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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 이제하(70).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화가인, 이른바 '전방위 예술가' 이제하의 원제"김영랑 조두남 모란,동백" 듣기
※ 볼륨을 조금 높여야 잘 들립니다.
이재하 그는 아웃사이더인가 마이너리티인가? [정리· www.koreasan.com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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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동백으로 널리 알려진 이 음악은 소설가 이제하의 발표곡이라는 것을 아는이는 그리 많지 않다.
李祭夏씨는 1998년에 "빈 들판"이라는 CD를 발표했다. 총 10곡이 들어 있는데, 지금 이곡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를 발표하였으며 그 후 이 노래는 조영남씨가 리메이크하여 더 널리 알려졌다.
▲ 이제하 작사·작곡·노래 "김영랑 조두남 모란동백" 사투리가 섞인 음성으로 노래를 듣노라니 이제하님이 너무 멋지시다.
1985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상문학상 수상하신 분. 바로 그해에 이상문학상 수상집 단행본을 사면서 이분을 알게되었다.
제목: 김영랑 조두남 모란동백
작사 이제하
작곡 이제하
노래 이제하 (조영남 리메이크)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모란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녘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덧 없어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래 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동백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번 모란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나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번 모란 (牧丹)이 필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 2008 한국의산천
이제하(李祭夏· 소설가)
1937년 4월 20일 (경상남도 밀양)
1937년 경남 밀양 출생, 홍익大 조각과·서양화과 수학. 1957년 "현대문학"에 詩, "신태양"에 소설 당선. 196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소설 입선. 소설집 "草食· 기차", "기선, 바다, 하늘"· "龍", 소설선집 "유자약전"·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장편소설 "열망"·"소녀유자"· "진눈깨비 결혼", 시집 "저 어둠 속 등빛들을 느끼듯이"· "빈 들판". 그 외 다수의 산문집·콩트집·화집·영화칼럼집 발간.
세 차례 회화전. 1999년 3월 명지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이상문학상· 한국일보 문학상· 편운 문학상 수상.
▲ 1985년 11월 구입한 이상문학상 수상집 단행본 ⓒ 2008 한국의산천
1985년 제9회 이상 문학상
본상 수상작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제하
추천 우수작 : 천둥소리-김주영-외 7편
다
저물어 가는 겨울 저녁 눈(雪)이 그리우면, 혜화동의 카페 마리안느에 가 보라. 소설가 이제하가 대표인 그 카페에는 독(毒)이라는 뜻을 지닌 프아종 향수처럼, 펄펄 내리는 눈 향기가 나는 그녀가 앉아 있을지 모른다.
사람이기를 멈춘 채 쉬는 막 향기가 나는, ‘눈앞이 캄캄하고 못생긴 내 청춘’이라 읊조리는 고양이처럼 근사한 여인이 기다릴지 모른다.
<박형준·시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이제하 / 문학동네
르네상스적 예술가의 行旅. "글쓰기는 곧 가난의 의지" [글 한국일보 하종오 기자]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 혹은 하얀 햇빛 깔린/ 어느 도서관 뒤뜰이라고 해도 좋아/…/ 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 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이제하(71)가 1950년대 중반 고교생 때 쓴 시, 학원문학상 수상작으로 당시 한국의 문학소년ㆍ소녀들을 온통 들뜨게 했다는 이 시 ‘청솔 그늘에 앉아’가 생각난 것은 봄날 때문인지 모르겠다.
1998년이니까 꼭 10년 전이다. 그가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리사이틀을 한다는 제보(?)를 받고 달려갔다. ‘청솔 그늘에 앉아’ 등 자작시에 직접 곡을 붙인 노래 10여곡과 ‘세노야’를 통기타 치며 매력 넘치는 허스키로 부르는, 이미 이순 나이 지난 그의 모습에는, 타고 난 아니 신들린 예술가라는 표현 외에 더 적절한 것이 없었지 싶다.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화가이자 가객, 여전한 현역인 그의 이름 앞에 붙는 르네상스적 예술가라는 수식은 이제하 이외의 다른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의 작품 제목처럼 그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 나그네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이미 3년 전에 죽은 아내의 유골을 뿌리려 동해안으로 가는 한 남자의 여정이다. 그 행려에 분단 문제와 샤머니즘, 현실과 환상, 필연과 우연이 얽혀들면서 이제하의 소설은 시처럼 그림처럼 펼쳐진다.
‘환상적 리얼리즘’ ‘광기의 미학’으로 불리는 그만의 글쓰기다. 그를 만나보면 그 환상, 광기는 결코 포즈가 아니다. “충만하면서도 근원적으로는 공허한 바다처럼, 나에게 문학이란 차라리 어깨에 힘주어야 하는 그 모든 거창한 것들을 완전히 제외시켜 버리고 난 뒤에야 만날 수 있는 어떤 실체이다.
한 올의 거짓도 틈입 못할 정도로 나와 세상 사이가 긴장으로 팽팽하게 당겨졌을 때에야 그 핀트도 바로 잡힌다… 이 나라에서 문학을 한다는 소리는 그래서 결국은 가난의 의지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출처 : 인터넷한국일보]
영원한 아웃사이더
카페로 생계 잇는 이상문학상 수상자
서울 동숭동 대학로 골목에 자리한 카페 「마리안느」. 30여 평 남짓한 좁은 실내 한쪽 작은 무대에 전자 피아노, 드럼, 기타 등의 악기가 있다. 그 옆으로 서적과 도예품, 부채 등을 파는 판매대가 설치되어 있다.
귀에 익숙지 않은 제3세계 음악이 흐른다.
이 정체불명인 카페의 주인은 올해 70세인 소설가 李祭夏(이제하)씨.
캐주얼한 의상에 벙거지를 쓴 李祭夏씨가 카운터에 놓인 컴퓨터로 자신의 홈페이지(www.zeha.pe.kr)를 점검하고 있다. 그의 홈페이지는 자신의 작품과 함께 제3세계 음악, 희귀 영화가 수록되어 있어 네티즌들에게 인기가 높다.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바짝 마른 몸피의 작가에게서 여전히 청년의 냄새가 났다.
李祭夏씨는 『평창동에서 카페를 운영하다가 집주인이 느닷없이 가게를 비워 달라는 바람에 지난 3월에 대학로로 옮겨 왔다』고 했다.
―이상문학상 수상자인 노년의 소설가가 카페를 운영하는 걸 보니 이색적이면서 낭만적으로 생각됩니다.
" 낭만은 무슨, 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거지. 도배해 달라면 도배해 주고, 구들장 놔 달라면 구들장 놔 주면서 먹고살기 위해 이것저것 하는 거죠" 그는 서울 신촌에서 1973년부터 3년간 「까치다방」을 운영했다. 첫 창작집을 냈지만, 수입이 없어 생활의 방편으로 했던 일이다.
李祭夏씨는 지금까지 단편집과 장편을 합쳐 모두 7권의 소설집을 냈다. 뿐만 아니라 시집 2권, 동화책 2권, 소묘집 1권, 영화칼럼집 2권, 가요 CD 한 장을 발표했다. 그림 전시회를 세 차례 열었다. 소설가·詩人·동화작가·영화칼럼니스트·화가·가수 등 광범위한 활동영역 때문에 그에게는 「전방위 예술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98년에 낸 CD에 담긴 12곡 중 9곡을 직접 만들었으니, 작곡가·작사가도 「전방위」에 포함시켜야 한다.
소설이 本業
▲ 李祭夏씨는 인터넷을 자유자재로 누비며 새로운 일을 도모한다.
―많은 일을 하셨는데,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게 좋은가요.
『소설가지 뭐, 소설로 공인받았으니. 詩나 동화는 그런 게 있다는 정도죠. 시단에서 나를 본격적인 詩人 대열에 끼워 주지 않아요. 그저 이 사람이 詩도 썼다, 시집도 있다, 그런 정도죠. 소설 작품이 가장 많으니 그게 본업이죠』
―한 사람이 많은 재능을 갖기 힘든 일인데, 무슨 비법이 있나요.
『재주 많아서가 아니라 먹고살려고 한 일이지. 나는 재주라는 걸 믿지 않아요.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있을 수 없어요. 그리고 싶어 흔적 남기는 게 그림이죠. 완성된 작품 틀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이 나이에 깨달았어요.
소설도 「쓰고 싶어 썼나, 거기에 전부 투여했나」가 중요합니다. 소설의 구조는 간단하고 거의 똑같아요. 「얼마나 진심을 갖고 표현하고 전력을 다했나, 고통한 흔적이 있느냐」가 중요하죠.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넣거나 원하지 않는 키스신을 넣거나 하는 건 금방 보여요. 좋은 소설이 아니죠. 얼마나 부벼 댔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를 하는 사람은 한 가지를 잘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李祭夏씨는 이상 문학상·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한 정상의 소설가다. 1999년에는 시집 「빈 들판」으로 편운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분야에서 「끼」를 발산했다. 1937년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할 즈음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객지를 떠도느라 3~4년 만에 한 번씩 집에 들렀다. 2代 독자로 두 누나의 사랑을 받으며 응석받이로 자란 그는 「낯선 사람」인 아버지가 늘 무서웠다고 한다.
『다들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조금씩 갖고 있죠. 네 살 때 일인데, 성격이 불 같은 아버지가 내가 울음을 안 그치니까 개수물통에 던져 버렸어요. 대나무로 만든 통으로 물은 깊지 않았어요. 그때부터 아버지가 무서워서 겸상을 할 때 눈을 꼭 감고 밥을 먹었어요. 「외디푸스 콤플렉스」가 심화된 계기였죠.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문학과 인생에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 같아요』
광복되던 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고, 이듬해 마산으로 이사 갔다. 학교에서 손수 만화책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 모두들 좋아했다. 그게 즐거워 계속 만화를 그렸다. 책 가장자리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을 한 장씩 그려서 친구들 앞에서 책을 휘리릭 넘기는 장난도 했다. 그러면 사람이 진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만화영화 기법을 깨닫고 그런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그게 나중에 영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을 거라고 그는 짐작했다. 6학년 때는 안중근 의사 만화를 그려 교내 미술대회에서 특선을 하기도 했다.
6·25 전쟁 나던 해 중학교에 들어갔는데, 마산에서는 실제로 전쟁은 없었지만, 멀리서 포성이 울리고 피란민들이 모여들어 전쟁을 간접 체험했다고 한다. 전쟁 중에도 대구에서 「학원」이라는 잡지가 발행되었다. 「학원」에 산문을 보내기만 하면 독자투고란에 실렸다. 마산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李祭夏는 文才(문재)를 날리기 시작한다.
고교 시절에 만난 文學의 大家들
『마산동중학교의 이상철 교장선생님은 문학을 숭상하던 분이에요. 그래서 피란 와 있던 유명 문인들을 우리 학교에 교사로 많이 영입했어요』
金春洙(김춘수)·金相沃(김상옥) 등 토박이 詩人들과, 피란 온 金南祚(김남조)·李元燮(이원섭) 작가가 마산高에서 교편을 잡았다.
『金南祚 선생님은 굉장히 가늘고 예뻤어요. 책보를 들고 치마저고리 입은 모습으로 하늘하늘 교문에 들어서면 학생들이 다 껌뻑 넘어갔죠. 선생님들이 세계 명작을 통해 아름다움과 영혼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들의 문학 열정을 일깨운 거죠. 그때 콤플렉스와 힘든 환경을 벗어나는 길은 예술밖에 없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던 것 같아요』
당시 「학원」 잡지는 10만 부가 판매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제1회 학원문학상에서 李祭夏는 詩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전까지 늘 산문만 투고하다가 처음으로 詩를 투고했는데 朴木月(박목월)·趙芝薰(조지훈) 선생 눈에 든 것이다.
고등학교 때 쓴 詩가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학원문학상은 계속 번창하여 우리나라 문인 가운데 300여 명이 그 관문을 통과했다. 당선 詩 「청솔 그늘에 앉아」는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을 지낸 劉庚煥(유경환) 시인으로부터 편지를 받고 쓴 작품이다.
『내 산문이 「학원」에 자주 실리니까 서울 경복고등학교에 다니는 劉庚煥이 나에게 친구가 되자며 편지를 했어요. 마산은 그때 인구 2만 명의 시골이었죠. 劉庚煥은 「학원」의 사진소설 모델을 해서 얼굴을 알고 있었어요. 서울에 사는 아이가 친구하자니까 흥분됐죠』
「청솔 그늘에 앉아」는 열일곱 살 소년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서울 친구의 편지를 읽는다/보랏빛 노을을 가슴에 안았다고 해도 좋아/혹은 하얀 햇볕 깔린/어느 도서관 뒤뜰이라고 해도 좋아/당신의 깨끗한 손을 잡고/아늑한 얘기가 하고 싶어/아니 그냥 당신의 그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마구 눈물을 글썽이고 싶어/아아 밀물처럼 온몸을 스며 흐르는/피곤하고 피곤한 그리움이여/청솔 푸른 그늘에 앉아 서울친구의 편지를 읽는다〉
이 詩는 1960년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려 학생들에게 널리 읽혔다.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나 봅니다. 처음 쓴 詩가 당선되고 국어책에까지 실린 걸 보면.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고독한 심사의 탈출구가 글밖에 없었죠. 작품을 보내면 실어 주니 재미있어서 한 거지』
하루에 팬레터가 10여 통씩 서너 달 동안 끊이지 않고 왔다. 李祭夏씨는 『황금기가 빨리 왔다가 지나갔지』라며 허허 웃었다. 195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새벗」에 동화 「수정구슬」까지 당선되어 마산 학생들 사이에서 李祭夏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글을 잘 썼는데 홍익대학교 조각과로 진학하신 이유는 뭔가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전교에서 수석을 했는데, 고등학교 때 성적이 형편없었죠. 문학병이 들어서 공부를 안 했으니까. 성적이 안 되어서 국문과에 갈 수도 없었지만, 옛날 문학을 가르치는 국문과는 따분해서 가고 싶지 않았어요. 미술대학은 학과성적이 좀 떨어져도 갈 수 있는데다 미술을 전공하면 글 쓰는 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화 그리고 그림책 보던 실력으로 데생을 했는데 합격했어요』
미술대학 다닐 때 詩와 소설로 등단
▲ 1961년, 24세 때 李祭夏씨의 모습.
미술대학 1학년 때 바로 詩와 소설로 등단했다. 1957년에 「신태양」에 소설 「황색 강아지」가 당선되었고, 1957년부터 1958년까지 「현대문학」에 詩를 투고하여 서정주 선생의 추천을 받았다. 1958년에는 「소설계」에 「나팔산조」라는 소설을 응모했다.
상금이 당시 집 한 채 값이어서 응모작이 세 트럭 반이나 되었다. 결과는 李祭夏씨의 준당선작이 되었다. 잡지사에서 상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당선작 없이 상금의 반액만 주는 준당선작을 낸 것이다.
『그때 150만원을 받았어요. 친구들이 한턱 얻어먹겠다고 명동의 「돌체」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 갔다가는 상금을 다 날릴 것 같아서 바로 마산으로 내려갔죠. 어릴 때 무서워했던 아버지께 상금을 모두 드리고 그동안 미워했던 죄책감을 씻었죠』
1961년에는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손」이 입선되었다.
―한번 등단한 뒤에도 여기저기 응모를 많이 하신 이유가 뭔가요.
『뭔가 표출하고 싶고, 풀어야 하는데 풀 만한 대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조각과 학생이었던 그는 2학년까지 학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정도로 학교생활에 충실하지 못했다. 토르소를 만들 때 마지막에 헝겊을 씌우고 물을 뿌려야 하는데, 귀찮아서 물을 안 뿌리는 바람에 다음날 갈라지곤 했다.
하숙비로 술을 사 마시고 찬 방에서 자면서 몸을 혹사했다가 좌골신경통에 걸리고 말았다. 4학년 1학기를 마치고 여름방학에 마산 집에 갔다가 꼼짝없이 방에 드러눕고 말았다. 하필 그럴 때 軍 입대 영장이 나왔다.
『나는 2代 독자라서 미리 신청했으면 6개월 만에 제대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온갖 약을 써도 낫지 않는 몸을 질질 끌고 입대했어요. 처음 훈련받을 때 거의 기어서 내무반으로 돌아왔지요. 두 달 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했더니 병이 다 낫더군요. 원래 좌골신경통이 혈행장애 신경통입니다. 군대에서 2代 독자라고 신고해서 1년 6개월 만에 제대했죠』
제대 후 조각을 하면 몸이 다시 안 좋아질 것 같아 서양화과 3학년으로 轉科(전과)했다. 미술대학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글 쓰는 일에 열중했다. 대학은 5년을 다녔지만 열심히 하지 않은데다 연애사건에 휘말려 미술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매일 명동 「갈채」에 문인들 구경하러 다녔죠. 거기에 金東里(김동리)·趙演鉉(조연현) 선생 같은 원로들부터 20代 文靑까지 다 모여들었어요. 미술대학 졸업장이 있었더라면 내 인생이 바뀌었을지 모르지. 유명화가인 南天 宋壽南(남천 송수남)이 대학 동기예요』
詩는 20代에 끝난다
▲ 윗줄 맨 왼쪽의 이제하씨 옆으로 서영은, (한 사람 건너) 김채원, 최정희 작가(1983년).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걸 후회하십니까.
『그때 좀 약게 했으면 됐을 텐데, 포기해서 고생을 사서한 거죠. 하지만 이게 (소설의) 소재가 되니까 뭔가 겪으면 재산이 불어난다는 본능이 있어요. 정식 교수로 생활 걱정이 없는 文人도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작품활동에 몰두하지 못합니다. 생활이 안정되면 나태를 불러오지요』
李祭夏씨는 1964년부터 成贊慶(성찬경)·朴在森(박재삼)·朴喜璡(박희진)·具滋雲(구자운) 등의 詩人이 주재하던 「60년대 사화집」 동인으로 참여하여 詩를 썼다.
『30代 중반을 넘자 정서적으로 고갈이 되어 詩 쓰는 일은 중단하게 되었죠. 천부적 詩人이 아니라면 詩는 대개 20代에 끝납니다』
그 후부터 소설을 주로 발표하게 되었다. 1966년에 신아일보에 연작동화를 연재하고, 1967년에는 신문이나 잡지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활동으로 질시받아
▲ 1981년 딸과 함께.
―그때부터 동화와 삽화를 그리는 등 외도를 하셨죠.
『文人들이 정말 각박하게 살았어요. 지금은 무슨 일거리라도 있지만 그때는 속수무책이었죠. 문예지 지면이 없어서 일년에 한 편 발표하는 게 고작이었어요. 원고료도 「새 발의 피」였으니 도대체가 절망적이었죠. 글만 써서는 생계를 꾸려 갈 수 없었어요』
―직장생활을 한 적은 없나요.
『1978년에 「월간 髓想」(「월간 에세이」 전신)에서 반 년 동안 주간으로 일했고, 1979년에 미술학교 나왔다는 연줄로 화랑협회에서 만드는 「미술춘추」 잡지의 주간을 1년간 했죠. 그 외는 없어요』
잡지를 만든 경험이 소설 「광화사」의 소재가 되었고, 그 작품으로 1987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것에 대한 문단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외국에서는 그런 것에 신경 안 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장르를 넘나드는 사람을 흘겨보지요. 詩 쓰고 그림 그리는 金榮泰(김영태)가 홍익大 서양화과 동창이에요. 대학 때 知己(지기)를 만나서 서로 교실에 편지도 남겨 놓고 그랬죠. 질시하든 말든 내가 살아야 되니까…』
李祭夏씨는 지난 5월 문예진흥원의 지원으로 黃晳暎(황석영)·趙廷來(조정래)·黃東奎(황동규) 등의 작가들과 함께 독일에 다녀온 얘기를 했다. 우리나라는 올 10월 독일에서 열리는 프랑크푸르트 세계도서전시회의 주빈국이다.
『독일인들과 현지 교민들과 대화 시간을 가졌는데, 나에게 「여러 가지 한다는데 고통을 어떻게 헤쳐 나왔느냐」고 하더군요. 「고통을 참고 겪었으면 벌써 죽었을 거다. 작가란 남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사람이지, 자기 고통에 뒹굴면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도배도 하고 구들장도 놓게 되었다」고 얘기하니 모두들 박수를 치며 웃더군요』
―이것저것 했다면 결국 책이 안 팔렸다는 얘긴데, 독자가 어느 정도나 됩니까.
『내 책은 많이 나가야 2만 권, 보통 1만권에서 1만5000권밖에 안 나가요.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 그래요. 1973년에 첫 창작집 「초식」이 나왔을 때 넉 달 동안 베스트셀러에 올라가서 2만 부 정도 팔렸어요. 그때 1위가 崔仁浩(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이었어요. 崔仁浩씨 작품은 100만 부 팔렸고, 내 책은 도중하차했죠』
「초식」은 당시 민음사에서 발간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팔리는 대중소설과 원로들의 창작집 정도만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초식」은 自費(자비)로 책을 냈는데,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그때부터 출판사들이 순수창작물 단행본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환상적 리얼리즘 도입
▲ 카페「마리안느」에서 판매하는 도예품과 부채, 저서들. 도예품은 직접 만들고 부채에는 손수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소설 경향을 어떻게 보시나요.
『예전부터 회화적 이미지의 소설이 많아요. 너무 앞서갔지요. 요즘은 분단을 강조해 봐야 안 먹힙니다. 일본 적개심도 집단일 때는 먹히지만 개인적으로는 안 됩니다. 사이버 공간이 비주얼화를 지주 삼아 움직입니다. 요즘은 노래 가사도 디테일합니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식의 유장한 가사가 없어요.
지금이라면 내 소설이 먹혔을지 모르지만 너무 앞서갔죠. 내가 1973년에 「초식」을 발표하면서 「환상적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붙였어요. 미술 용어에 「빈 환상파」라는 게 있습니다. 거기서 따온 건데 비평가들이 「환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면서 비웃었어요. 얼마 후 마르케스가 「마술적 리얼리즘」을 들고 나오니까 그제야 잠잠하더군요』
그의 소설은 「환상적 리얼리즘」, 「광기의 미학」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문학평론가 박혜경씨는 李祭夏씨의 소설 「독충」이 발간되었을 때 『마치 뒤통수에 찬물을 끼얹듯이 그렇게 예기치 않은 순간에 독자들을 낯선 이물감의 한가운데로 내던지며, 일상적인 삶의 테두리에 길들여진 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이하고 부조리한 상황과 마주서게 한다』고 평했다.
―문단에서 순수소설이냐, 참여소설이냐를 놓고 다툼이 심했는데, 지금 어떤 상황입니까.
『1970년대 들어오면서 이념문학으로 뒤덮이면서 순수문학이 위축되었죠.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이념문학이 기가 죽기 시작하고 다시 순수문학이 머리를 들었어요. 1990년대에 여성작가들이 작품을 많이 발표했죠.
요즘은 20代 중반과 30代들이 소설을 쓰고 있는데, 만화세대여서 소설 패턴이 달라졌어요. 판타지 소설이 많은데 우리 코드로는 이해하기 힘들죠. 어떤 열쇠로 풀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바뀌었어요』
▲ 삽화「고양이, 사람, 말」이제하作.
민중·참여文學과의 불화
―제가 1980년대 말에 대학 다닐 때 운동권 소설과 노동 소설이 판을 치고 있었어요. 李선생님의 이상문학상 수상작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수업시간에 공부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작품 분석에 앞서서 『지금 이런 엄혹한 시기에 왜 참여소설이 아닌 작품을 공부하냐』며 학생들이 반발한 적이 있습니다.
『집단 마비가 되어서 우스꽝스런 시대였지. 1980년대 말 동구권이 망하자 그런 사람들이 공중에 떠버렸잖아. 나도 1980년대 초에 명동선언서 낭독할 때 참석했었어요. 그때 高銀(고은)씨는 잡혀가고, 黃晳暎(황석영)씨는 숨고, 白樂晴(백낙청)씨는 끌려가고 할 때였죠. 그런데 그 자리에 가보니 하는 꼴들이 이상해서 참여하지 않았어요. 외제 바바리 코트 깃을 세우고 얼마나 으스대는지들….
화가 나서 「너희들이 하는 리얼리즘과 다르게 써 보이겠다」고 하여 쓴 게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입니다. 리얼리즘 소설은 사건을 꼼꼼하게 기술하는데, 나는 시나리오 기법으로 쓰면서 리얼리즘에 초현실주의를 가미했지요』
당시 그는 이상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민중이라는 것이 어느 일부 계층의 전유물일 수는 없고, 콤플렉스 때문이건 실제 노동이 하기 싫어서건 민중을 전담해서 떠드는 특수계층도 있을 수 없으며, 내가 개체로서의 한 민중이기 때문에 그들의 등에 업힐 수는 없다』고 말해 파란을 일으켰다.
『당시 민중을 생각한다는 사람들이 가소롭게 느껴지더군요. 내가 보기에 진짜 민중을 생각한 사람은 박노해입니다. 고생하면서 터득한 저항이죠. 金芝河(김지하)씨는 진정성이 있어요. 그 외에는 민중을 등에 업은 특권층들이죠. 정말 민중이 되려면 노동자나 농부가 되어야죠. 현실에 뛰어들긴 싫고,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떠드는 걸 보고 뒤틀리더군요. 박노해·金芝河 이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은 지금 공중에 붕 떴어요. 작품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저항할 수도 없고…. 사실은 지금이 저항소설을 쓸 때입니다』
전부 밟는 건 빨갱이식 처신
―문단 내에 여러 단체가 있는데 어디 참여하십니까.
『섹터 만들어서 「와와!」 하고 공동발언하는 거 끔찍하게 싫어합니다. 혼자 純문학에 병처럼 파묻혀 있지요. 혼자 있으니 빤히 들여다보여요. 가짜들이 많아요. 개중에는 작품은 순수한데 휩쓸리는 사람들도 있어요.
서정주·김동리 같은 스승을 親日이니 보수니 하면서 매장하려는 사람들도 있어요. 스승을 밟으려는 사람들은 그래야 자신들이 드러나니 칼을 꽂는 거죠. 윤리적으로 용납이 안 돼요. 親日을 하여 오점을 남겼더라도 서정주 선생의 작품만 한 詩가 없어요. 김동리 선생이 우익이라고 해서 작품을 매도하면 안 됩니다. 「산하」나 「바위」 같은 작품은 저항적인 작품입니다. 작품은 인정해야지 전부 밟는 건 빨갱이식 처신이죠. 두 분은 큰 기둥입니다. 작품이 아닌 처신으로 욕하는 건 말초적이고 지엽적입니다. 그건 이념이 아니라 감정입니다. 그런 게 너무 싫어요』
―소설가협회는 가입하셨나요.
『文靑 때 가입하라고 해서 이름은 들어있어요. 「밤의 수첩」을 발간할 때 서문에 「개도 안 쳐다보는 文協」이라고 썼어요. 그것 때문에 또 말이 많았죠』
1974년에는 「초식」이 현대문학상 수상작이 되었다. 하지만 李祭夏씨는 당시 그 상을 거부했다. 『나눠먹기식 문학賞의 행태와 문단 어른들의 文協 선거 감투싸움에 환멸을 느껴서 수상을 거부하겠다』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편집장이던 金洙鳴(김수명)씨의 권유로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으나, 수상소감이 써지지 않아 결국 상을 받지 않았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보내 상도 받아 오고 상금도 받았는데, 나는 그것도 안 했어요. 상금은 받아도 됐는데(웃음)…. 지금 생각하면 참 고지식하게 살았지』
―살다 보면 남을 의식해야 할 일도 있지 않나요.
『무엇 때문에 의식해. 예술하는 사람이 남의 눈치 봐서는 안 돼요』
―저항소설을 쓴 일이 있습니까.
『「초식」이 朴正熙 대통령의 독재정치를 우화적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파워에 대한 혐오, 적대감이 그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한 거죠. 朴대통령은, 독재는 독선적이고 매도해야 하지만 경제 쪽으로는 공이 많아요. 양 단면이 같이 드러납니다. 우리 사회를 흑백논리로 재단하면 전부를 조망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선한 면, 악한 면, 우스운 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세계를 가난과 부자로 나누는 식은 안 됩니다. 단선적이고 단세포적으로 세상을 나누면 벽에 부딪히죠』
―문단에 친한 분들은 있나요.
『친한 사람이 없어요. 평론도 안 들여다봐요. 내 작품에 대해 金允植(김윤식)·金華榮(김화영)씨와 故人이 된 김현씨가 관심을 가졌죠.
내 작품은 거론도 잘 안 돼요. 어려우니까 비평가들이 꺼립니다. 회화적인 요소를 알고 정신분석에 능해야 해명되는 소설이 많아요. 무의식과 초현실주의를 아는 비평가가 별로 없어요. 접근이 어려우니까 몇 사람만 언급을 하고 그쳤죠』
여자친구가 많은 남자
그림이 빼곡한 자택에서(2002년).
문단에 친한 사람이 없다지만, 李祭夏씨 카페와 자택에 여성작가들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소설가 申京淑(신경숙)·김형경, 詩人 黃仁淑(황인숙)·조은·조윤희 등 여러 작가들이 종종 李祭夏씨 집에 모인다. 기자도 2년 전 그의 생일 모임에 한 번 갔는데, 30여 명의 여성작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주로 얘기를 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듣는 쪽이다.
―여성작가들과 친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나는 여자친구들이 많아요. 남자들은 「승진, 한턱 먹은 얘기, 한탕 할 얘기」 이 세 가지밖에 없어요. 나른하고 재미없지요. 여자들은 일상적인 사소한 얘기를 많이 해요. 나는 사회 돌아가는 걸 그들에게서 들어요. 내가 얘기를 들어줄 만한 상대라고 생각하는지 편하게 얘기들 해요. 원래 비슷한 나이끼리의 남녀가 만나면 긴장하는데 나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나에게 남의 얘기를 듣는 재능이 있나 봐요. 바깥 공기를 거기서 알지요』
환갑에 가수 데뷔
李祭夏씨는 1998년에 「빈 들판」이라는 CD를 발표했다. 총 10곡이 들어 있는데,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이라는 노래는 조영남씨가 리메이크하여 자신의 CD에 수록했다. 1998년이면 그가 환갑을 맞은 해이다.
―환갑의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시다니 굉장한 일 아닌가요.
『애들 장난에 말려든 거야. 1980년대 중반부터 코드 열댓 개 익혀서 놀러가면 기타 치고 노래하곤 했어요. 내가 자주 가는 카페 「나무요일」에 오는 사람들이 내 환갑에 CD를 선물하자며 돈을 모았나 봐요.
이미 만들어 놓은 몇 곡에다 부랴부랴 몇 개 더 만들어서 녹음한 거죠. 「나무요일」 주인의 친구인 「동물원」 멤버 유준열씨 녹음 스튜디오에서 댓바람에 만든 거죠. CD가 나온 뒤 100명 정도 모인 자리에서 콘서트도 했어요』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1987년에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그때 주제가인 「빈 들판」을 그가 만들고 노래했다. 장난 삼아 흥얼거린 걸 녹음했다가 채보해서 노래를 만드는 정도라고 했다.
―남들은 어렵게 해도 안 되는데 선생님은 「장난 삼아」, 「먹고살려고」 하면 다 되는 게 신기하네요.
『애들 장난에 말려들어 끼가 발동한 건데 뭐. 자꾸 또 내자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담배 끊고 몇 달 목소리 가다듬어야 하는데… 제도권에 직장이 없으니 뭐하면서 소일할까 하는 식으로 하다 보니 노래도 만든 거지 뭐』
「빈 들판」은 그냥 아는 사람들끼리 나눠갖기 위해 500장을 만들었다가 「나무출판사」에서 제작하여 시집과 함께 발매했다. 지금까지 모두 1만5000장이 팔렸다. 그는 회갑 때 「질주」라는 작품집을 김채원·구효서·윤대녕·최승호·김혜순·황인숙·장석남·허수경·조은·이진명 작가 등으로부터 헌정받았다.
영화칼럼은 소설쓰기가 지겨워서 시작했다고 한다.
『1990년대 초에 내가 비디오를 모은다는 소문이 났는지 한국일보에서 영화칼럼을 쓰라고 하더군요. 소설보다 쓰기 쉬우니까 쓴 거죠. 3년 동안 매주 한 편씩 신문에 낸 걸 모아서 영화칼럼집을 두 권 냈죠』
충무로 지하상가에서 희귀영화 LD를 사서 본 다음 비디오로 복사를 한 게 1500개나 되었다. 1500개를 처분한 뒤 다시 모은 게 1300개에 이른다. 토요일이면 카페에서 영화감상회가 열리기도 한다.
1990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서울예술大, 명지大, 추계예술大를 거쳐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드라마 쓰기, 작가연구, 글쓰기 등을 가르친다. 대학 강의 역시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라고 했다.
도예와 글자체 만드는 일에 도전
李祭夏씨의 길손체. 폰트화를 추진하고 있다.
요즘 그는 그림을 직접 그린 도자기를 구워 카페에서 팔고 있다.
『주방에 가마를 하나 설치했어요. 팔기도 하고 선물로 주기도 하고. 부채를 자꾸 그려 달라며 10만원을 갖고 온 사람이 있어서 부채에도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이것도 다 먹고사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해서 하는 거지(웃음)』
李祭夏씨는 1982년과 1994년에 개인전을 열었고, 1998년에는 詩人 김영태씨와 2인전을 개최했다. 올 9월쯤 카페를 전시회장처럼 꾸며 그림전시회를 열 계획이라고 한다.
―일을 정말 많이 하시는데 지금 재산이 얼마나 되나요.
『재산(웃음)? 「마리안느」밖에 없지. 집도 없어요. 「마리안느」가 잘 되면 나도 사는 거고, 「마리안느」가 망하면 나도 망하는 거고…. 그러니까 손님들 좀 많이 오라고 해요』
곧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도 하고, 토요명화 감상회도 계속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는 토요일이면 「마리안느」에서 그림 개인지도와 글쓰기 지도도 하고 있다.
요즘 그는 또다시 새로운 분야에 손을 댔다. 자신의 글씨를 인터넷에서 폰트화 하려는 작업이다. 李祭夏씨의 인터넷 아이디 「길손」을 따서 「길손체」로 명명한 글씨는 이미 북디자인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1990년 초부터 50여 권의 북디자인을 하면서 길손체로 표지를 만들었다. 자신의 책은 거의 대부분 자신이 디자인하는 그는 하덕규·박인희씨의 시집 표지도 길손체로 장식했다.
길손체가 일반으로부터 주목받은 것은 자주 찾는 인터넷 사이트(poowa.com)에 직접 쓴 연하장을 올리면서부터다. 글자가 예쁘다며 네티즌들로부터 폰트로 만들어서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현재 폰트화하기 위한 작업이 거의 끝난 상태인데, 한글의 경우 자음과 모음을 써서 조립한 게 아니라 2780자를 일일이 다 썼다.
『자음과 모음을 기계적으로 조합하면 제대로 맛이 안 나서 고생스럽지만 다 썼어요. 한자는 3800字를 넣을 계획인데 현재 반 정도 썼습니다. 단순히 본문으로만 쓰려는 게 아니라 책 표지 등에 쓸 수 있는 題字用(제자용)으로 만들기 위해 작업을 한 거죠. 몇몇 업체와 폰트화를 논의하고 있어요. 길손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서예전을 곧 열 계획입니다』
李祭夏씨는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폰트가 있지만 예쁜 게 별로 없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이철수 체」가 예쁘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일을 하면서 즐겁게 살아 스트레스가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트레스가 많아요. 문학병·예술병에 걸려 내 욕심만 추구하고, 하고 싶은 대로 살다 보니 정상적으로 거두어야 할 것을 못 거두었다는 회한이 있지요. 일종의 패배자일 수도 있죠. 그럴 수밖에 없어서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 그렇게 살겠죠. 하지만 자식으로서, 家長으로서 역할을 충실히 못 한 게 안타깝죠. 돌이켜보면 이기적인 삶을 살았어요. 중학교 때 걸린 문학병 때문입니다』
마리안느를 좋아하는 영원한 청춘
2000년에 발간한 「독충」은 15년 만에 독자들에게 선보인 작품집이다. 「문학동네」에서 소설전집 12권을 내기로 계약한 뒤 6권밖에 못 냈다고 한다.
남성작가들은 다 서리맞았고, 1990년대에 잘 팔리던 여성작가들까지 책이 안 팔린다고 걱정했다.
―책이 안 팔리면 소설가들은, 앞으로 소설가가 되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독자가 없으면 문학은 죽어요. 네티즌들이 쓰는 말을 문학언어로 바꿔야 합니다. 요즘 애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탓하지 말고 다가갈 방법을 생각해야지요. 겪지 않은 세대에게 역사의 비극을 강조해도 소용없어요. 현대는 미래적인 환상과 비주얼을 갖고 살아갑니다. 우리나라 문학은 심각한 강박관념에 몰려 있어요. 너무 어깨에 힘을 줍니다. 일본은 아주 디테일한 문제를 다루고 있어요』
―제도권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양한 일을 하고 산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혼자서 먹고살아야 하니 기운 차리고 살았지. 필사적으로 먹고살 짓을 했지』
―결국 그게 삶의 에너지가 되었네요.
『좋은 거지. 먹고살려고 하면 속이 편한데, 난 예술가입네 작가입네 화가입네 나서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나는 유한계급들을 안 믿어요. 살아 있는 동안 노력해서 먹고살아야죠』
―아웃사이더로 산 것에 후회는 없습니까.
『기분 좋지 뭐. 소속되고 편입되는 거 끔찍하게 싫어하니. 가난했지만 유유자적했으니…』
문득 카페 이름을 왜 「마리안느」로 지었는지 궁금했다.
『영국 가수 마리안느 페이스풀 이름에서 따왔어요. 롤링 스톤스의 리드보컬 믹 재거와 열애에 빠지며 섹스와 마약을 탐닉했었죠. 폐인이 된 후 재기하였을 때 목소리가 아주 매력적인 허스키로 바뀌었어요. 삶과 목소리가 인상적이고 마리안느라는 이름이 어감이 좋았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내 청춘 마리안느」라는 영화가 크게 히트를 했는데, 그 여주인공도 멋있어서 그렇게 정했죠』
허스키한 목소리로 설명하는 그가 바로 「아직 청춘인 마리안느」라고 생각되었다. [출처 : 월간조선 2005 8월호]
안녕.. 나는새..
천부적인 재능은
마치도 자루속에 든 송곳과 같아서
누군가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합니다.
어느 한 시대에 속하지 않고
어느 한 부류에도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단아처럼 터부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꼭 어딘가 귀결점이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듯요.
그러든 저러든
남아서 살아가는 모습뒤로
너무 측측하고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았음 합니다.
전..
좀 그렇습니다.
틀을 벗어나지도 못하면서
그런 모습들에 무척 후하니 말입니다.
바람이
시원한 밤입니다.
편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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