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시사인 김형민기자의 "괴물이 되어버린 혁명가"란 게재물에서 이데올로기로 극단을 추고하면 안 되는 교훈을 삼고자 전재한다.
2013년쯤이었나, 추석 연휴에 일본 대마도(쓰시마섬)를 다녀왔지. 출입국 수속을 밟고 있으면서 벽에 나붙은 지명수배 포스터에 대충 시선을 두던 아빠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 범죄 발생 일시가 소화(昭和) 46년인 거야. 소화, 즉 쇼와는 1989년 세상을 떠난 히로히토 ‘덴노’의 연호거든. 그가 쇼와 원년을 선포한 것이 1926년이니까 쇼와 46년이면 1971년이 돼. 즉 1971년의 범죄자를 일본의 변방이라 할 대마도 출입국관리사무소 벽에서 2013년 마주한 거야. 사진 속 범죄자 오사카 마사아키는 1949년생, 23세에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라 65세가 될 때까지 도망 다니고 있었던 셈이지.
그는 무슨 범죄를 저질렀던 것일까? 단어 몇 개가 눈에 들어왔다. ‘중핵파’ ‘경관 살해 범인’ ‘시부야 폭동 사건’ 등. 그제야 이 사람이 어떤 종류의 범죄자인지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어. 오사카 마사아키는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 세계적으로도 가장 극렬했던 일본 좌익 학생운동의 일원이었다.
한국의 학생운동도 가열차기로 유명했지만 일본의 극단적 학생운동 그룹은 상상 이상으로 극렬했다. 일본 최고의 대학이라 할 도쿄 대학에는 69학번이 존재하지 않아. 1969년 일본의 학생운동 연합조직 전학공투회의, 줄여서 전공투가 도쿄대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는 등의 사태가 빚어지면서 학사일정이 마비됐기 때문이지. 일본 좌익 학생운동은 치열한 내부 노선 투쟁을 거치면서 이합집산을 거듭했는데 과격파들은 과잉된 행동으로 오히려 힘을 잃고 점점 고립되었어. 심지어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의심하다 죽고 죽이는 사태까지 치달았고 ‘처음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미약한’ 결말을 맺게 되지.
위에서 등장한 ‘중핵파’는 일본의 좌파 조직인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 전국위원회’를 일컫는 이름이다. 일본 경찰이 40년 가까이 추적해왔던 중핵파 오사카 마사아키는 과연 어떤 일을 저질렀을까? 1971년 ‘시부야 폭동 사건’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 무렵 일본은 오키나와 반환 문제로 시끄러웠다.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종전 이래 미군이 점령하고 있던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되 미군 병력과 기지는 존속시키는 데에 미국과 합의했지. 일본 좌파들은 미군 철수 없는 오키나와 반환 반대를 외치며 격렬한 투쟁을 전개한다. 일본 좌익 학생운동 세력은 무장봉기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창했는데 각 조직들의 극단성은 이미 도를 넘어서고 있었지. 적군파는 아예 국제 테러리즘과 손을 잡았고 여객기를 납치해 북한으로 넘어가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1970년 요도호 사건). 중핵파가 집중한 싸움은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투쟁과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투쟁이었어. 1971년 11월10일 오키나와에서 경찰 한 명이 숨지는 폭력사태가 빚어졌고 11월14일에는 중핵파의 주도하에 ‘전국 총결집 도쿄대 폭동 투쟁’이라는 대규모 집회가 벌어졌다. 당시 중핵파 전학련 위원장의 지침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화염병, 쇠파이프는 물론, 폭탄 등 모든 무기를 사용해 폭동을 일으키고 권력의 주구인 기동대를 섬멸하라.”
전투 같은 시위, 아니 시위를 빙자한 전투가 도쿄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시부야구에 있던 가미야마 파출소도 습격당했다. 기동대원 27명이 있었지만 중핵파 조직원 150여 명이 일시에 달려들자 대책이 없었지. 그 난리 가운데 불운한 기동대원 한 명이 중핵파의 포로가 되고 말았어. 자본주의의 억압에 분노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을 꿈꾸던 이상주의자들은 이상(理想)의 불길 속에서 악마가 돼 있었던 거야.
현장에 있던 한 사람은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죽여라’를 부르짖는 가운데 엉망으로 구타당한 기동대원을 중앙으로 끌고 가 옷깃을 잡고 석유를 부었다. 그리고 화염병 하나가 그 머리에 꽂혔다.” 불길은 5m나 치솟았다고 기록돼 있다. 사람을 생으로 태워 죽인 거야. 중핵파 기관지는 이렇게 호언한다. “드디어 해냈다! 우리의 동지를 살해해온 권력의 감시견을, 게다가 그 가증스러운 가스총 사수를 섬멸했다(〈전진〉 1971년 11월22일).”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때 시위, 아니 살인의 ‘지휘’를 맡은 이가 오사카 마사아키였어. 수십 년이 지나서도 일본 경찰이 이를 갈며 그를 잡고야 말겠다고 벼른 이유가 이해되지?
그 후 그는 완전히 종적을 감췄다. ‘연대를 구해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았던(전공투의 슬로건)’ 일본 좌익 학생운동의 해는 일찌감치 산 너머로 떨어졌지만 소규모 조직은 살아남았고 오사카 마사아키는 그들 속에 은신해 수십 년을 지냈다. 원래대로라면 공소시효가 만료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지나도록. 그러나 그에게 불운 하나가 찾아온다. 질병 치료를 이유로 공범자에 대한 법원 재판이 1981년 정지되면서 이 사건 공소시효가 중지된 상태였는데 2010년 법 개정으로 살인죄의 공소시효 자체가 폐지돼버렸지. 오사카 마사아키를 향한 수배의 그물이 거둬지지 않았던 거야.
‘진격의 거인’이 된 운동
일본 경찰은 백발이 되고 폭력 성향도 거의 누그러진 중핵파 조직원들 속에서 오사카가 수십 년 동안 은신해온 사실을 간파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7년 5월 히로시마의 중핵파 사무실에서 60대 노인 한 명을 체포하게 돼. 이 노인은 조사 과정에서 내내 묵비권을 행사했고, 경찰은 유전자 감식을 맡긴다. 조사 결과가 밝혀졌을 때 일본 열도는 크게 한 번 출렁였지. 오사카 마사아키가 맞았던 거야.
그렇게 오사카 마사아키는 체포됐지만 잔존 중핵파는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반세기 전의 증언과 증거가 확고부동할 수 없고, 실제로 중핵파 관련 사건에서 무고함을 주장하는 이가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일도 있었으니까. 최종 판결은 지켜보아야겠지.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일본 좌익 학생운동이 “폭력적인 행동으로 세상에 쇼크를 주어 주목을 받는 것이 ‘혁명적’인 호소 방식이라고 생각한다면, 너무나도 사회를 얕잡아보고 표현의 자유를 남용해 자신의 목을 조르는 행위(〈아사히 신문〉 1967년 10월9일)”라는 비판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일 거야. 그들은 무의미한 폭발을 반복하면서 애꿎은 피해자와 좌절한 가해자만을 양산한 채 스러져갔어. 수십 년 동안 골방에 갇혀 신념 ‘따위(아빠는 감히 이 표현을 쓴다)’를 고수한 쓸모없는 혁명가처럼 말이다.
전공투 이후 일본에는 학생운동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학생들의 사회참여가 끊겼다. 전공투 세대 상당수는 “1970년대 이후 투쟁의 장소를 바꾸어 다양한 개별 과제를 통해 일본 시민사회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개별 과제 속으로 확산된 운동이 시민사회 전체의 변혁운동으로 연결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정아영 ‘일본의 1968년 학생운동에 대한 사회적 기억과 평가’, 〈경제와 사회〉).” 모든 운동은 좀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추구하지만 대개 그 추진 과정에서 인간의 희생과 배제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운동의 대의가 개별 인간의 권리와 일상을 넘어서는 거인이 될 때 대개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기 십상이지.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무뇌 거인들처럼 말이야. 20세기를 통틀어 우리는 여러 무뇌 거인들을 목격했다. 그중 작은 것 몇 마리는 한국 역사에서도 더러 발견되지 않을까.
김형민 (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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