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호에 대한 우리의 의견

안중근의사는 왜 이토 히로부미를 쏘았는가?

지성유인식 2007. 3. 27. 06:57
 

학교 세워 인재 양성하다 합법적 운동 한계 깨달아 [중앙일보]

의병전쟁 정신으로 `거사`(키워드로 푸는 역시 <9>)


1909년 10월 26일 아침, 초대 조선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특별열차로 만주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러시아 재무장관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토가 역 구내 플랫홈에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순간, 안중근은 이토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고, 7발의 총탄 가운데 3발이 명중했다. 저격을 받은 이토는 약 30분 후 사망했다. 당시 사용한 권총을 보관했던 상자가 최근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의해 공개됐다.


그로부터 꼭 다섯 달 뒤인 1910년 3월 26일, 일본이 지배하는 남만주의 일본 관동도독부 소속 뤼순(旅順) 감옥에 수감돼 있던 안중근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뜻을 기려 우리는 그를 의사로 부른다.


안 의사는 왜 이토를 쏘았을까. 안 의사의 이토 저격 사건은 우리 민족운동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됐다. 그는 옥중에서 쓴 전기 '안응칠 역사'를 통해 자신의 이력을 상세히 밝혔다. 안응칠은 그의 아명이다.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그는 동학 농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의외로 관군의 입장에서 농민군과 싸운 전력이 있다. 1895년 천주교에 입교해 신식 학문을 배웠고, 1904년엔 평양에서 석탄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06년경엔 삼흥(三興)학교 등을 세워 인재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그의 운명이 크게 바뀌는 것은 이듬해인 1907년 연해주로 망명해 의병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더 이상 합법적인 방법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조선 침략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안 의사가 이토를 사살하던 때까지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1907년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며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정미7조약을 이끈 일본의 수뇌가 이토 히로부미였다.


국운은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다.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유생.군인.농민 등이 국내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결국 안중근은 의병 전쟁의 연장선 상에서 민족의 적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던 것이다.


김현영(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