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범하(凡下) 이돈명(李敦明) 변호사가 회갑을 맞이한 것은 1982년 10월이었다. 이돈명 변호사는 1972년 유신정변이래 민주인사들에 대한 헌신적인 변론활동을 해온 인권변호사그룹의 맏형격이었다. 엄혹했던 긴조(긴급조치)시대를 거쳐 국보(국가보안법)시대에 그는 항상 법정의 피고인 곁에 있었다. 바로 그때도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나는 그때 두레출판사를 운영하던 조선투위의 정태기(鄭泰基)와 회갑을 맞는 이돈명 변호사를 위해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궁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모두의 감사의 뜻을 담아 회갑문집을 간행·봉정해드리자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이심전심으로 그 뜻이 통해져 크게 애먹지 않고, 「범아 이돈명선생회갑기념문집」을 간행할 수 있었다. 이는 물론 그 뜻에 동감하고 때맞추어 글을 써주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자(題字)는 원주의 장일순(張壹淳)선생이 썼고, 연보(年譜)는 내가 작성했는데 해방 후 고시공부를 시작하기 전까지 쉬고 있던 시기를 ‘건달 생활을 하다’라고 적어, 한때 이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이 책은 「역사와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보급판까지 냈다. 이돈명 변호사의 회갑문집이 간행되고 난 뒤 한참동안은 민주인사의 회갑문집의 간행과 봉정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어쨌든 이돈명 변호사의 회갑문집 간행은 내가 한 일 중에서는 그래도 잘한 일이었다고 생각되거니와, 뒤이어 여러분들의 회갑문집이 간행될 수 있었던 것 또한 민주화운동진영에서 있었던 ‘옛날 옛적 아름다운 이야기’로 남아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헤아려본다
회갑문집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때 나에게는 회갑이 멀고먼 뒷날의 일처럼 느껴졌고, 회갑 때쯤 되면 누구나 이돈명 변호사처럼 노성(老成)하는 줄 알았다. 실제로 회갑을 맞은 이돈명 변호사의 경륜과 지혜는 적어도 나의 눈에는 완숙의 경지에 있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모자라고 서툰 것이 너무도 많아 어린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 어느덧 내가 이돈명 변호사의 그때 그 연륜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나한테는 회갑문집을 만들어주는 사람은커녕 빈말이라도 축하해주는 사람조차 없었다. 이는 웃자고 하는 소리지 결코 억울하다고 하소연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보다 이순(耳順)하기는커녕, 아직도 탐·진·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 자신이 슬프고 더 미운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이를 넘기면서 이것저것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제까지는 민주화다 뭐다 하면서 세상에 끌려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는 멈추어서서 과연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헤아려보게끔 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삶이 오직 잘 살기위한 것이었다면, 앞으로 남은 생(生)은 잘 죽기위한 것이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하게 된다. 요컨대 앞으로 어떻게 남은 생을 살 것인가를 놓고 어쭙잖은 한자락 고민도 할 줄 알게 되었다.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최근 나는 아주 오랜 방황 끝에, 남아 있는 생에 지침이 될 수 있는 좋은 ‘말씀’ 하나를 찾아냈다. 이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사원에 묻힌 어느 성공회주교의 묘비명으로 쓰여져 있는 글이라고 한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 무한한 상상력을 가졌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마지막 시도로 나는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누가 아는가? 그러면 세상까지 변화했을지…”
글쓴이 / 김정남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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