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님께서 29일 경북궁에서 엄수되는 노무현 전 대통령님의 국민장에서 헌화★분향후 걸어 나노는 모습(경향신문에서)
죽음으로써 영웅이 되신분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큰틀에서 옳바른 가치관을 갖으신 분이며,
옳바른 도덕관을 갖으신 분이다.
현재 우리 나라는 능력에 비해 처세술이 더 요구되는 사회에서
그에 미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용납하지 못해
자진하신 것이다.
부디 천상에의 우리 대한민국이
영원히 발전하여 나갈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길 두손 모아 합장하옵나이다.
어제는 아주 오랫만에 영원지기와
소백산 연화봉에 다녀왔습니다.
한 번은 가볼만한 산(23산)인데 두 번 가긴 글쎄...
아침엔 중학교 2학년인 막둥이와
미륵산까지 왕복 약 40킬로미터의
하이킹을 갔다 왔습니다.
건강한 행복을
두손 모아 합장하옵나이다.
소백산 연화봉에 다녀왔습니다.
한 번은 가볼만한 산(23산)인데 두 번 가긴 글쎄...
아침엔 중학교 2학년인 막둥이와
미륵산까지 왕복 약 40킬로미터의
하이킹을 갔다 왔습니다.
건강한 행복을
두손 모아 합장하옵나이다.
이후로 두 번 다시 나는 이런 장관과 만나지 못할 것이다. 세계의 대장관이라고 알려진 그 어떤 풍경 앞에 가 선다고 해도 이처럼 가슴 떨리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 5월29일 경복궁에서 광화문을 거쳐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 나는 두 가지를 목격했다. 놓치지 않고 봐두려 두 눈을 크게 떴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 사물들은 종종 희부예지곤 했다.
삶과 죽음이 어떻게 스스럼없이 합쳐지고 상대방에 힘을 보태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하는지 보았다. 나는 삶이 이렇듯 반짝이는 것인지 몰랐다. 죽음은 삶 때문에 엄숙했다. 그것은 무서움과는 달랐다. 또 하나 눈물과 웃음 또한 한 감정이라는 것도 알았다. 안 그랬다면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그날의 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새벽 봉하마을을 출발해 천리 길을 달려왔을 운구 차량을 맞으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홉 시를 넘기자마자 사람들이 하나, 둘 경복궁 쪽으로 운집하기 시작했다. 노란 리본을 받아 머리띠처럼 두르기도 하고 목에 둘러주거나 손목에 묶어주면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산에서 방금 도착했다는 처녀도 있었다. 허리가 기역자로 굽어 지팡이 없인 거동이 불편한 백발노인도 길을 나섰다. 고만고만한 아이 둘을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유모차에 태운 엄마도 있었다. 임산부도 있었고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한 어린이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메웠고 발짝을 떼어놓기도 힘이 들었다.
패션 또한 화려했다. 가장 자신 있는 모습으로 노 전 대통령을 보내고 싶어한 이들은 한껏 치장하고 나섰다. 이 모습을 외국인 몇이 사진에 담았다. 잠깐 전경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효자동에서 광화문 사거리로 난 길 쪽으로는 운구 차량이 통과하지 않는다는 방송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은 급히 반대편 길로 건너려 했고 이미 통행 금지가 된 사거리에는 전경들이 담처럼 서 있었다. 분통에 찬 남자가 고함을 질렀지만 대개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화단턱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말했다. 오시는 길을 마중하고 싶었는데 헛짚었노라고. 영결식이 열리는 경복궁 앞뜰이 바로 길 건너로 지척이었지만 그곳에는 초대권을 받은 이들만 입장이 가능했다. “초대권이 있어야만 거기 들어가요”라는 한 아저씨의 지적에 아주머니는 “그럼요, 알지요. 우리 같은 사람에게 초대권이 당키나 해요?” 우리 같은 사람, 그 말이 쓸쓸했다. 아주머니와 함께 광화문 쪽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바로 우리가 좋아했던 그, 그가 그런 사람 아니었나. 나와 다르지 않은 나 같은 사람, 우리 같은 사람.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 그런 그의 마지막 길에 초대권을 받은 이들만이 참석하는 영결식이라니. 비좁은 경복궁 앞뜰과 저간의 사정을 다 짐작하면서도 그가 있었다면 다 들어오라고 두 문을 활짝 열었을 거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2002년 그해 겨울밤을 우리는 기억한다. 바로 이 부근이었다. 그 전날에는 눈이 펑펑 쏟아졌다. 당선이 확실해지면서 여기 어딘가에 섰던 그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노란 띠들이 검은 밤에 휘날렸다. 검은 바탕에 노란 띠를 두른 위험 표지판처럼 강렬하게 우리 머릿속에 와 박혔다. 우리는 흥분했고 울먹였다. 무언가를 감지한 어린 딸이 물었다. “좋은 사람이야?” 우리의 사고를 지배했던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측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지만 딸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당선 발표가 있기 훨씬 전부터 아이는 제 엄마에게서 가족들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겠다. 나는 여상 출신이다. 그 말을 하는 것이 싫을 때가 많았다. 처음 보는 남자들이 학교 하나로 금방 친해지는 것을 보면 별안간 누군가 내게 출신 학교를 물어볼까 두려워지기도 했다. 대학보다는 회사 생활을 먼저 시작했다. 박봉이었고 용돈을 아끼느라 도시락을 싸 다녔다.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도시락이 든 작은 비닐백을 들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회사로 가는 길에는 그런 어린 회사원들이 많았다. 금방 반찬 냄새가 배고 잘 빠지지 않던 그 비닐백. 뒤늦게 공부를 하느라 대학 시험을 치러야 했을 때는 상과(商科)에 밀려 등한시되었던 국수사과 과목 때문에 밤늦도록 단과 학원에 다녀야 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친척 하나 없어 방학 때도 해외에 아이를 보낼 수 없다. 말단 공무원 하나 없고 병원에서 일하는 이 하나 없어 순번보다 빨리 입원하는 이들을 보고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나는 혈연, 지연, 학연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이력을 묻는 이들에게 여상을 나와 직장에 다녔노라고 말했고 여상 출신이라는 딱지는 아주 오랫동안 내 뒤를 따라다녔다. 동생들은 가난이 자랑이냐고 제발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을 수 없느냐고 지청구를 주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 어떻게 스스럼없이 합쳐지고 상대방에 힘을 보태 서로를 더욱 빛나게 하는지 보았다. 나는 삶이 이렇듯 반짝이는 것인지 몰랐다. 죽음은 삶 때문에 엄숙했다. 그것은 무서움과는 달랐다. 또 하나 눈물과 웃음 또한 한 감정이라는 것도 알았다. 안 그랬다면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그날의 우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새벽 봉하마을을 출발해 천리 길을 달려왔을 운구 차량을 맞으러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아홉 시를 넘기자마자 사람들이 하나, 둘 경복궁 쪽으로 운집하기 시작했다. 노란 리본을 받아 머리띠처럼 두르기도 하고 목에 둘러주거나 손목에 묶어주면서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부산에서 방금 도착했다는 처녀도 있었다. 허리가 기역자로 굽어 지팡이 없인 거동이 불편한 백발노인도 길을 나섰다. 고만고만한 아이 둘을 하나는 걸리고 하나는 유모차에 태운 엄마도 있었다. 임산부도 있었고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한 어린이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을 메웠고 발짝을 떼어놓기도 힘이 들었다.
패션 또한 화려했다. 가장 자신 있는 모습으로 노 전 대통령을 보내고 싶어한 이들은 한껏 치장하고 나섰다. 이 모습을 외국인 몇이 사진에 담았다. 잠깐 전경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효자동에서 광화문 사거리로 난 길 쪽으로는 운구 차량이 통과하지 않는다는 방송이 나오면서부터였다. 사람들은 급히 반대편 길로 건너려 했고 이미 통행 금지가 된 사거리에는 전경들이 담처럼 서 있었다. 분통에 찬 남자가 고함을 질렀지만 대개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화단턱에 나란히 앉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옆에 앉은 아주머니가 말했다. 오시는 길을 마중하고 싶었는데 헛짚었노라고. 영결식이 열리는 경복궁 앞뜰이 바로 길 건너로 지척이었지만 그곳에는 초대권을 받은 이들만 입장이 가능했다. “초대권이 있어야만 거기 들어가요”라는 한 아저씨의 지적에 아주머니는 “그럼요, 알지요. 우리 같은 사람에게 초대권이 당키나 해요?” 우리 같은 사람, 그 말이 쓸쓸했다. 아주머니와 함께 광화문 쪽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바로 우리가 좋아했던 그, 그가 그런 사람 아니었나. 나와 다르지 않은 나 같은 사람, 우리 같은 사람. 텔레비전이나 책에서 만나볼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사람. 그런 그의 마지막 길에 초대권을 받은 이들만이 참석하는 영결식이라니. 비좁은 경복궁 앞뜰과 저간의 사정을 다 짐작하면서도 그가 있었다면 다 들어오라고 두 문을 활짝 열었을 거라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2002년 그해 겨울밤을 우리는 기억한다. 바로 이 부근이었다. 그 전날에는 눈이 펑펑 쏟아졌다. 당선이 확실해지면서 여기 어딘가에 섰던 그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노란 띠들이 검은 밤에 휘날렸다. 검은 바탕에 노란 띠를 두른 위험 표지판처럼 강렬하게 우리 머릿속에 와 박혔다. 우리는 흥분했고 울먹였다. 무언가를 감지한 어린 딸이 물었다. “좋은 사람이야?” 우리의 사고를 지배했던 이분법적인 사고로는 측정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지만 딸아이는 알아듣지 못했다. 당선 발표가 있기 훨씬 전부터 아이는 제 엄마에게서 가족들에게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솔직히 이야기하겠다. 나는 여상 출신이다. 그 말을 하는 것이 싫을 때가 많았다. 처음 보는 남자들이 학교 하나로 금방 친해지는 것을 보면 별안간 누군가 내게 출신 학교를 물어볼까 두려워지기도 했다. 대학보다는 회사 생활을 먼저 시작했다. 박봉이었고 용돈을 아끼느라 도시락을 싸 다녔다.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도시락이 든 작은 비닐백을 들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회사로 가는 길에는 그런 어린 회사원들이 많았다. 금방 반찬 냄새가 배고 잘 빠지지 않던 그 비닐백. 뒤늦게 공부를 하느라 대학 시험을 치러야 했을 때는 상과(商科)에 밀려 등한시되었던 국수사과 과목 때문에 밤늦도록 단과 학원에 다녀야 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친척 하나 없어 방학 때도 해외에 아이를 보낼 수 없다. 말단 공무원 하나 없고 병원에서 일하는 이 하나 없어 순번보다 빨리 입원하는 이들을 보고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나는 혈연, 지연, 학연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이력을 묻는 이들에게 여상을 나와 직장에 다녔노라고 말했고 여상 출신이라는 딱지는 아주 오랫동안 내 뒤를 따라다녔다. 동생들은 가난이 자랑이냐고 제발 그 이야기는 하지 않을 수 없느냐고 지청구를 주기도 했다.
그랬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공과 절망이 남다르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나와 비슷한 길을 걸어간 노 대통령이 내 유일한 빽이었다. 아이에게 남들처럼 사교육을 시키지 않는 것도 그 이유였다. 일류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우리는 우리가 되고 싶은 그 무엇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신화를 만든다. 그는 내게 믿는 구석이었고 비빌 언덕이었다. 무엇보다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 내 신조를 그대로 밀고 나갈 수 있게 했다. 그동안은 최소한의 양심마저도 속여야 했다.
광화문은 촛불 집회 때 이후로 또다시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어졌다. 땡볕 아래 모여 선 사람들은 전광판으로 영결식으로 보느라 길게 목을 뺐다. 그동안에도 그의 소박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발가락 양말을 신은 모습과 비행기에서 기압 조절을 하는 익살맞은 모습까지 사진을 보는 동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벌써부터 나는 그가 그리웠다. 길에서 만난 나이 든 어느 분의 충고처럼 우리는 죽음 앞에서야 삶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눈물이 나올 때마다 노랑 풍선을 불었다. 풍선을 부는 동안에는 울컥해진 마음이 차분해졌다.
경복궁을 빠져나온 운구 차량이 광화문을 지날 무렵 운집했던 사람들의 무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는 바로 우리 코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쌍꺼풀을 한 익살스러운 모습은 그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나는 삶과 죽음이 조금의 재봉선 티도 없이 자연스럽게 마무리된 장관 앞에서 두 눈을 크게 떴다. 헬륨이 든 풍선들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우리가 입으로 분 풍선들이 차도로 떨어졌다. 풍선이 자동차 바퀴에 밟히면서 뻥, 뻥 소리를 내며 터졌다. 나는 그날 내 속의 무언가도 덩달아 터져버렸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던진 노란 비행기는 어쩌면 그의 마을 봉화산을 봄이면 노랗게 물들였을 산수유 꽃처럼 천천히 낙화했다. 그는 우리의 풍선을, 비행기를 사뿐히 즈려밟고 마지막 길을 갔다.
그가 서민 출신이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한때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그가 얻은 기득권을 스스로 버렸다. 그의 재임 시절 그를 무능하다고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언론 보도들이 떠오른다. 역설적으로 그가 대통령으로 이룬 성과가 바로 이것이다. 그 이전이라면 대통령을 향한 이런 평가나 말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가 가진 권력을 국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강처럼 그의 뒤를 따라 흘렀다. 가끔 분노에 찬 목소리가 불거지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처럼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유난히 분실물이 많은 하루였다. 어느 어머니는 슬픔에 젖어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스무 살 아들의 손을 놓쳤다고 했다. 지갑이나 가방을 분실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다른 말은 다 따르겠지만 운명이다, 라는 말만은 수긍하지 않겠다. 그의 삶 또한 운명을 거슬러 온 것이 아닌가. 그 말만은 수정해야 한다.
평소 소박하고 허탈했던 그는 죽음 또한 무거운 격식에서 내려놓았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정성스레 쓴 울긋불긋한 만장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때로 그는 그를 보내기 싫어하는 인파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언젠가 우리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던 것처럼 우리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 떠나갔다.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셔츠의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하성란/소설가
광화문은 촛불 집회 때 이후로 또다시 차도와 인도의 구분이 없어졌다. 땡볕 아래 모여 선 사람들은 전광판으로 영결식으로 보느라 길게 목을 뺐다. 그동안에도 그의 소박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발가락 양말을 신은 모습과 비행기에서 기압 조절을 하는 익살맞은 모습까지 사진을 보는 동안 울기도 하고 웃기도 했다. 벌써부터 나는 그가 그리웠다. 길에서 만난 나이 든 어느 분의 충고처럼 우리는 죽음 앞에서야 삶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눈물이 나올 때마다 노랑 풍선을 불었다. 풍선을 부는 동안에는 울컥해진 마음이 차분해졌다.
경복궁을 빠져나온 운구 차량이 광화문을 지날 무렵 운집했던 사람들의 무리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는 바로 우리 코앞을 천천히 지나갔다. 쌍꺼풀을 한 익살스러운 모습은 그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나는 삶과 죽음이 조금의 재봉선 티도 없이 자연스럽게 마무리된 장관 앞에서 두 눈을 크게 떴다. 헬륨이 든 풍선들이 하늘 높이 날아갔다. 우리가 입으로 분 풍선들이 차도로 떨어졌다. 풍선이 자동차 바퀴에 밟히면서 뻥, 뻥 소리를 내며 터졌다. 나는 그날 내 속의 무언가도 덩달아 터져버렸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던진 노란 비행기는 어쩌면 그의 마을 봉화산을 봄이면 노랗게 물들였을 산수유 꽃처럼 천천히 낙화했다. 그는 우리의 풍선을, 비행기를 사뿐히 즈려밟고 마지막 길을 갔다.
그가 서민 출신이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한때 많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그가 얻은 기득권을 스스로 버렸다. 그의 재임 시절 그를 무능하다고 깎아내리기에 바빴던 언론 보도들이 떠오른다. 역설적으로 그가 대통령으로 이룬 성과가 바로 이것이다. 그 이전이라면 대통령을 향한 이런 평가나 말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는 그가 가진 권력을 국민들에게 돌려주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강처럼 그의 뒤를 따라 흘렀다. 가끔 분노에 찬 목소리가 불거지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남긴 마지막 유언처럼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유난히 분실물이 많은 하루였다. 어느 어머니는 슬픔에 젖어 지체장애를 앓고 있는 스무 살 아들의 손을 놓쳤다고 했다. 지갑이나 가방을 분실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다른 말은 다 따르겠지만 운명이다, 라는 말만은 수긍하지 않겠다. 그의 삶 또한 운명을 거슬러 온 것이 아닌가. 그 말만은 수정해야 한다.
평소 소박하고 허탈했던 그는 죽음 또한 무거운 격식에서 내려놓았다. 사람들 하나하나가 정성스레 쓴 울긋불긋한 만장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때로 그는 그를 보내기 싫어하는 인파에 갇히기도 했다. 그는 언젠가 우리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던 것처럼 우리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 떠나갔다. 서울역으로 가는 길에서 나는 셔츠의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는 것을 알았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
하성란/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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