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남과 북으로 갈린 우리의 자화상

나는 새 2004. 8. 20. 09:22

「납북자 문제 해결을 위한 북한과의 적극적인 협의를 정부에 촉구하기 위한 "납북자가족회"에서 2002년 9월 중국을 거쳐 서울에 온 장복순(58)씨는 1968년 6월 조기잡이를 하다 납북된 부길호의 선원 김길오(당시 32세)씨와 북한에서 결혼해 살다 왔는데 장씨는 "북한에서 10년이나 '의거 입북자(납북자의 존재를 부인하는 북한에서 납북자가 자진 입북한 것처럼 표현하는 용어)'로 살던 남편이 백혈병으로 죽기 며칠 전에야 자신이 강제로 북에 끌려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며 "그 사람은 고향 땅에 너무나 가고 싶다며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한 채 세상을 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납북어부의 아내에서 탈북자로 떠돌아야 했던 그 동안의 고단한 삶 때문인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 김씨납북 뒤 3년간 평양에서 간첩교육을 받았으나 남파를 거부해 함북 청진의 자동차사업소에 배치되어 일하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78년 10월 남편이 숨지면서 "두 딸의 앞날을 위해 꼭 남조선으로 가라는 유언을 했어요." "남편이 숨을 거두며 '차라리 남파돼 자수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었다"고 말했다.

 

장씨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99년 9월 딸 현숙.인숙씨를 중국의 친척집에 몰래 내보냈고 두 딸은 1년반 뒤인 2001년 1월 한국에 들어왔다. 두 딸이 남한에서 자리 잡았다는 소식을 들은 장씨는 2001년 4월 중국으로 나왔지만 옌지(延吉)에서 중국 공안에 잡혀 강제 북송됐다. 장씨는 "조국을 배반했다는 이유로 모진 고초를 겪었지만 한국으로 가 딸을 만나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재탈출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서울생활은 장씨의 생각과 달리 심장과 신장이 망가진 데다 허리디스크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태로 악화돼 50m를 채 걷기 힘든 상황으로 지난달에는 시각장애 6급장애 판정을 받았으며, 영구임대아파트에서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게 주는 월 50여만원으로 살고 있는 상황에서 남편이 납북 된 뒤 간첩 집안으로 의심받는 바람에 떠돌이 생활을 하다 간염 증세가 악화된 남편의 남쪽 아들을 돌보아야 한다.」란 언론 기사를 접하였습니다.

 

이 글을 보며 전 우리의 자화상을 보았습니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남과 북에 이용당한 개인의 삶을 보았고, 가족의 남한 탈출및 본인의 탈출 실패로 강제북송된 이후에도 나름대로의 삶이 영위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교육 및 알고 있는 것들을 종합해 보면 북한에서의 삶은 아주 제한된 상태로 가족이 남한으로 탈출하거나 본인의 탈출이 실패할 경우 그 가족 등은 본보기로 처벌(?)할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데...

 

아무튼 우리는 이제 바야흐로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란 공감대가 넓혀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군요.  제28호 올림픽에 "Korea"란 국호로 공동 입장하고, 남한은 "ROK"가 아닌 "KOR"(Korea)로, 북한은 'DPRK"가 아닌 "PRK"(People's Republic of Korea) 를 국호로 하고 있으며, 북한에서 남한 단독의 'KOR"사용에 이의를 달지 않은 것에 우리 주목하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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