생각으로 일실의 경계를 생각하오리까?

어떻게 하면 무상보리의 마음을 잃지 않겠나이까?

또한 어떻게 하면 번뇌를 끊지 않고, 오욕에서 떠나지 못하였을지라도 모든 근기를 맑게 하고, 모든 죄를 멸하여 제할수 있으며, 부모에게 받은 청정한 눈으로 오욕을 끊지 못한 채로도 능히 모든 장애가 없는 청정한 일을 얻어 볼수 있사오리까.

 

설(說) 보현보살 행법경에서 보현보살이란 부처님의 행과 원을 대변하는 보살입니다.

석존 마지막 설법인 법화경에서, 그리고 법화 삼부경에서 마지막 단계에 다른 보살도 아닌 보현보살 행원품을 넣은 것은 부처님의 경지는 오직 그 행(行)과 원(願)에 의해 완성 된다는 재확인 이며, 다시 한번의 증명입니다.

 

강의의 중간쯤에 이야기 하겠지만 보현보살 행원품에서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수도 없고 이해할수도 없는, 어찌 보면 말도 안되는 그런 관법(觀法)이 등장합니다.

 

이는 행자(行者)를 견성 하게 하기위한,

그리고 자신의 마음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기 위한 관법입니다.

 

성불의 시작은 사실 견성(見性)에서 비롯됩니다.

제그 그동안 견성자를 하찮은자라고 자주 이야기했지만,

부처님께서도 아라한의 경지를 범부(凡夫)중에서 성자(聖子)라고 하셨는데 어찌 아라한이 하찮은 자이겠습니까?

 

티끌만한 작은 견성을 가지고 스승놀이에 매진하는 현시대의 수많은 견성자와, 견성하지도 못했으면서 선문답놀이에 전념하고 있는 더욱 많은 가여운 중생들을 경계 하기 위해서 그리 과격하게 말한 것 뿐이지 사실 견성이란 대단한 것이며,

 

견성을 하지 않고 바라밀 행을 함은 구멍 뚫린 항아리에 물을 채우려 하는 짓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아무리 자타불이(自他不二)의 마음을 가지려 해도 견성을 하여 실제 나와 남이 둘이 아니란 것을 알고 행하는 자타불이와 그저 벌을 받을까 두려워, 혹은 내세가 두려워 행하는 자타불이는 그 시작점 부터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 성자라 불리는 테레사 수녀가 봉사를 하면서도 이교도들은 아파서 죽는다 해도 개종하기 전까진 항생제를 주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렇듯 견성하여 마음자리의 품성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 범부의 사랑은 한계가 있고 편협한 사랑입니다.

 

편협하기에 어떤 이에게는 사랑이지만 다른이에게는 극악한 학대가 될수도 있습니다.

 

그들 자신으로서는 그러한 큰 사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율의 모진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견성을 하고서도 자타불이의 마음을 갖지못하고 교묘한 합리화로 함부로 열반을 이야기 하고 진여의 관점인 모든 중생이 부처고 번뇌도 부처이니 나의 모든 행도 부처의 행이라고 스스로 궤변을 늘어놓는 파충류선사는 어마어마한 인과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모두가 부처란 관점은 오직 진여의 관점에서의 이론일뿐이며,

우리 육식(육식, 안이비설신의, 眼耳鼻舌身義)를 가진 중생의 관점에서는 우리는 언젠가는 부처가 될것이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서울 가기전에 부산에서 이곳도, 서울도 같은 대한민국이니 난 이미 서울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는 궤변이 그들 파충류선사들의 이론이며, 바르지 못한 이론입니다.

 

경(經) 보현 보살은 몸의 크기가 가이 없으며, 음성도 가이 없으며, 색생도 가이 없음이니, 이 나라에 오고자 하여 자재한 신통에 들어 몸을 줄여서 작게 함이라.

 

설(說) 보현보살은 그 몸과 음성 색상도 헤아릴수 없이 크고 거대하지만 보현보살이 존재하는 세상에 가고자 한다면 육식(六識)을 가진 인간은 자재한 신통에 들어 몸을 작게 아주 작게 축소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은 극대와 극소의 세계를 두루 통달하여야만 보현보살이 계신 세상에 도달할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이해가 안되는 황당한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보현보살은 극대세계에 계신데 그 극대 세계에 가기위해선 한없이 작게 극소세계 만큼 몸을 줄여야가능하다는 것은 물리법칙 상으론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걸리버 여행기에서 걸리버가 거인 나라로 가기 위해서 소인국의 사람들 보다 더 작아져야만 가능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거인의 키가 1KM이고 소인의 키가 10CM라면 소인보다 더 작아진다면 거인이 사는 세상까지 가는 시간도 더욱 많이 걸릴테고 상대적인 거리의 개념도 훨씬 커질텐데, 이렇게 해야 극대세계의 보현보살이 사는 세상으로 갈수 있다는 보현보살행법경은 물리법칙을 무시한 경문입니다.

 

이러한 경문은 크게 두가지 의미로 해석될수 있습니다.

한가지는 실제로 몸이 한없이 작아져야만 극대세계로의 진입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고

두번째는 극대세계와 극소세계는 우리의 육식(六識)이 만든 분별일뿐 크기의 차이는 진여를 관하여 성불에 이르려 하는 자에게는 의미 없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물리학자는 아니지만 줏어들은 지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한없이 작은 블랙홀을 거쳐 한없이 큰 대우주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다고 하더군요… 이런 이야기는 물리학자들이 밝혀줄 것이니 저는 생략하겠습니다.

 

두번째 극대세계와 극소세계는 우리의 관념에 따라 다르게 보일 뿐이지 사실은 같은 세계입니다.

먼저번 강의에서 극대세계와 극소세계를 경험하는 명상법을 강의한적이 있는데 다시한번더 강의해보겠습니다.

 

먼저 극대 세계로 진입하는 명상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눈을 감고 먼저 가장 가까운 이(되도록 가족이 좋습니다.)를 느끼고 그의 마음을 상상해 보세요

그의 외로움, 슬픔, 기쁨, 혹은 배고픔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굳이 그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감정의 단 1%라도 좋습니다.

그와의 일체감이 이루어지면 이번엔 그와 더불어 한사람을 더 동시에 느끼려 해보세요.

두사람과 동시에 일체감을 느끼게 되면 그 다음 부터는 쉽습니다.

더욱 상상력을 키워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 모든 주민들과의 일체감을 느끼려 노력해 봅니다.

이렇게 넒게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선 굳이 마을 사람들의 감정을 느끼려 할필요는 없습니다.

0.0001%의 마음이라도 상상을 통한 가상의 마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마을 사람과 내가 모여 또 하나의 몸(전체의식)을 가진 다고 상상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마을사람들과 일체감을 느꼈다면 이제 이 나라 모든 사람들과의 일체감을 느끼려 노력해 보세요.

그 일체감이란 함장식(含藏識)입니다.

세상 모든 존재는 각 개체별로 존재하지만 함장식의 영역에 올라가면 종족별 혹은 공간별로 함장식이 존재합니다.

그 함장식을 신이라 표현해서 대한민국같은경우 특정 민족신이라 이름 붙여서 그 민족신을 느끼려고 하셔도 됩니다.

가령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니 모든 사람이 단군안의 한 세포이고 그러한 세포가 모여서 단군이 이루어 진다고 생각하는 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이 나라의 모든존재의 대표되는 함장식과 일체감이 느껴진다면,

이번엔 사람만이 아닌 이 지구와 하나 되는 감정을 느껴봅니다.

지구상의 모든 땅과 공기, 바람, 초목, 그리고 모든 동식물과 하나 되는 감정을 느껴봅니다.

지구 함장식과의 일체감을 느꼈다면,

이제는 의식을 더욱 확장하여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와의 일체감을 느껴보고

태양계가 속해 있는 은하계와의 일체감까지 느껴봅니다.

의식을 더욱 끝없이 확장하여 마치 내가 이 우주 자체 만큼 거대한 존재라고 상상해보세요.

수많은 은하계가 모여서 이뤄진 소천세계(小千世界), 중천세계(中千世界), 대천세계(大千世界)까지 나의 의식이 확장되고 그때 부터는 내 안의 수많은 작은 은하계, 작은 은하계가 모여 구성된 중간크기 은하계, 그러한 크고 작은 은하계들이 모여 있는 더욱 큰 은하계를 마음껏 관찰하고 여행해보세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존재이기에 나의 일부인 수많은 은하계 어디든 생각 즉시 소자아(小自我)로서 이동이 가능합니다.

 

마음껏 여행 다녔으면 이제 대천세계를 넘어선,

이 우주를 포함하고 있으나 더욱 거대한 바깥 세상의 존재를 느껴봅니다.

 

그때가 되면 이 우주도 하나의 작은 점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의식을 무한히 더욱 확대하여 하나의 점의 크기인 우주가 숫자로 헤아릴수 없이 많이 보일 만큼 의식을 확장합니다.

 

확대하고 확대하고 또 확대 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 우주를 넘어선 모든 존재가 모여서 하나의 물질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물질은 소자아(小自我)로 있을 때 현미경으로 본 세포와 비슷한 모양입니다.

그 세포에서 더욱 의식의 인지범위를 확장하면 그 세포들이 모여서 형성된

.

.

.

내가 있음을 알게됩니다.

 

이런식으로 또 끝없이 의식을 확장하면 더욱 큰 거대 세계에서의 나를 볼수 있고,

또 더욱 확장하면 더더욱 큰 거대 세계에서의 나를 볼수 있습니다.

 

반대로 의식을 축소하다 보면 역시 극소세계에서의 나를 볼수 있으며,

현실의 내 몸 주위의 모든 것들, 물컵, 휴대폰, 키보드, 지갑, 공기, 공기중의 수분, 먼지…의 모든 물질의 극소세계에서도 나와 주위 사람과 이 우주가 존재함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극대, 극소, 그리고 모든 공간에 존재하는 나를 발견 할수 있는 최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가장 좋은 명상법중 하나입니다.

 

- 페친 상불경님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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