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주스 보단 샐러드가 낫다.
아프리카의 소국 「모리셔스」의 어느 추기경께서 말씀을 하신 것을 "현대사회와 리더쉽" 저자니며 원광대학교 행정학과 교수이신 박종구님의 강연을 통해 전해 들었는데 여러 과일을 갈아 만든 주스 보단 각각의 향을 살린 샐러드와 같은 모리셔스가 필요하다는 취지임
모리셔스
- 백과사전에서
인도양의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약 800km 지점, 마스카린 제도 중앙에 있는 독립된 섬나라.
개요
국기 |
지도 |
자연환경
모리셔스는 굴 모양의 화산섬으로 주변이 거의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다. 북부는 평원이며 중부로 가면 해발 270∼730m의 고원이 나타난다. 이 고원은 고대 화산의 가장자리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최고봉은 남서쪽에 있는 프티트리비에르누아르('작고 검은 강 봉우리'라는 뜻. 820m) 산이다. 2개의 대표적인 강, 즉 그랜드리버사우스이스트 강(약 40km)과 그랜드리버노스웨스트 강은 동부와 중서부에서 흘러나온 물을 인도양으로 흘려보내며, 수력발전의 주요동력원이기도 하다. 마르오바코아는 대표적 저수지의 하나로 중요한 급수원 역할을 한다. 고원의 그랜드 분지와 몇몇 인공호수는 관개용으로 쓰인다. 기후는 연중 거의 일정한 기온을 유지하는 아열대 해양성 기후로 평균기온은 해안지대가 23℃, 고원지대가 19℃이다. 덥고(12∼4월) 추운(6∼9월) 두 계절로 나뉘며, 연간강우량은 서해안이 900㎜, 남동해안이 1,524㎜, 중부 고원이 약 5,080㎜이다. 지금은 원시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600종에 이르는 이 지역 원산의 식물이 자라며, 삼바(꼬리가 길고 암갈색 털을 가진 사슴)·텐렉(가시로 뒤덮인 식충동물)·몽구스 등의 동물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새와 곤충이 살고 있다. 국토의 1/2 이상이 경작지이며, 주요작물은 사탕수수로 설탕 수출의 약 90%를 차지한다.
국민
모리셔스는 세계 최대의 인구조밀지역에 속하며, 1984년에는 평균 499명/㎢의 인구밀도를 기록했다. 1960년대 말라리아가 근절된 이후 인구과잉은 심각한 문제가 되었으며, 1970년대말에는 인구 1,000명당 자연출생률은 약 27명, 자연사망률은 약 7명이었고 따라서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1,000명당 거의 20명이나 되었다. 1972∼82년에 이민으로 연간 인구증가율이 1.4%로 줄었으며, 인구의 절반 이상이 15∼54세이다. 인구의 3/5이 인도인이며, 2/5가 크리올인이거나 프랑스계 후손이고 그밖에 중국인이 가장 작은 지역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인구의 절반이 힌두교도이며 약 1/3이 그리스도교도, 나머지가 이슬람교도이다. 여러 인종집단 사이에 많은 언어가 쓰이지만 공용어는 영어이며, 크리올어는 모리셔스의 국제혼성어가 되었다.
경제
모리셔스는 농업에 기반을 둔 발전도상의 혼합경제체제를 취하고 있다. 정부가 농업다양화를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여전히 설탕생산에 의존하고 있는데, 세계 설탕가격의 심한 변동과 인도양에서 발생하는 강한 열대성저기압(사이클론) 때문에 경제여건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연간 40%를 웃도는 인플레이션은 아프리카에서도 최고이며, 실업률이 20%에 가깝다. 국민총생산(GNP)은 1981년에 8억 9,000만 달러를 넘어섰으며 1인당 GNP는 약 930달러이다.
농업은 GNP의 약 1/5을 차지하며 전체 노동인구의 1/3이 이에 종사한다. 수출액의 3/4을 차지하는 설탕생산에 전체 경작지의 90% 이상이 투입되며, 식량(특히 쌀)의 수입의존도가 매우 높다. 한편 차(茶) 생산이 크게 확대되고 있고, 감자·토마토·코코넛·바나나 등도 재배되고 있다. 일본이나 러시아의 기술 원조로 어업이 활기를 되찾고 있다. 공업은 GNP 및 노동력의 약 1/4을 차지한다. 건축경기가 불황을 겪고 있는 반면 제조업은 꾸준한 성장을 보이는데, 이것은 모리셔스 수출가공단지에서 수출시장을 겨냥하여 수입원자재와 반제품의 노동집약적인 가공·처리에 주력하여 외국 투자를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주산품으로 직물·전자기기·플라스틱·가죽제품·모조보석 등이 있다. 연간 전력생산량은 1980년대초 약 4억 3,800만㎾h에 달했는데 이는 주로 수입석유에 의해 발전(發電)되었다. 정부는 석유수입에 드는 점증하는 비용을 상쇄하기 위해 수력발전 및 설탕생산 부산물을 재활용하는 연료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서비스업은 GNP의 약 1/5을 차지하며 인구의 2/5가 이에 종사한다. 1970년에 관광업이 크게 성장하여 모리셔스 제2의 외화수입원이 되었다. 주로 석유제품·기계류·식품류를 수입하고 설탕·직물·차·어류 등을 수출하며, 대체로 수입이 수출을 초과한다. 1980년대초 모리셔스는 외국원조에 크게 의존했으며 국제통화기금(IMF)이 제시한 엄격한 긴축재정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출품의 2/3 이상이 보호무역조치를 취하고 있는 유럽공동체(EC) 시장에 들어가며, 가장 중요한 무역상대국은 영국·프랑스·일본이다.
정치·사회
모리셔스는 독립국으로 1968년에 채택된 헌법에 따라 영국 왕이 국가 원수의 자격을 가진다. 입법권은 5년 임기로 구성되는 입법의회에 있으며, 총리가 이끄는 각료회의가 행정권을 지닌다. 대법원이 최고 사법기관이다. 사회복지제도 실시로 병원과 진료소 체계를 갖추고 있으며, 사회복지회관이 없는 지역에는 시민문화회관이 건립되어 있다. 그밖에도 노후연금·가족수당과 기타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해 놓고 있다. 정부는 도시지역의 일반적인 인구과밀에 대응하여 도시 주택건설 계획을 맡은 지방자치체에 자금을 대출해준다. 초등학령 어린이의 거의 90%가 초등교육을 받고 있으며 중등교육 수준은 매우 높다. 모리셔스대학교에는 농학·공학·교육학·행정학 등의 학부가 있다. 학교에서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며 인도 방언은 선택과목이다. 성인교육 과정도 여러 문화회관에 마련되어 있다. 모리셔스방송공사는 외국의 라디오·TV 프로그램을 내보낼 뿐 아니라 자체 제작물도 방송하는데, 교육방송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9개의 일간신문과 20개의 주간지가 영어와 프랑스어를 비롯해 다른 여러 가지 언어로 발행된다.
문화
자영 단체들이 미술·문예·과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능한 시인·소설가들이 배출되는 한편 구상화와 추상화 작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국립문화기관으로 '모리셔스 협회'와 '모리셔스 문서국'이 있으며, 연극이 널리 보급되어 지방 아마추어 연극단체들이 상당히 수준 높은 공연을 보여준다. 5개의 시립도서관이 있고 학회도서관도 많이 있다.
역사
모리셔스가 아랍 선원들에게 알려진 것은 10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보인다. 16세기초에 포르투갈인들이 찾아왔지만 정착하지는 않았으며, 그뒤 1598∼1710년에 네덜란드인이 점령하여 나소의 모리스 총독 이름을 따서 모리셔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들은 1638∼58년, 1664∼1710년에 정착을 시도했다가 포기하고 떠났으며 해적이 섬을 차지했다. 1721년에는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모리셔스를 점령하여 프랑스 섬(Île de France)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그후 40년 동안 서서히 정착이 이루어졌다. 이 섬은 1767년에 프랑스 해군부가 행정을 맡게 될 때까지 프랑스 동인도회사가 다스렸다. 이 식민지는 설탕산업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중이던 19세기 초 영국과 인도 상선들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다. 1810년 영국이 이 섬을 점령하고 1814년에 평화를 되찾자 파리 조약으로 정식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관습·법규·언어는 프랑스식으로 남아 있지만 이름은 네덜란드가 붙였던 모리셔스로 바뀌었으며, 1835년 노예제도가 폐지되면서 인도 노동자들이 노예를 대신했다. 모리셔스는 1850년대에 번영을 누렸으나 사탕무 생산경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편 1866∼68년에는 말라리아가 돌아 포트루이스에 선박들이 접근하지 못했으며, 포트루이스는 1869년 수에즈 운하 건설 후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 설탕값이 올라 경제가 활성화되었으나 1930년대 공황이 닥치면서 상황이 급변하여 1937년에는 노동분규가 절정에 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경제를 호전시키지 못해 1945년 이후 경제개혁을 시도했으며, 정치와 행정제도를 개편하여 마침내 모리셔스는 1968년 영연방 내에서 독립을 맞았다. 1979년말에 불어닥친 사이클론 '클로데트'와 1980년대초 세계 설탕값 폭락 등에 자극을 받아 정부는 수입을 줄이고 수출을 다양화하기 위해 적극적인 농업다양화 정책을 펼쳤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은 1971년 7월 모리셔스와 수교하고 그동안 케냐 주재 대사가 겸임해오다가 1985년 8월에 상주공관을 개설했다. 1972년 이래 한국은 매년 물자원조를 제공하고 있으며, 1984년 8월에 모리셔스의 주그노드 총리가 한국을 방문한 바 있다. 1977년 1월에는 한국-모리셔스 어업합작회사가 설립되기도 했다. 두 나라의 교역량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데, 특히 한국의 경우 수출액이 1984년 459만 1,000달러에서 1991년 2,035만 달러로 급격히 신장되었다. 수입액은 1991년 11월 현재 13만 달러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은 1973년 3월에 모리셔스와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마다가스카르 주재 대사가 겸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