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사라지고 땅위에서는 볼 수도 없는 숭례문! 1782년은 다산의 나이 21세로 덩실하게 솟아오른 숭례문 곁에 처음으로 서울집을 마련하여 기쁘고 즐겁게 살아갔는데, 꼭 226년 전의 일입니다. 임진왜란·병자호란·한국전쟁과 같은 전쟁의 화마 속에서도 의연하게 살아남았던 숭례문은 이제는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불행이 21세기의 개명한 서울의 한 복판에서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15세에 서울의 회현방(오늘의 회현동)에 살던 16세의 풍산홍씨 가문 처녀에게 장가든 다산은 그때부터 서울생활을 시작합니다. 물론 때때로 고향인 마재를 찾았던 것이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해는 바로 52년 동안 재위에 있던 영조가 붕어하고 25세의 정조가 보위에 올라 정권과 권력의 이동기이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다산의 아버지도 새롭게 다시 벼슬길에 오르자 지금의 명동 근방인 명례방에서 다산은 아버지와 함께 살기도 했습니다.
집을 마련하지 못해 이곳저곳으로 이사 다니던 다산은 마침내 21세인 그때에야 숭례문 안의 창동(倉洞 : 지금은 남창동·북창동으로 나뉨)에 집을 장만해 ‘체천정사( 泉精舍)’라는 이름을 짓고 모처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무렵의 다산시를 읽어보면 오랫동안 자신의 집을 마련하기 원하다가 서울의 관문인 남대문(숭례문)곁에 집을 마련한 것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봄날 체천의 잡시(雜詩)’라는 제목의 시에는, “숭례문 앞의 저자가 새벽부터 열리네”(崇禮門前市曉開)라고 읊으면서 이른바 지금도 남아있는 ‘남대문시장’이 그때부터 열리고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집은 샘이 두 개가 나란히 있어 ‘형제샘’이라 불렀는데 형제를 뜻하는 ‘체( )’를 빌려다가 ‘체천’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제는 ‘체천’이 어디인가야 진즉부터 알 수 없지만, 숭례문조차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말아 다산이 살아계셔도 찾을 수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영어몰입교육이다, 실용주의다, 운하 뚫는다, 경제면 최고다, 온통 세상이 시끄럽기만 하더니 국가가 국보1호도 보전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산이 살아생전 곁에서 살아가면서 우러러보던 숭례문, 이제는 그 원형은 영원히 사라졌으니 오호 통재, 오호 애재로다.
이런 야만의 나라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지하에 계신 다산이여! 우리에게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소서.
-박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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