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민초

고려인이 느낀 대한민국

지성유인식 2009. 5. 8. 21:10

고려인 3세 나타샤의 코리안 드림


3세대 고려인으로 한국에서 어려움을 이겨내며 꿈을 키워가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출신으로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에 다니는 나타샤 리(28) 양도 그 중의 한 명이다.


한국에 온 지는 5년째. 너무나 힘겨운 생활을 견디지 못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년 반 만에 다시 한국으로 나와 박사과정의 마지막 학기를 강의를 들으며 논문을 쓰고 있다.


그는 학교에 다니는 것 외에 실크로드재단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하고,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러시아권 출신자에게 취업 절자 및 한국 생활 적응에 관한 강의도 한다. 모두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이다.


그는 고향에서 배운 카자흐말과 러시아어 외에 영어도 유창하고 물론 한국어도 능통하다.


그는 "한국은 배우기에는 아주 좋지만 살기에는 안 좋은 나라"라며 웃는다.


"전통과 현대가 함께 숨 쉬고 있고, 없는 것이 없는 나라, 너무나 '다이내믹'하고 편리하지만 정신없이 움직이는, 누군가의 말로 표현하자면 '복잡한 천국'이지 않을까 싶네요."


"열심히 일하며 사는 모습, 무에서 유를 만들 줄 아는 능력,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자세를 배우면 좋을 것 같고... 한국 사람은 정이 많은데 편을 잘 가릅니다. 같은 테두리 안에 있으면 따뜻하게 대하지만 벗어나면 매몰찹니다."


한국에 오기 전과 후 한국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크다고 그는 8일 말했다.


"고려인으로서 민족의 고유문화를 더 느낄 줄 알았는데 할머님이 이야기하셨던 것과 다릅니다. 세대차이가 너무 큽니다. 고향에 있을 때 만난 선생님과 선교사님들은 대부분 한국의 어려운 시기를 겪었던 분이라 끈기도 있고 바른 것을 가르쳐줬는데 젊은 사람은 어려움을 모르고 성급하고 욕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나타샤 양이 한국에서 이루려는 꿈은 사실 할머니의 꿈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 5살 나이에 사할린으로 왔다가 스탈린 정권 시절 카자흐스탄로 강제이주 당한 그의 할머니는 어린 맏손녀에게 고향과 조상의 이야기를 자주 들려줬다.


"하늘을 나는 새도 자유로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데 우리는 조국을 못 보고 이 땅에 묻히겠구나 하시던 할머니 말씀이 어린 저의 가슴을 너무 아프게 했습니다."


그렇게 가슴에 쌓이고 쌓인 할머니의 한이 그를 한국에 보낸 것이라고 그는 믿는다.


한국에 오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척박한 시골 소읍에 사는 그에게 바깥세상에 눈을 뜨게 해 준 것은 카자흐스탄에 봉사활동을 온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엔지니어 출신의 미국인 선생님을 만나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어떻게 미래를 꿈꾸고 설계할지를 깨우쳤다.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경과 희망은 마음을 짓누르던 육중한 낙심의 바위를 들어 올렸고 대신 그 자리에 꿈을 성취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을 채워 넣었습니다."


이후 그는 불 같은 열정으로 학업에 매진했다. '러시안'과 '코리안'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극복하고 차별과 가난 속에서 오로지 생존을 위해 힘겹게 사는 부모와 이웃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가정 형편은 그의 향학열을 충족시켜 주기에는 너무 열악했다. 결국 그는 모아 놓은 돈을 들고 가출을 결행했다. 학비가 싼 이웃나라 키르기스스탄으로 무작정 떠나 대학의 문을 두드렸으나 이미 대학의 원서접수 기간이 지났고 외국인에게 장학금을 주는 곳은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섧게 우는 그에게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신사가 이유를 물었다. 울먹이며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그 신사는 "고등학교 성적이 좋다면 장학금을 줄 수 있다"며 "대학에 와서 공부하라"고 말했다. 그 신사는 대학 총장이었다.


키르기스스탄 유학 생활은 그렇게 기적처럼 시작됐다. 이후 5년간(1999-2004) 식당의 주방 보조와 시각장애인 도우미 등 시간이 될 때마다 일하며 한국어 전공 과정을 마쳤다.


힘겹게 학업을 마칠 즈음 교회에서 한국인을 만났고 2004년 8월 재외동포재단의 장학프로그램에 지원, 선발돼 연세대 대학원으로 유학을 올 수 있었다.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교육자가 되고 싶고, 여건이 되면 글 쓰는 작가로 활동하며 많은 사람에게 용기와 도전에 대해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의 휴대폰에 전화를 걸면 아바(ABBA)의 노래 '아이 해브 어 드림'이 흘러나온다. 그의 삶이 노랫말처럼 펼쳐지기를 바란다.


"...내겐 꿈이 있어요...힘든 현실을 헤쳐나갈 수 있게 도와줄, 내가 가려는 목적지는, 어둠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갈, 그런 가치가 있는 곳이죠...때가 오면, 나는 저 강을 건널 거예요, 내겐 꿈이 있거든요."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