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 되자 학교의 문을 닫아야 하느냐 열어야 하느냐로 세상이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어떻게 해서 사도(師道)가 이 지경이 되었고 스승과 제자의 사이가 요모양 요꼴이 되었는지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려운 말이기는 하지만 갱장(羹牆)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 즉 마시는 음식인 국과 담장이 합해진 단어인데, 국그릇에
비추는 그림자와 담장에 비추는 그림자를 보면 선생님의 그림자일까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높고 깊은 덕을 지닌 스승에 대한
사모의 뜻으로 변해진 말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선생님을 존경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산이 1818년 57세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오자 그때 광주(廣州)고을에 살던 어린 소년이 다산을 찾아와 글을 배웠습니다. 매우 재주가 있고 글을 잘해 다산도 무척 예뻐했으나 자신은
남인 출신이자 죄적(罪籍)에서 벗어나지도 못한 사람이어서 혹시 재주 있는 제자의 앞길이 풀리지 않을까 걱정하여 다른 스승을 찾아가도록 인도해
주었습니다.
제자는 김상현(金尙鉉:1811~1890)으로 자가 위사(渭士)요 호는 경대(經臺)인 광산김씨 벌열로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이었답니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경대는 어린 시절 광주 땅에 살아 정다산에게 배웠다.
나이가 들어가자 다산은 그를 돌려보내면서 ‘그대는 노론의 명문가 자제이다. 어찌 나를 스승으로 여기다가 여러 사람의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북촌에 김대산(金臺山;金邁淳 : 1776~1840)이 있는데 참으로 그대의 스승이 될만하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뒤
경대는 대산의 큰 제자가 되었고 문과에 급제하여 고관대작에 오르고 문명을 날리고 문장가로 크게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대는 대산에게는 언제나 ‘선생’이라고 지극한 경어를 썼으나 다산에게는 그냥 ‘다산’이라고만 했다며, 매천은 경대의 야박한
인품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실학자이자 실용주의자이던 다산의 스승관이 잘 드러나는 흥미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재주 높은
제자의 앞길을 열어주느라 남에게 양보하는 그런 참 스승이 있어야 스승의 날 학교의 문이 활짝 열리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박석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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