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에 대한 우리의 의견

우리의 희망사항

지성유인식 2007. 3. 28. 18:01
 

김지하를 다시 생각한다.


“김지하보다 더 큰 울림으로 권위주의 정권을 비판한 진보는 몇 명 되지도 않을 것이다. 동시에 그 어떤 보수도 감히 ’죽음의 굿판‘이라고 운동권에 일갈하지 못했다. 늙은 시인 김지하는 이제 보수와 진보의 틀에서 벗어나라고 외치고 있다. …진보와 보수들이여, 이제는 그의 말에 귀 기울여 봄직도 하지 않은가.“


중앙일보 정책사회 데스크 김종혁이 ‘김지하를 다시 생가한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한 말이다. 김종학의 제안에 지지를 보낸다. 그렇지만 동시에 안타깝다. 김종혁이 몸 담고 있는 중앙일보는 보수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김지하 재평가’는 진보진영에서 나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럴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손학규 실천과의 큰 괴리


한나라당을 탈당한 전 경기지사 손학규를 만난 자리에서 김지하는 “내 스승인 장일순 선생과 그 스승인 여운형 선생, 백범 선생은 중도였다. 떳떳하고 당당한 중도의 길은 누군가 했으면 좋겠다는 게 내 꿈인데, 앞으로 명백한 중도개혁의 길을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지하는 소설가 황석영과 더불어 손학규의 탈당을 부추긴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그러나 김지하의 이론과 손학규의 실천 사이엔 큰 괴리가 있다. 손학규가 탈당을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을 욕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15년 먹던 우물에 침을 뱉을 수 있느냐는 정치도의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중도의 소명은 좌우를 존중하면서 통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좌우를 싸잡아 욕하면서 자신을 돋보이게 만들겠다는 건 적어도 김지하와 그 스승들이 원했던 중도의 길이 아니다.


손학규는 ‘무능 진보와 수구 보수를 뛰어 넘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만들기 위해선 양쪽을 공격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다수 국민이 이미 염증을 내고 있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의 확대재생산만을 불러올 뿐이다. 손학규 개인의 처지에서도 그렇게 공격해 대는 ‘수구 보수’의 늪에서 어떻게 15년 세월을 견뎌 냈느냐는 의문만 증폭시킬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 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우리 시대의 대북정책은 ‘햇빛정책’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같은데, 정치판의 모든 전략, 전술은 오로지 ‘바람정책’ 일변도이니 말이다. 언론이 크게 보도해 줄 걸 기대하는 언론플레이 효과에 중독된 게 아니라면, 경쟁세력을 극단적인 언어표현으로 공격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김지하는 손학규의 탈당에 대해 “고맙고 자랑스럽다”는 말만 한 게 아니라, 손학규의 실천이 자신의 중도 노선 정신에 충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하는 게 좋겠다. 자신의 손학규 지지가 서울대 운동권 인맥의 정실주의라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나는 김지하의 큰 그림이 한국의 나아갈 길을 제대로 읽고 있다는 점에서 지지를 보낸다. 손학규의 탈당에 대해서도 손학규가 권력 욕망을 자제하면서 원래의 목표를 제조명해 김지하식 중도 노선을 구현하는 ‘밀알’이 되고자 한다면, 지지를 보낼 사람들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 믿는다. 황석영이 1980년대를 언급하면서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은 급진화했다”고 일침을 가했듯이, 김지하․황석영는 자신들의 중도론을 비웃는 급진세력에 대해 발언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의 시대 또 열리길 기대


김지하를 다시 생각한다는 건 김지하가 너무 큰 그림에 몰두하는 나머지 방법론을 사소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에 대해 성찰을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16년 전 ‘죽음의 굿판’ 사건도 그가 매체 선택에서 신중을 기했더라면 전혀 다른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김지하의 입장에선 그런 고려까지 하는 게 조잡하게 느껴지겠지만,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요 우리의 현실인 걸 어찌하랴.


‘김지하의 시대’가 또 다시 열리길 기대한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강준만 칼럼(한국일보 2007.3.28 A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