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인터넷 조선일보에 전재된 주사파 운동권으로 활동하다 북한의 실상을 접한 뒤 전향한 홍진표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의 체험적 수기를 읽으며, 우리가 살아온 역사의 편린이라 여겨 여기에 전재하고자합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의 정신세계, 사상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획일화 시켜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1985년, 내가 학내시위 참여로 인해 강제징집 당해 군대에 갔다온 후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기거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큰아버지는 나를 불렀다. 큰아버지는 “이 집이 사회주의 혁명의 거점이 되도록 놓아둘 수 없다”고 역정을 내며 바로 짐을 싸도록 하였다.
제대 후 당시 학생운동 내에서 널리 읽히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당의 두 가지 전술’,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와 같은 유인물을 갖고 있다가 들킨 것이다. 당시 내가 순수하게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큰아버지는 사회주의를 추구하고 있는 조카의 정체를 알고 나서 사실상 절연(絶緣)을 선언한 것이다.
필자는 1982년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하여 그 해 4월 지하이념서클에 가입하였다. 처음에는 이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 박현채의 ‘민족경제론’과 같은 입문서를 읽고 토론을 했는데, 여름방학 합숙 때부터 ‘자본주의 구조의 발전’이라는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일본서적을 보기 시작했다.
그 후 1983년에 강제징집으로 학교를 떠나 직접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1984년에 이르면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비롯하여 레닌, 마오쩌둥의 저작들을 운동권의 교과서로 채택하게 된다.
1985년에 제대했지만 나는 복학을 포기한 채 노동현장에 들어갈 결심을 하였다. 나는 뜻이 맞는 선·후배들과 모여 위장취업 준비를 시작했다. 이미 주체사상파(이하 주사파)가 등장한 이후라 이른바 노선투쟁이 치열한 상태여서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할지 참으로 난감하였다. 결국 주사파(主思派)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우선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를 주장하는 PD(민중민주)계열이 북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없거나 정통에서 일탈한 집단으로 보는 점이 내키지 않았다. 두 번째로는 당시 개헌문제를 둘러싸고 PD계열이 ‘제헌의회’라는 급진적 주장을 내건 반면 주사파들은 야당과 연대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자는 매우 현실적 주장을 펴는 것에 큰 매력을 느꼈다.
그 후 북한의 대남방송인 ‘구국의 소리’를 듣고 녹취해서 돌려보다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어 1년을 복역하는 바람에 노동현장으로 가겠다는 계획은 유보될 수밖에 없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잠시 학생운동에 복귀하여 서울대총학생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다가 다시 집시법으로 투옥되었고, 출소 후 한겨레사회연구소를 거쳐 1990년부터 김근태(金槿泰), 이부영(李富榮), 장기표(張琪杓)씨 등이 주도하던 전민련(全民聯)에서 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재야단체의 통일운동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때 주사파의 대부(代父)로 알려진 김영환씨를 만나 반제청년동맹이라는 주사파 지하조직에 가입하였고, 이 조직이 민족민주혁명당으로 개편되면서 계속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 말 구소련 동구의 붕괴를 거치면서 구소련을 모델로 삼았던 PD계열은 물론이고 주사파 내에서도 대거 운동권을 떠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金大中)씨가 패배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접고 사법시험에 도전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마치 침몰하는 배에서 앞다투어 뛰어내리는 그런 분위기였다.
나는 김일성(金日成)이 주장했다는 ‘모스크바에 비가 오는데 왜 평양에서 우산을 쓰는가?(소련은 망했지만 북한은 건재하다)’라는 북한 건재론을 의지 삼아 신념을 유지해 나가려고 애썼다. 특히 1994년 여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한 조기붕괴설이 유행하자 주사파를 비롯한 운동권 잔류자들에 대한 주위의 시선도 매우 냉랭해졌다. 한때 고교동문회에 가면 동창들이 진심으로 미안해하면서 격려했던 분위기도, 이 시기에는 아직도 운동권에 남아있다는 것을 한심해하는 기류로 바뀌어갔다.
솔직히 나는 당시 냉랭한 주변 시선은 담담하게 견디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갈등은 북한 때문에 시작되었다. 1991년에 전민련 주도로 남북해외 공동조직으로 만들어 놓은 범민련(현재도 존재)이 당국의 계속되는 탄압으로 활동 불능상태에 빠졌고, 고 문익환(文益煥) 목사를 중심으로 합법성을 강화하는 개편이 시도되었다.
범민련 결성 과정부터 실무에 관여해온 나 또한 개편노선을 지지하였는데, 정작 북한이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북한은 단순한 반대에 머무르지 않고 특히 한총련이 이를 반대하도록 노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처음엔 북한의 대남(對南) 실무자들이 일시적으로 판단착오를 하는 것이라고 좋게 해석해보려고 했으나, 수년에 걸쳐 북한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 것을 목격하면서 결국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범민련은 생전에 김일성이 관심이 많았던 조직이기 때문에 북한은 이른바 수령(首領) 절대주의에 입각해 그 고수를 고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직 북한 정권과 체제에 대한 신뢰 하나로 운동의 동력을 삼던 나에게 북한의 지독한 비합리성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1995년에 이르자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이 외부에 알려지고, 탈북자들이 대거 발생하면서 그들의 증언이 쏟아져 나왔다. 통일운동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고 있었지만 처음엔 탈북자들이 말하는 정치범수용소나 기아사태에 대해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두 사람이 아닌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이 대부분 일관되고 일치한다는 사실을 결국 부인할 도리가 없었다.
1996년에 이르러 나는 마침내 큰 결단을 내리고 충분히 내부에서 토론 가능하다고 믿고 운동권의 필독서였던 월간 ‘말’지에 북한에 대해서 다시 보아야 한다는 글을 실명으로 기고하였다. 그러나 이 글이 실리자 곧바로 변절자라는 돌이 사방에서 날아왔고 운동권을 떠나라는 삿대질을 접하게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이 사건을 통해 남한 운동권에 대한 북한의 막강한 영향력을 절실히 체험할 수 있었다. 이미 북한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성역(聖域)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자의 반 타의 반 15년에 걸친 운동권 생활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청춘의 꽤 긴 시간이 잘못된 삶이었다는 자책(自責)에 수개월 동안 불면(不眠)과 좌절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고 이미 생각을 바꾸고 있던 김영환씨 등과 합류하여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하여 주체사상이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는지 체계적인 비판작업을 시작했고, 이 시대 진정한 진보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탐구의 노력을 했다. 1년 이상의 탐구를 거쳐 얻은 결론을 중심으로 ‘시대정신’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고, ‘북한민주화네트워크’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아왔다. 당연한 호기심이겠지만, 무언가 설명이 필요하다는 현실이 때로는 답답해진다. 구소련과 동유럽이 붕괴되고, 북한 체제가 사실상 파산한 이 마당에 좌파(左派)사상을 아직도 갖고 있는 것이 오히려 이색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특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일찌감치 운동권을 떠나 사회에 편입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른바 ‘전향(轉向)’에 대해 보이는 반발감이다. 운동권이 옳은 것이었다고 생각했다면 왜 그들은 떠나게 되었는지 반대로 묻고 싶다. 이런 이중성(二重性)의 이면에는 운동권 경력이 일종의 기득권이 되어버린 현실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97년 대선에서 DJ가 당선되면서 선보였던 대북 포용정책과 민주화경력 우대정책은 주사파들의 친북반미(親北反美) 주장을 정당화시켜 주었고, 좌파 사상을 비판적으로 돌아볼 기회를 박탈해버렸다.
최근 자유주의연대가 발족되어 386세대의 자기성찰을 촉구하자 이른바 색깔론이라는 시비를 비롯하여 우익된 것이 자랑이냐는 비아냥거림도 들린다. 현재 집권세력에 참여하고 있는 386들의 다수는 이미 과거의 좌파사상에서 많이 벗어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도 이미 현실이 사회주의혁명을 꿈꾸거나 북한 주도의 통일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좌파이념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은 애써 부인하려고 한다.
1980년대에 386들이 좌파운동을 할 때는 비록 잘못된 이념이었지만 그나마 사회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구상과 열정이라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사회적 주류가 되어버린 지금의 386들에게는 정치적 기득권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세속적 관심만이 발견된다. 민주화운동 경력을 부각시키고자 건국과 산업화를 주도했던 세력들을 폄하하고, 편가르기에만 정력을 쏟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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