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지기의 제안에 따라 익산 보석박물관에서 진행중인 "이탈리아판화 400년전"을 영원지기, 지수, 창현, 대호, 효빈와 함께 다녀왔다.
어른 5000원, 초등학생 3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입장하니 해설자가 맞이해 준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주는데 판화의 기법 등 미술적 설명이 아닌 작품의 내용을 설명해 주어 초등학생인 지수등에게 일종의 14, 5세기의 서구 역사를 탐방하는 느낌이었다.
15세기 절세가녀인 베아트리체 첸체의 초상화(귀도 레니 작).
베아트리제 첸제는 아버지에게 겁탈은 당한 후 아버지에게 복수하고자 칼을 갈다가 기회를 잡아 아버지를 죽여 자살한 것 처럼 꾸미기 위해 사체를 베란다에서 떨어뜨렸는데...
첸체는 정당방위였다는 주장을 하였으며, 국민들은 사면을 요구하였으나 황제는 사형을 집행토록하였다.
사형당하기 위해 단두대로 올라간 첸체를 귀도 레니가 보고 그린 초상화인데, 소설 "죄와벌"의 작가인 스탕달은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심장이 뛰고 무릎에 힘이 빠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는군요.
그래서 이를 "스탕달 신드롬 "(뛰어난 예술작품을 감상하고 느끼는 순간 압박감이나 정신적인 충격을 가르키는 말)이라 한답니다.
티치아노가 그린 카를 5세는 카를 5세의 오른 손은 정상인데 왼손은 장갑을 끼거나 의소로 표현되었는데 작품 해설자는 그런 사실을 내가 물어 볼 때야 처음 느꼈다는군요.
해설자에게 그 이유를 물었으나 왜 그렇게 표현되었는지 모르겠다는군요.
저의 의견을 묻는다면,
권력의 양면성을 표현하지 않았나 합니다.
기회가 되면 워화를 보아야 티치아노의 표현인지 판화가의 의도인지를 알 것 같다.
_네이버 백과사전에 표현된 카를 5세
에스파냐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재위 1516∼1556). 헨트 출생.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펠리페 1세와 에스파냐 왕 페르난도의 상속녀 후아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나, 부친 쪽에서 네덜란드, 외가에서 에스파냐 ·나폴리 및 신대륙의 에스파냐 식민지를 상속받았다. 1519년에 막시밀리안이 죽자, 경쟁자인 프랑수아 1세를 누르고 신성로마 황제에 선정되었는데, 그때 푸거가(家)가 재정을 원조하였다. 당시 독일은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에 휩싸여 있었는데, 카를은 1521년 보름스에 소집한 국회에서 M.루터에게 자기 주장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실패로 그쳤다. 그 후 작센 선제후들의 비호 아래 루터주의 세력의 증대에도 불구하고 억제하지 못하였다. 왜냐 하면 카를은 그의 세력을 적대시하는 프랑스와 만성적인 전쟁에 돌입해 있었고, 더욱이 동방에서 이에 호응하는 오스만투르크제국이 공격을 계속하였으므로 독일 제후(諸侯)의 지지를 구해야만 하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의 지배를 둘러싼 프랑수아 1세와의 전쟁에서, 1525년 그는 파비아에서 프랑스군에게 대승, 왕을 포로로 잡았으나, 이 때문에 교황과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황제군이 1527년에 로마를 공략한 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에 파국을 가져와 반종교개혁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1530년의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독일의 종교문제를 해결하려 한 카를의 의도마저 배반당했고, 한편 프로테스탄트의 제후들은 슈말칼텐 동맹을 체결하여 무력투쟁에 대비하였다. 이윽고 프랑스와의 싸움이 1544년 크레피조약에서 일단 종결되었고, 오스만 투르크제국과도 휴전이 성립하여, 간신히 분쟁에서 벗어나 슈말칼텐 전쟁에서 프로테스탄트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카를의 전제적 태도는 가톨릭 제후들의 반감을 샀기 때문에, 1552년에 프로테스탄트 제후가 프랑스왕 앙리 2세의 지원을 얻어 재차 봉기하자 그는 고립에 빠져,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성립한 종교화의(宗敎和議)에서 제국 내에서 루터주의의 정치적 권리를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실의에 빠진 카를은 이듬해 제위를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에스파냐 왕위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이양하고, 자신은 에스파냐의 한 수도원에 은거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는 중세적인 황제 이념의 마지막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솔로몬 왕에게 찾아 온 시바여왕을 표현한 에드워드 포인터작(1890년)을 1892년 판화가 레온 고로뎃이 인그레빙 기법으로 완성한 작품
과연 레온 고로뎃은 신이였던 느낌이였다. 정상적인 보통이라고 느끼는 전 죽을 때까지 그려도 그렇게 할 수 없겠으니.
입장료가 아깝지 않은 관람이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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