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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남 유계선생님 참배

지성유인식 2013. 1. 2. 17:42

 

 

 

어제 영원지기와 둘째가 함께

인근 익산시 함라면 지내에 위치한 시남 유계선생님 묘소에 다녀 왔습니다. .

 

文忠公 市南 兪棨

1607(선조 40)∼1664(현종 5).

 

1630년(인조 8) 진사과에 합격하고,

163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의 관리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시강원설서로서 척화를 주장하다가 화의가 성립되자 척화죄로 임천에 유배되었다.

1639년에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금산의 마하산(麻霞山)에 서실(書室)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때 『가례집해(家禮集解)』를 개작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저작하였다.

1644년 주서로 기용되었고, 1646년 무안현감이 되었다.

1649년 인조가 죽자 홍문관부교리로서 왕의 장례 절차를 상소하여 예론에 따라 제도화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묘호를 정할 때 ‘조(祖)’자의 사용을 반대하고 ‘종(宗)’자를 주장하다가

이듬해 선왕을 욕되게 하였다는 죄로 온성과 영월에 유배되었다.

1652년(효종 3) 유배에서 풀려나 송시열·송준길 등의 추천으로 시강원문학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1659년 병조참지로서 비변사부제조를 겸임하고, 이어서 대사간·공조참의·대사성·부제학·부승지 등을 지냈다.

이 해에 효종이 죽고 복상 문제가 일어나자 서인으로서 기년설(朞年說)을 지지하였으며,

3년설을 주장한 윤휴(尹鑴)·윤선도(尹善道) 등의 남인을 논박하여 유배 또는 좌천시켰다.

1662년(현종 3) 예문관제학을 거쳐 1663년 대사헌·이조참판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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