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연구소 제 493 호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조 13년 윤5월 27일 저녁, 전라도 강진현 탑동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지속적인 성추문에 시달리던 한 여인이 가해자를 직접 응징한 것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불길처럼 번지는 소문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던 18세의 김은애가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김은애는 자신을 음해한 안(安) 여인을 칼로 찔러 죽인 후 다른 한 사람 최정련을 죽이러 갔는데 뒤쫓아 온 어머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관아에 나아가 자수한 김은애는 그동안 쌓였던 사무치는 원한을 또박또박 쏟아내었다.
제가 시집오기 전에 이웃에 살던 최정련이 저와 간통했다는 식으로 말을 꾸며댔고, 안 여인을 중간에 내세워 청혼해왔습니다. 허락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자 그들은 추잡한 말로 더욱 심하게 음해하며 그칠 줄 몰랐습니다. (…) 저의 분함과 억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제발 관아에서 최정련을 때려죽이어 제 한을 풀어주십시오.
일차적인 조사를 마친 강진 현감은 “무고를 당한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사람을 죽였기에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의견을 썼다. 전라도 관찰사의 손을 거쳐 사건은 중앙의 형조(刑曹)로 올라갔다. 형조에서는 “얼마나 원한이 맺혔으면 흉악한 계획을 세워 마침내 결행했겠는가”, 하지만 “나이 어린 여자가 목숨을 내놓고 원한을 푼 것은 법대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썼다. 이제 왕의 판결만 남았다.
그런데 국왕 정조는 ‘은애의 옥사는 국법으로 보면 조금도 의심할 바 없으나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원인을 따진다면 일개 옥관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며 좌의정에게 의견을 구하도록 했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의견을 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무고하게 성추문을 당한 은애가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칼을 무섭게 휘두른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약법삼장(約法三章)에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여야 한다’고 했지 정상을 참작하라는 말이 없다. 은애는 비록 사무친 원한이 있더라도 관청에 호소하여 그들의 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옳았다.
강진 현감에서 좌의정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이 은애의 상황은 이해가 되나 사람을 죽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왕의 생각은 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뼛속에 사무치는 억울함은 여자로서 음란하다는 무고를 당하는 일이다. 억울함이 골수에 사무쳐 스스로 목매거나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김은애는 불과 18세밖에 안 된 여자지만 억울함이 사무쳐 한번 죽음으로써 결판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헛되이 죽을 수 없었다. 칼을 꺼내 들고 원수의 집으로 달려가 통쾌하게 설명하고 꾸짖은 뒤 마침내 찔러 죽임으로써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저 원수는 복수를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온 고을이 알도록 했다. 사람으로서 윤리와 기절이 없는 자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 은애의 행위는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형수 은애를 특별히 석방하라!
(『일성록』정조 14년 8월 10일)
김은애의 목숨을 놓고 정조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국법과 생명 사이에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직접 쓴 판결문[판부]을 채제공에게 보이며 다시 물었다. 왕의 고뇌에 공감한 채제공은 비로소 ‘엄지척’을 날린다. 이어서 왕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굳세고 강한 성질의 김은애가 애초에 죽이려던 최정련에게 복수하려 들 것이니, 정련을 잘 보호하라.”고 명하였다. “은애를 살리려다가 최정련을 죽이게 된다면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살인자는 목숨으로 갚는다’는 국법을 무시하고 은애의 생명을 돌려 준 대가로 범죄자 최정련을 용서하자는 것인가? 물론 왕조 체제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정조가 우리 역사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에 강한 자부심이 드는 대목이다.
김은애 사건은 『정조실록』과 『일성록』, 『심리록』 등에 실려 있다. 종합해보면 왕이 김은애를 높이 평가한 것은 피해자이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약한 여자들과는 달리 용기와 기백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다는 점이다. 왕은 사마천이 다시 태어난다면 「유협전(游俠傳)」말미에 은애를 포함시킬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당대 문장으로 이름난 이덕무에게 ‘은애전’을 쓰게 했고, 이덕무에게 고무된 성해응도 ‘은애전’을 썼다. 18세기 끝자락에서 김은애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김은애의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에게는 어떻게 읽힐까. 한 인격을 수치와 분노로 치닫게 한 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교훈으로 읽을 수도 있겠다. 또 사적인 복수가 법리(法理)로는 용인될 수 없지만 정리(情理)로는 ‘영웅’의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절대 권력이든 다수의 시민이든 분노에 공감하는 힘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김은애 사건이 조선팔도를 휩쓴 지 10여 년이 지난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된 다산 정약용은 유배지 강진에 도착한다. 강진 사람들은 김은애 사건을 어떻게 보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은애가 시집가기 전 최정련과 사통하는 사이였고, 안 여인은 매파가 되어 그들의 통간을 도우며 이익을 취했다’고 하며, ‘남녀의 일을 누가 알겠느냐’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이에 다산은 한탄조로 “도둑의 누명은 벗을 수 있으나 간음에 대한 무함은 씻기 어렵다”는 속담을 되뇌며 “실제 그랬다면 기가 죽어 이처럼 통쾌하게 죽이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짧은 논평을 남겼다.(『흠흠신서』)
우리 사회는 지금 #미투 운동에 힘입어 인권의 새로운 역사가 열리고 있다. 우리 사회의 미투가 성적 피해자에게 내재한 원한과 분노를 해소하는 치유의 과정이라면 김은애의 복수도 방법이 다를 뿐 미투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도’라는 연대가 불가능했던 시대의 김은애는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 운동을 성공적으로 끌고 나갈 동력이 필요하다. 다산이 전해 준 바, 김은애를 향한 음모론이 그 고을에서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듯이 우리의 미투도 이런 류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가 없다.
글쓴이의 다른 저서
· 한국 철학 담당
· 저서
〈신사임당〉, 문학동네, 2017
〈정절의 역사〉푸른역사, 2014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도서출판 여이연, 2005
〈노년의 풍경〉글항아리, 2014 (공저)
〈일기로 본 조선〉글항아리, 2013 (공저)
〈선비의 멋, 규방의 맛〉글항아리, 2012 (공저) 등 다수
· 역서
〈열녀전〉글항아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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