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포럼 제 974 호
태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정 근 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태풍이 할퀴고 간 벌판이 황량하다. 원래부터 생각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작정을 하고 만든 것이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그 파괴력이 의외로 커서 오랫동안 생각을 같이 해왔던 사람들의 사이마저 갈라놓았다. 링링이 아니라 조국 이야기이다. 태풍의 눈은 자녀교육문제와 재산문제를 넘나들면서 옮겨 다니고 있는데, 후유증이 심각하다. 가족 구성원끼리 서로 싸운 사례도 주변에 허다하다.
이 태풍은 권력의 정당성을 도덕성에 의지하고 있던 정부와 여당에 큰 상처를 남겼다. ‘강남좌파’를 포함한 지지기반이 많이 무너져 내렸고, 정의를 말하기가 어려워졌다. 보수 야당도 비슷한 상처를 입었다. 지지기반인 중상류층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무기인 청문회 자체의 무용론을 확산시켰다. 더 큰 패배자는 국민들이었다. 믿고 의지할만한 것이 사라졌으며, 스스로 만들어낸 자화상을 미워하게 되었으며, 방향감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은 흔들리는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점검하면서 사회적 에너지를 결집해야 할 시점인데, 엉뚱한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다. 지난 2년 반 동안 추진했던 북한의 비핵화와 남북 교류협력을 통한 평화의 정착, 일자리 창출을 통한 성장 동력의 회복, 정부 출범시에 약속했던 분권과 협치, 이런 목표들이 얼마나 달성되었으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면 무엇 때문인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한일갈등이나 오래 지속되고 있는 한중불신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이런 난제들이 수두룩하게 놓여 있는데, 원한의 정치가 반복되고 증폭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깝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정상회담을 통하여 달성하려고 했던 평화는 화려하게 연출되었지만, 아직까지 실속이 거의 없다. 미래를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의 재개도 아득하다. 결단의 기회를 놓쳤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들린다. 필자는 정상회담을 통한 위로부터의 해결이라는 틀에 모든 것을 맡긴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가을바람이 불면서, 북의 최선희 부상은 북미대화 재개신호를 보냈고, 트럼프 대통령은 볼턴 보좌관을 해임하면서 이에 화답하는 자세를 취했다. 일본대표단은 평양을 방문하여 관계개선을 위한 장애물 제거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한 달 후로 다가온 평양의 월드컵 예선경기가 돌파구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정부가 문제해결의 키를 다시 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힘과 옆으로 확산되는 힘을 한데 모아야 하며, 그래야만 무엇인가를 결단할 수 있다.
(下略)
글쓴이 / 정 근 식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서울대 전 통일평화연구원장
· 저서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국제연대〉(공저, 한울, 2018)
〈평화를 위한 끝없는 도전〉(공저, 북로그컴퍼니, 2018)
〈소련형 대학의 형성과 해체〉(공저, 진인진, 2018)
〈냉전의 섬 금문도의 재탄생〉(공저, 진인진, 2016)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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