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도 윤회한다고 믿는 사람 중의 일원이지만 빨라도 너무 빠른 과거로 회귀하는 대한민국의 자화상
다음은 더스쿠프의 강서구 기자님 기사이다.
"한국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는 방법에는 논쟁이 있지만 중세인 고려를 지나 조선으로 오면서 신분 이동이 가능한 사회로 변화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조선의 건국이 단순한 왕조의 교체가 아니라 신분 상승이 불가능했던 폐쇄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개방된 사회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조선은 양인과 천민 두가지 신분으로만 구성됐다. 천민이 아니라면 누구나 과거를 통한 신분상승이 가능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과거를 통해 신분 상승에 성공한 평민의 수도 많았다.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인문대학)의 저서 「과거, 출세의 사다리」에 따르면 조선을 건국한 1392년부터 과거제가 폐지된 1894년 갑오개혁까지의 문과 급제자는 1만4615명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합격자의 절반가량이 기득권이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평민 급제자의 비율은 태조에서 정종까지 40.4%를 기록했고 태종 때에는 50%에 달했다. 연산군에서 숙종 집권기 20~30%대까지 떨어졌지만 정조와 순조시대에는 각각 53%, 54%로 높아졌다. 평민이 과거 합격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도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게 가능했다는 얘기다.
이순한 영남대 교수(역사학과)는 "조선은 관료제 사회로 개인의 능력을 최우선으로 한다"며 "신분제 사회로 계층 상승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조선사회가 개인의 능력을 중시한 개방된 사회인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사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낯선 속담이 아니었다.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교육을 통한 계층이동은 쉽게 볼 수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가능하게 했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런 사회적 역동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시대에도 가능했던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지고 있어서다.
한국 사회가 이른바 '흙수저' '금수저'로 불리는 신계급사회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도 발표됐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사회통합 실태진단 및 대응방안' 연구보고서를 통해 학력ㆍ계층ㆍ직업 등 계층의 고착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1960년대 이전 산업화세대와 1970년대 민주화세대, 1990년대 정보화세대를 거치면서 더욱 고착화됐다.
우선 아버지 학력이 높을수록 자녀의 학력도 높았다. 보고서에 따르면 아버지의 학력이 중졸 이하이면 자녀의 학력도 중졸 이하인 비율이 16.4%에 달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학력이 고졸 이상이면서 자녀 학력이 중졸 이하인 비율은 0.5%에 불과했다. 아버지가 고학력일 경우 자녀도 고학력일 확률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버지가 대학 이상의 학력자일 경우 자녀의 학력도 높았다.
아버지가 고학력자(대학이상)일 때 자녀가 고학력자인 비율은 산업화세대 64.0%, 민주화세대 79.7%, 정보화세대 89.6%로 나타났다. 최근 세대로 올수록 세대간 고학력 세습이 이뤄지고 있다는 얘기다. 직업 계층과 소득계층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의 직업이 관리전문직이면 자식의 직업도 관리전문직인 비율이 43%로 평균(19.8%)의 두배가 넘었다. 세대별로 살펴보면 관리전문직 아버지를 둔 자녀가 관리전문직인 비율은 민주화 세대가 56.4%로 평균치인 23.3%의 두배를 넘어섰다. 또한 아버지가 중상층 이상인 경우 자식 또한 중상층 이상에 속할 확률은 아버지가 하층이었던 경우 자식이 중상층 이상이 될 확률에 비해 훨씬 높았다.
문제는 이런 계층 고착화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데 있다. 계층상승의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되고 있어서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계층상승 사다리에 대한 국민인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개인이 열심히 노력해도 계층상승 가능성이 낮다는 부정적 응답률은 81.0%에 달했다. 2013년의 75.2%에 비해 5.8%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특히 20대 청년층의 부정적 인식은 같은 기간 70.5%에서 80.9%로 10.4%포인트나 상승했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원은 "20대는 다른 연령층에 비해 부모의 지원으로 생계비 부담이 적고 계층상승 가능성에 긍정적"이라며 "하지만 청년실업률이 크게 상승하고 비정규직 비중이 증가하면서 계층상승 인식이 크게 악화됐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계층 고착화의 원인으로 소득불균형을 지목했다. 특히 신자유주가 도입된 이후 규제완화와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기업의 주머니는 두둑해졌지만 서민과 중산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 발달에도 부의 편중이 심해졌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3월 16일 발표한 '아시아 불평등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2013년 기준 한국의 소득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에 달했다. 1996년의 29%에 비해 16%나 상승한 수치다.
더 큰 문제는 소득불균형이 경제침체를 가속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IMF는 전체 소득 중에서 5분위(상위 20%)의 몫이 1%포인트 증가할 때 경제성장률은 0.0837%포인트 하락한다고 경고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소득 분배와 빈곤' 보고서에서 "지난 30년간 선진국에서 소득불균형이 더 심해졌다"며 "소득불균형의 확대가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좋은 일자리 창출하고 조세제도 개선을 통한 소득재분배에 나서 '계층상승 사다리'를 강화해야 한다. 이주협 연구원은 "계층상승 사다리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하위 일자리 10개보다 좋은 일자리 하나가 중요하다"며 "불필요한 규제 완화에 따른 투자여건 개선, 고용 인센티브 확대 등 좋은 일자리를 만들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아울러 조세 정책을 통해 소득재분배 기능을 강화할 필요도 있다. 권오인 경실련 경제정책팀장은 "우리나라 조세제도는 고소득층에 유리하게 설계돼 소득불평등을 전혀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며 "소득세ㆍ법인세 인상 등 고소득층과 재벌의 과세를 강화해 조세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서구 더스쿠프 기자 ksg@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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