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항일 독립투쟁의 상징으로 사용된 나라 이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국내는 물론 중국 대륙과 간도, 연해주, 그리고 멀리는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서까지 우리의 선열들은 활발한 독립투쟁을 전개하였는데, 여기서도 독립선언서 등 각종 문서에 새로 독립할 조국의 나라 이름을 '대한(大韓)' 또는 '조선(朝鮮)'으로 사용하였고, 또한 국내에서의 만세 시위에서도 '대한독립 만세' 또는 '조선독립 만세'가 사용될 정도로 교통 통신이 불편하던 그 당시에도 '대한(大韓)'이라는 이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하여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져 나갔다.
3·1독립운동이 절정을 이룰 무렵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해 4월 10일에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의 개원 회의에서 국호는 '대한(大韓)'으로, 정체(政體)는 공화제를 의미하는 민국(民國)으로 각각 의결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대한민국(大韓民國)」의 탄생을 보게 된 것이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 헌장(臨時 憲章)을 제정하여 제1조에서「大韓民國(대한민국)은 民主共和制(민주공화국)로 함」이라고 천명함으로써 1945년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환국(還國)할 때까지 약 27년간 대한(大韓)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하게되었고, 이 대한의 독립을 위하여 수많은 애국 선열들이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러면, 임시의정원에서 의결된 국호 '大韓民國'은 누구의 제안에 따라 만들어진 이름일까? 이 흥미로운 의문점에 대하여 한 일간 신문의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그 대답에 가름하고자 한다.
「1919년 4월 10일 오후 10시 중국 상해(上海) 프랑스 조계(租界)의 김신부로(金神父路)에 있는 허름한 셋집에서 밤을 새워 열린 임시정부 첫 의정원(議政院 : 오늘날의 國會에 해당한다)의 가장 중요한 안건은 국호의 결정이었다. 참석 의원은 29명.
처음 '대한민국'이란 명칭을 제안한 사람은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으로 활약한 신석우(申錫雨 : 1894∼1953) 선생. 그러나 논란이 만만치 않았다. 여운형(呂運亨) 의원이 반대했다. "대한이란 말은 조선 왕조 말렵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자 신석우 의원이 되받았다. "大韓으로 망했으니 大韓으로 흥하자." 결국 표결에 부치기로 했고, 다수결로 오늘날의 '大韓民國' 국호가 채택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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