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15:15 프로 레미제라블을 보았는데
그 때 감동을 좀 더 적확히 표현된 것 같아 이를 전재합니다.
여기에 더해 마리우스를 두고 벌이는 코제트와 연적 에포닌에 있어 작금의 사고에 의문을 갖었다.
과연 사랑은 쟁취하여만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 하도록 놓아 주고,
자신의 운명을 기다리는 것이 좀 더 옳은 것이 아닐까?
『레 미제라블(Les Miserables)』이라. 제목만 보자면 ‘불쌍한 자들’ ‘비참한 자들’의 이야기다. 아이 양육비를 벌기 위해 생니 두 개를 빼어 파는 팡틴과 범죄자라는 이유로 하룻밤 묶을 방 한 칸을 얻지 못하는 장발장. 이 비참함이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아마도 단지 비참함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이 책이 조선에 처음 번역됐을 때 『레 미제라블』은 수난받는 자의 이야기였다. 제목도 『너 참 불쌍타』와 『애사』, 그리고 『장발장의 설움』등이었다. 그런데 이 무정한 감정이 조선에서는 민족적인 이야기, 즉 ‘수난받는 자’ 설움과 슬픔의 이야기로 수용되었다. 그래서 그가 차별받으면 차별받을수록, 자베르의 시선이 냉혹하면 냉혹할수록 장발장의 ‘성공’에 더 열광했다.
일본의 번역본도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희! 무정(噫無情)』이었다. 요즘 말로 하면 ‘무정하다!’이다. 조선과 일본의 경우 약간의 이점은 있지만, 『레 미제라블』의 역사적 의미보다 장발장의 파란 중첩한 이야기에 열광한 것은 매일반이었다. 심지어 일본판 역자인 구로이와 루이코는 빅토르 위고가 서문에서 ‘법과 제도를 넘어’ 역사의 빛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레 미제라블』을 둘러싼 역사적 맥락은 조선에서나 일본에서나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요즘 영화 ‘레 미제라블’을 둘러싼 사회적 반향은 사뭇 다른 듯하다. 영화 후반부에울려퍼지는 노래 ‘민중의 노래가 들립니까(Do you hear the people sing)’를 통해 원작의 메시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 그만큼 ‘비참한 자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기대가 새로운 역사에 대한 의지와 지향으로 드러나고 있다.
2013년 현재 많은 이가 이 책을 다시 붙잡는 것은 ‘비참한 현실’에 대한 수긍과 ‘그럼에도’ 이 현실을 뛰어넘는 새로운 역사를 간절하게 열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원작 소설에서 읽어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17년 동안 집필된 이 소설은 묵직하고 두툼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하기도 녹록하지 않다. 프랑스혁명 이후의 역사를 굽이굽이 파헤칠 뿐만 아니라 ‘역사’ 속에서 왜 ‘소설’이 불가피한지 설득해내는 소설의 형식이다. 총 5부의 이야기에서 1부의 제목은 ‘팡틴’, 2부는 ‘코제트’, 3부는 ‘마리우스’이며 5부에 이르러서야 ‘장발장’이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또한 단수로서의 개인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 격변기를 살아가는 수많은 인물이다.
실제 ‘장발장’조차 수없이 다른 인물들로 변신한다. 어머니는 ‘잔마티외’로 불렀으며, 아버지는 ‘저 장이란 놈’의 약칭인 ‘장발장’으로, 자베르는 ‘24601’번의 죄수로, 시민들은 ‘마들렌’ 시장으로, 마리우스는 ‘포슐르방’으로, 이처럼 장발장은 복수적 존재이다. 장발장의 존재가 그러하듯, 소설은 프랑스 격변기 속에 놓인 다수의 군중, 시민의 얼굴을 담아낸다.
또 영화에서와 달리 소설 『레 미제라블』은 생각만큼 시민·군중·청년의 존재를 마냥 긍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참한 현실을 이겨낼 수 없을 거라는 두려움과 그 현실을 냉소로서 버텨내는 허약한 환멸이 더 농도 짙게 그려진다. 프랑스혁명의 진취적인 기운은 미지의 심연 속에 갇혀있으며, 남아있는 것은 속악하고 비굴하게 타인의 것을 탐하는 인물군상뿐이다.
청년들이 비참한 현실에 분노하며 바리케이드를 치고 가두를 점거하자, 시민들은 그 분노가 현재의 삶조차 허물어낼지도 모른다면서 창문조차 닫아버린다. 분노로 가득한 그 거리는 시민들에 의해 모두 닫혀버린다.
바로 이 시점에 위고는 장발장의 ‘양심’을 역사의 빛으로 내놓는다. 신이 사라진 시대에 신의 영혼을 대신하는 ‘양심’의 탄생이 그것이다. 마차에 깔린 자를 살려내고, 여공의 아이를 대신 키워내며, 죽음을 자처하는 청년을 구출하는 순간마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의 모습과 겹쳐진다. 그는 두려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두려움을 넘어서 고백하며, 분노를 넘어서 상생한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와 평등의 기운이 어떻게 인간 내면에 젖어 드는지를 역설해 낸다. 이 양심은 자베르의 ‘법’이 닿지 못한 세계이며 ‘법 너머의 법’이다. 이 세계를 엿보고자 하는 다수의 열망이 지금 다시 『레 미제라블』을 불러들이고 있다.
박숙자 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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