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소(燃燒)’
행복을 묻자 이 두 글자가 돌아왔다. 행복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연소하며 일했던 때가 생각 난다는 것이다.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참모로서 청와대에서 봉직했던 시기다. 그것은 바로 윤여준(79) 전 환경부 장관이 자신을 규정하는 정체성과도 연결된다. 이전엔 당연히 그를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다. 김영삼 정부 이후 학문의 샘을 파며 살고자 한 그를, 최고 권력에 도전했던 이들은 가만 두지 않았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자유한국당의 전신) 총재가 그랬고, 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공동대표가 그랬다. 문재인 대통령도 한때 그에게 도와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니 세상은 그를 흔히 정치인으로 여긴다.
그러나 윤 전 장관은 평생을 관통하는 단어로 ‘공인’을 택했다. 공인이란 책임 지는 사람이다. 국민의 녹을 먹는 공직의 무게만큼 사회에 환원하며 살고자 하는 의지가 그 두 글자에 담겨있다. 연소 역시 그렇다. 의미 없이 타기만 하는 현상을 연소라고 하지는 않는다. 윤 전 장관의 말이다. “사람을 우주 궤도에 올리는 건 로켓이에요. 로켓은 연소로 그런 추진력을 갖죠. 제가 곧잘 ‘일할 때 네 자신을 연소 시켜라’라고 말하거든요. 저를 연소 시키면서 일했을 때가 바로 (YS의) 청와대 공보수석을 할 때죠.”
그저 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태워 정부를, 국가를, 공동체를 제대로 돌아가게 하는 게 연소이고, 그 일을 하는 자리가 바로 공직이라고, 윤 전 장관은 그렇게 설명했다.
같은 맥락에서 보수를 자임하는 정당의 처지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망하고도 왜 망했는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자유한국당 말이다. ‘보수정당이 재건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윤 전 장관은 “우리나라에 보수당이 있나요?”라고 반문했다. 맞는 말이다. 보수 유권자는 있는데, 그들을 끌어안을 당이 우리에겐 없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도 따지고 보면 보수를 자임했던 세력의 과제다. “국가 역량이 파탄 지경에 왔다는 걸 세월호 참사가 보여줬어요. 17살 고등학생 250명이 무슨 죄를 졌다고 그렇게 참혹하게 희생돼야 하나요. 우리는 그건 곧 국가가 침몰한 것이라고 읽었죠. 그렇다면 이제 어떤 가치로 이 공동체를 묶을지 고민하고 답을 내놔야 해요. 어떻게 보면, 그건 보수라고 자임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에요. 정부수립하고 70년 간 그들이 국가를 운영해왔기 때문이죠.” 그런데도 그 세력의 4선 의원은 6ㆍ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하자 국민에게 사죄를 한다면서, “세월호처럼 당이 완전히 침몰했지 않느냐”며 마치 남의 교통사고 취급하듯 말해 비판이 일었다.
윤 전 장관은 공직자로서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가방에 노란 리본을 매달고 다니는 것으로 새기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던진 ‘이게 나라냐’는 물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우리 나이로 올해 팔순이 된 윤 전 장관에게 젊은 세대에 전하고 싶은 얘기도 물었다. 그의 혜안에서 나온 조언과 당부를 듣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윤 전 장관은 이번엔 “할 말은커녕 사과부터 해야지요.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나라를 물려줘서…”라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내내 예상을 벗어난 대답뿐이었다. 그래서 질문보다 생각이 많았던 인터뷰였다.
-올해 여든이 되셨지요. 근황이 어떠세요?
“(서울의 외곽으로) 이사한 지 석 달 됐어요. 남양주에 있는 천마산 아래로요. 10년 전에 충북 월악산 자락에 황토 집을 지어놨는데 서울 일이 정리가 안돼 그간 완전히 이전을 하지 못했거든요. 올해 초 이제는 내려가겠다고 했더니, 자식들이 ‘연세가 있으신데, 너무 멀다’면서 반대하더라고요. 절충안으로 아들들에게 도심과 1시간 이내의 거리이며, 공기 좋고 조용한 산 밑에 있는 집으로 찾아달라고 해 택한 곳이죠. (웃음)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바람이 선선해요. 하루 종일 책 보다가 오후 3, 4시쯤엔 산에 들어가서 숲 속 나무 그늘에 앉아있다 나오곤 하죠.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도 아주 기분 좋게 들리고요.”
-왜 올해 서울을 떠나겠다고 생각하신 건가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생의) 마지막 시기를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하게 되잖아요. 돌이켜보니 근 10년 동안 끊임없이 떠들며 살았더라고요. 물론 다른 욕심이 있어서가 아니고 하도 말하는 사람이 없으니 나 같은 사람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또 민주시민으로서 (사회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그랬죠. 그런데 지나고 보니 아는 것에 비해 너무 떠들어서 참 부끄러운 일이다 싶더라고요. 발산의 세월을 10년 보냈으니 이제는 입을 닫고 성찰과 수렴의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최근에 아주 특별한 친분이 있는 작가가 거절 할 수 없을 정도로 부탁을 해와서 일주일에 한 번씩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기로 한 것 때문에 (결심이) 좀 깨지긴 했지만요.”
윤 전 장관에게는 ‘안철수를 정계로 이끌었다’는 얘기가 줄곧 따라 다니지만, 도리어 그에게 ‘정치는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게 윤 전 장관의 설명이다. 김주성 기자
처음부터 묻기엔 까다로운 얘기지만, 이 대목에서 안철수 전 대표가 생각났다. 안 전 대표와의 연 또한 어찌 보면 윤 전 장관의 ‘거절 못하는 성품’ 때문인 까닭이다. 세상은 윤 전 장관이 안 전 대표를 정계에 입문 시킨 ‘멘토’로 생각하지만 윤 전 장관의 설명은 다르다. 특히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논란 이후인 2016년에도 안 전 대표의 신당(국민의당)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의문이 증폭됐다. 더구나 당시 윤 전 장관은 신장 기능에 문제가 생겨 입원 치료를 받던 때였다.
-2016년에 안 전 대표를 왜 또 도우셨나요?
“당시 병원에 입원해있었어요.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할 때라 담당 의사가 면회도 금지했죠. 그때 안 전 대표가 만나고 싶다는 요청을 계속 해왔어요. 의사가 결국 ‘3분 만’이라는 조건을 걸고 허락을 해줬죠. 안 전 대표가 두 손으로 내 팔을 잡고 ‘도와달라’, ‘이름만 쓰게 해달라’고 했지만, 도저히 내가 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답하지 않았죠. 그런데도 참여하게 된 건 이태규(현 바른미래당 의원) 때문이에요. 보통 그를 ‘동생과 자식의 중간 정도쯤 되는’ 이라고 표현하곤 하죠. 그 이태규가 부탁을 하는데 어떻게 거절을 하나요.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욕 먹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기도 하죠.”
이태규 의원은 윤 전 장관이 1998년 서울시장 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최병렬 캠프에 ‘어쩔 수 없이’ 합류했을 때, 핵심 실무자로 동고동락했다. 그 때 한 팀이었던 권영진 대구시장도 윤 전 장관과 깊은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사람들은 윤 전 장관께서 안 전 대표를 정치의 길로 이끈 걸로 생각하죠.
“안 전 대표와 (2010년) 청춘 콘서트를 할 때도 그 사람에게 ‘정치는 하지 말라’고 말했었죠. 안 전 대표도 정치는 절대 안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럼 우리가 정치를 바꾸는 운동은 할 수 있겠다’고 했죠. 그러다가 어느 날 안 전 대표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가면 어떻겠느냐’고 했고, (안 전 대표의 성품을 잘 아는 법륜 스님 등) 주위에서 만류했지만 뜻이 강했어요. 어쩔 수 없이 도와주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또 갑자기 가족들이 거세게 반대해서 안되겠다고 하더라고요.”
-안 전 대표가 당시 박원순 무소속 후보(현 서울시장)에게 ‘아름다운 양보’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이미 언론에서는 안 전 대표가 출마를 할 것으로 보도하던 시점이었어요. 그런데 안 전 대표는 출마를 않겠다고 하니, 그럼 ‘시민후보를 지지한다’고 선언하라고 조언을 해줬죠. 그래서 박원순 시장 지지로 이어진 거예요.”
최근 사석에서 만났던 김종인 전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 대표도 비슷한 말을 했다. 당시 안 전 대표가 (야권 단일후보 자리를) 양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1년 김 전 대표가 윤 전 장관, 최상용 고려대 명예교수, 법륜 스님과 함께 새 정치를 위한 신당을 추진하려고 준비할 때 안 전 대표를 만난 일을 설명하면서다. “안 전 대표를 두고 대단한 전문가라고 해서 서너 번 만났지만, 그 때마다 묻는 말에 제대로 답을 하지 않아 답답했다. 하루는 ‘총선에 나가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했더니, ‘국회가 하는 일도 없는데 국회의원을 해서 뭐하냐’는 식으로 말을 하더라”는 것이다. 김 전 대표는 당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어 ‘나는 이만 가보겠다’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김 전 대표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논란 때도, 곁에 있던 윤 전 장관이 하는 수 없이 ‘(불출마 하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게 좋겠다’고 해주고 떠난 게 사태의 전말이지, 후보 자리를 양보한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 전 대표는 한 인터뷰를 통해서도 이 중 일부를 밝혔다.
-건강이 좋지 않았을 때인데도, 어쩔 수 없이 창당대회장에도 가셨죠.
“그렇죠. 행사장에 가보니, 사전에 들은 바와 달리 식전행사 때 마이크까지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무대에 올라갔는데 목소리가 나와야 무슨 연설을 하지요. 몇 마디만 겨우 하고 내려와선 창당대회는 보지 않고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왔어요.”
-안 전 대표는 고마워하던가요?
“그 날은 얼굴도 못 봤어요. 의원들하고 따로 방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몸도 편치 않은 사람이 어렵게 다녀갔으니 나중에 인사라도 할 법 한데, 전화 한 통 없었죠. 기대도 안 했지만.”
-안 전 대표는 아직 정치의 꿈을 버리지 않은 듯해요.
“권력을 향한 욕망은 많은데, 실현할 능력은 없는 거죠. 새 정치의 신기루만 피웠을 뿐, 실체를 못 만들었잖아요. (안 전 대표가 정치권에 있는 한) 새 정치란 이미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 나오기 어려워졌죠. 아직 그 공간을 안철수가 차지하고 있으니까. 마치 자유한국당 때문에 ‘새 보수’가 들어설 공간이 없듯이. 새 정치의 아이콘으로 등장한 사람이 이제 도리어 새 정치의 걸림돌이 됐어요. 그런 의미에서 (안 전 대표가) 정치를 접는 게 좋다는 생각이에요. 새 정치의 시작을 위해서. ‘안철수 현상’이란 이름이 붙을 만큼 회오리 바람이 일어난 이유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 때문이거든요. 아직도 그 (열망의) 일부가 남아있고요.”
-안 전 대표가 정치를 그만둘까요?
“그러지 않겠죠. 자신에 대한 환상이 있어 보여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이 좀 없어 보인다는 거지요. 그를 겪어본 어느 분이 이렇게 표현을 하더라고요. ‘안철수에게는 공심이 없다’고. 말을 바꾸면 사심만 있다는 뜻 아니겠어요? 표현이 절묘하다고 생각했어요. 공심이 없으면 민주적 리더십을 가질 수가 없어요. CEO 마인드로는 민주주의가 비효율적이거든요. 자칫 과정이 지루하고 시간 낭비인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갈등을 다 조정하고 가는 거라서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가 효율적인 건데 말이죠. 안 전 대표는 (당을 만들고 나서도) 공조직의 의결사항을 사전사후 양해 없이 바꾸기도 했죠. 민주주의를 모르는데, 어떻게 민주공화국의 통치자가 됩니까.”
-만날 때마다 누구하고도 대화가 되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연세에도 유연한 사고를 유지하는 비결이 뭔가요?
“지금도 30, 40대와 자주 만나고 또 함께 일하기도 하는데 아무 주제나 다 대화가 되는 게 신기하다고들 해요.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죠. 내가 뭘 안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선친(한학자 윤석오 선생)께서 늘 그러셨거든요. ‘공부는 평생 하는 거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모른다는 걸 알아서 겸손해지는 법이야.’ 30대 친구들과 얘기하다 깜짝 놀라기도 하죠. 내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으로 정치 현실을 분석할 때가 있거든요. ‘나보다 저 친구가 낫다’ 싶은 거죠. 그러니 정말 공자 말씀이 맞아요.”
-30, 40대와 함께 하신다는 일은 무엇인가요?
“인터뷰 전문 잡지를 만들어요. 창간호를 내기 전에 시제품 격인 ‘0호’를 7월 중에 내려고 해요. 저까지 4명이 상근 멤버죠. 디자이너, 브랜드 컨설턴트, 영상전문가 같은 본업이 다 있는 친구들이에요. 돈을 벌기 쉽진 않겠지만 분명히 이런 이색적인 인터뷰 잡지를 원하는 마니아층이 있으리라는 기대로 만들고 있어요.”
-0호의 주제는 무엇인가요?
“주류 속의 비주류가 보는 세상이에요. 제가 인터뷰어이자, 인터뷰이로 참여했죠. 경제, 남북관계, 역사, 정치 분야의 교수, 학자, 기자를 인터뷰했어요. 다 하고 나니까 편집장 격인 친구가 또 저를 인터뷰하겠다고 해서 인터뷰이로도 나가게 생겼어요. (웃음)”
윤 전 장관은 본래 1966년 동아일보 기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으니, 42년 만의 귀환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수습기자 시험에서 작문 점수가 합격자 중 가장 좋았다는 평을 들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입사 직후 윤 전 장관은 ‘신동아’로 발령이 났다. ‘3년 뒤엔 신문으로 복귀 시켜 원하는 부서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경향신문 정치부로 터를 옮겼지만. 만 11년을 기자로 일한 뒤, 김성진 당시 문공부 장관의 제안으로 해외공보관으로서 공직에 몸을 담게 된다. 유신 시절, 어차피 기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시기였다. YS와의 운명적 인연이 그때 예정된 건지도 모르겠다.
-YS의 청와대에 들어가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정치부 기자 시절 야당 출입을 했으니 그때부터 알고 있기는 했죠. 그런데 청와대에 들어간 건 (1994년 남북이 합의, 추진했던) 남북정상회담 실무 협의 때문이었어요. 국가안전기획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의 언론담당인 3특보로 일할 때인데,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을 우리측 수석대표로 하는 판문점 예비접촉에 저도 참여하게 됐어요. 남북관계 담당은 1특보였지만, 북한과 담판을 해야 한다는 점, 사후 언론 브리핑 등을 고려한 결정이었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이 부총리에게 미리 두 가지 원칙을 당부했어요. ‘김일성 주석이 고령이니, 굳이 서울에서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평양에 가면 된다. 또 평양에서 1박을 해도 되니 회담 횟수를 못박지 말라’는 것이었죠.”
-당시 윤 전 장관도 북측 인사와 담판을 할 기회가 있었던 거군요.
“이홍구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과 북측의 김용순 당 비서 겸 통일전선부장이 만나서 첫 회담을 한 뒤에 별도의 실무 접촉을 할 때도 제가 갔거든요. 판문점에서 실무 회담을 두 번 했는데, 북측과 남측에서 번갈아 가면서 했어요. 그 때 휴전선을 넘어가봤죠. 당시 북측에선 이후 외무상을 지낸 백남순이 나왔어요.”
당시 회담을 청와대도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들을 건 들어주고 무시할 건 무시하며 상대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고 끌고 가는 윤 전 장관의 모습이 YS는 상당히 흡족했던 모양이다. “진흙 속에서 진주를 건졌다”는 칭찬을 했다는 후문이다.
“이틀 간의 회담을 마치고 돌아오니 안기부장이 ‘아주 잘했다. 대통령 각하가 굉장히 칭찬을 하더라. 아마도 반드시 중용할 것으로 생각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 해 7월 25일로 예정됐던 YS와 김 주석의 정상회담은 김 주석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됐다. 그리고 윤 전 장관은 그 해 12월 청와대의 부름을 받았다. 공보수석 겸 대변인을 맡게 된 것이다.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대통령께서 그러시더군요. ‘대통령을 2년 간 해보니 국정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어도, 국정은 결국 대통령의 말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더라. 그러니 윤 수석이 잘 써달라’고요. 김 전 대통령은 대변인 역할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어요. ‘윤 수석은 내 대변인이니 전반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면서 늘 얘기를 해주셨지요. 업무와 관련 없는 문제도 ‘이건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으셨어요. 당신이 이미 판단을 한 사안에 ‘잘못됐다’고 해도 기분 나빠 하지 않고 ‘그렇다. 내 생각이 짧았네’라고 수긍하시기도 하고, ‘아니다. 그건 윤 수석이 잘 몰라서 그래’ 하면서 설명하시기도 했죠. 거기다 또 반론을 제기한다 해도 ‘그래? 그럼 다시 알아보겠다’고 하셨죠. 참모들의 말을 끝까지 다 들으셨던 것, 김 전 대통령의 아주 큰 장점이었어요.”
-청와대 비서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꼽는다면요.
“서민으로 살았던 사람이라도 대통령이 되면 현실, 상식과 멀어지기 쉬워요. 청와대의 메커니즘이 그래요. 대통령은 보통 비서진의 보고를 받고 현실을 인식하게 되거든요. 그러니 청와대 수석들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정직성이에요. 능력이 부족하면 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정직성은 그렇지 않죠. 정직하지 않은 수석이 있으면 대통령이 오도를 하게 돼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도 청와대 경제파트에서 오판을 했거나 정직하지 않은 보고를 했거나 둘 중 하나 때문이었죠. 김 전 대통령이 아무리 경제를 잘 몰랐다고 하더라도 정직한 보좌를 받았다면 그런 사태까지 맞지는 않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모든 공적이 다 덮였으니까요.”
-정치를 한마디로 말하면 뭘까요?
“국가를 통치하는 거죠. 그 제도가 대의민주주의고요. 국민이 직접 하지 못하니까 대표자를 선출해서 맡긴 거죠. 대통령에게는 행정권을, 국회의원에게는 입법권을 준 거죠. 두 국민의 대표가 균형과 견제를 이뤄서 국민 대신 국정을 잘 이끌어 달라는 거예요. 그런데 행정부는 하나고, 입법부는 여럿이죠. 다양한 성별, 지역, 계층을 대변해야 하니까. 그래서 국회 본회의 통과를 곧 국민의 결정으로 간주하는 거죠. 국회는 그러면 소수의견이 존중되는 걸 전제로 다수결로 결정을 해야 하는데, 다수당이 밀어붙이는 대결구도가 반복되니 대의제도가 망가져서 국가가 효율적으로 통치되지 않는 거예요. 정치가 작동을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되니 국가 역량이 서서히 내려가고, 국민의 역량이 결집되지 않는 거죠. (정치권이) 그 같은 (대의민주주의의) 과정을 무시하거나 지키지 않아서 작동하지 않게 만들어 놓고 마치 그간 협치를 몰랐던 것처럼 말하는 건 무책임한 일이죠. 대통령부터 민주공화국의 국가 운영원리를 지키면 그게 협치고 국민통합이에요.”
-문재인 정부는 잘 하고 있다고 보세요?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지금까지 잘 한 일도 많고 그래서 지지율도 높은 거겠죠. 남북관계 역시 문 대통령이 끌고 가는 방향에 찬성해요.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게 있어요. 최소한 유권자의 30%는 문 대통령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지난 대선에서 홍준표 전 자유한국당 대표가 그렇게 막말을 했는데도 얻은 표를 보세요. 문 대통령이 이들을 설득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을 해야 해요. 그런데 반대 세력은 배제하고 묵살하고 가겠다는 것 아닌지 걱정돼요. 4ㆍ27 남북정상회담 만찬에 어떻게 국회의장단 한 명, 야당 대표 한 명 초청하지 않을 수 있나요? 협치, 국민통합 하겠다는 지도자가 할 일인가요? 이건 민주국가의 운영원리가 아니에요.”
-작고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는 ‘정치는 허업(虛業)’(정치는 잘하면 국민이 그 열매를 따먹지만 정치인 본인에게는 허업이다)이라고 했는데요.
“저는 그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기업처럼 자기가 열매를 먹어야만 실업(實業)인가요? 정치인이 또는 공직자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는 국민이 열매를 따먹게 하려고 하는 거죠. 그게 정치의 가치예요. 그래서 실업보다 훨씬 더 무거운 책임이 있는 일이고, 훨씬 더 큰 열매인 것이죠.”
-JP의 별세로 ‘3김 시대’가 정말 끝났으니, 정치도 새 시대가 와야 할 텐데요.
“세 분이 일선에서 활약하던 시대가 있었으니 ‘3김 시대’라고들 하는데, 따지고 보면 ‘양김 시대’지요. (김영삼ㆍ김대중) 두 분이 민주화 운동을 한 데 비할 바가 아니니까요. JP는 5ㆍ16 이후에 등장을 했고요. 어쨌든 MB(이명박)가 ‘정주영 신화’를, 박근혜는 ‘박정희 신화’를 깼죠. 정주영ㆍ박정희는 산업화의 신화죠. ‘노무현 신화’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아직 살아있는 신화지요. 노 전 대통령은 아직 많은 국민이 그리워하는 존재니까요. 권위주의 시대에서 양김이 민주화의 시대를 열었지만, 아직 그 시대를 이끌어갈 국정원리를 만들어내지 못했어요. 문 대통령이 이를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문 대통령부터 민주화 시대를 이끌어갈 국정원리를 만들어야 해요. 그걸 시작하는 책임이 있는 거죠. 3ㆍ4차 산업혁명이 비슷한 시기에 오는 ‘혼합혁명’의 시대인데, 이 혁명이 사람의 사고 방식과 가치관을 바꿀 거예요. 그럼 정치권은 어떻게 제도를 보완하고 바꿔서 국가 미래를 담보할지, 어떤 가치로 국가 공동체를 묶을지 고민을 해야 하는데, 그런 고민을 하는 정치인이 과연 있는지 모르겠어요.”
-젊은 세대에 하고 싶은 말씀 있으신가요?
“할 말은커녕 사과부터 해야죠. 정말 미안합니다. 이런 나라를 물려줘서……. 지금 젊은 사람들, 얼마나 암담하면 ‘헬조선’이라고까지 하겠습니까. 그런데 젊은 친구들을 만나 얘기해보면 이 나라에 정말 희망이 있다고 느껴져요. 똑똑하고, 정신도 바르고요. 조금만 길이 열리면 모두들 일당백을 할 수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해요. 형편이 어려운 사람한테 이런 말이 상투적으로 들리겠지만, 그래도 한번 최선을 다해보라고 하고 싶어요. 저는 속담은 맞다고 생각하거든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어요. 우리 조상들의 슬기를 믿고 바늘구멍을 찾아보세요. 반드시 있어요!”
시종일관 유쾌하던 윤 전 장관의 어조가 미안하다는 대목에서 낮게 깔렸다. 떨리는 목소리가 감정의 무게를 짐작하게 했다.
-늘 긍정적이신 듯 해요. 그 비결은 또 뭔가요?
“사람이 제 분수를 알면 쓸데 없는 욕심을 안 갖게 되고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요. 하하.”
-언제 가장 행복하셨어요?
“행복… 사람이 살면서 행복할 때가 있나? 모르겠는데요. 하하. 음, 제가 ‘일할 때 네 자신을 연소시켜라’ 라는 말을 하곤 해요. 제 자신도 그랬거든요. 아무리 폭발력이 큰 폭탄도 사람을 우주궤도에 올리진 못해요. 로켓이 가능하죠. 로켓은 연소하는 거잖아요. 저 자신을 연소시키면서 일했을 때가 청와대 공보수석을 할 때였죠. 김 전 대통령이 끊임없이 동기를 부여하고, 인간적인 신뢰와 고마움을 표시한 게 저로 하여금 연소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해요. 피곤해서 충성심이 약해지다가도 그 분 한마디에 확 살아나곤 했으니까요.”
-지금까지 살면서 평생 지키려고 했던 삶의 도가 있다면 무얼까요?
“선친께서 주신 여러 가르침이 있는데, 뭉뚱그려 표현하면 이런 거예요. ‘일생을 일관된 정신으로 살아라. 정신이 일관되면 행동도 일관될 테니까.’ 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러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고도 강조하셨죠. 어릴 때는 ‘최선을 다하라는 건 결과에 집착하라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그런데 나이 먹어 생각해보니 아니더라고요. 결과에 집착하면 비굴하거나 치사해지기 쉽거든요. 그러니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내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라는 거지요. 그래서 가능한 한 이걸 일관되게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내가 선친께 참 좋은 교육을 받았구나’ 싶어요.”
인터뷰 말미, 윤 전 장관은 “요즘 아버지 생각을 할 때가 많아진다”고 했다. 그러고는 “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내가 내 아버지를 그리워한 것만큼 두 아들도 내 생각을 할까, 생각하면 자신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 자체로 윤 전 장관이 좋은 아버지라는 게 충분히 느껴졌다. 가족과 국가와 공동체에 자신을 연소한 공인으로서의 삶을 산 까닭이다. 이 시대 공직자 중 그 무게를 느끼고 견디는 자가 몇이나 될 것인가. 윤 전 장관이 던지는 물음이다.
대담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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