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민초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

지성유인식 2011. 6. 10. 03:59

정조가 개혁과제를 제시하였는데
강 명 관(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정조는 즉위 후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얻자 1778년(정조 2) 6월 4일 민산(民産)·인재·융정(戎政)·재용(財用) 등 네 가지 부분에 걸친 장문의 대고(大誥)를 선포한다. 네 가지는 모두 당시 조선이 직면하고 있던 병처(病處)를 통렬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중 민산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백성의 생업’으로 번역되는 이 말은, 상업이나 수산업 등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주로 농업을 의미했다. 그리고 농업국가에서 농업은 곧 토지의 문제였고 더 좁히면 토지소유의 문제였다. 정조의 지적 역시 그것이 토지소유의 문제라는 것을 정확히 드러내고 있다.

   “백성의 산업을 제정해 주는 일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한다. 상고시절의 정전(井田)은 너무나 오래된 것이고, 오직 명전(名田) 한 가지만이 가장 가까운 시대의 것이지만, 진(秦)나라 한(漢)나라 이래로는 시행한 적이 없다.
   우리나라의 경우, 땅이 좁고 작은데다가 산과 골짜기가 대부분이라서 정전의 경계를 긋기 어려운데다가 토호들이 토지를 병탄하여 조종조의 융성하던 시기에도 균전(均田)과 양전(量田)의 의논은 막혀 시행되지 않았다. 대개 풍습을 바꾸기 어렵고 뭇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때문이었다..
   아, 백성의 먹을 것은 오직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 데 달려 있는데, 사람들이 각각 자기 농토를 가질 수가 없다면 아무리 힘써 농사를 짓고 싶다 한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문제도 알고 해결책도 알았건만

정조는 백성들이 각각 자기 토지를 소유하는 자작농이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 우리가 지금 익히 아는 바처럼 대부분의 농토는 토호들의 소유물이 되어 있었다. 과도한 소작료와 세금, 봄에 빌려먹은 환곡을 갚느라 백성들의 살림이 거덜이 나는 것은 왕인 정조로부터 말단의 관료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굶주려 죽은 백성의 시체가 땅에 뒹굴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유리걸식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당연히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돌려주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개인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정하자는 말도 있었고, 개인의 생계를 보장해 주는 최소한의 땅은 사고팔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그 기본정신은 요즘의 토지소유 상한제나 최저임금제에 맞닿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형태로든 기존의 토지 소유자가 땅을 빼앗기는 것을 의미했다. 반대자가 많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정조 역시 여러 토지 제도를 검토했지만, 결국 토지 제도 개혁에 손을 대지 않았으니, 기득권층의 반발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서 문제의 해결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사람들이 『경국대전』에 실린, 20년마다 시행하도록 규정해 놓은 양전(量田)을 온건한 해결방법으로 꼽았다. 현재 존재하는 토지의 면적, 비옥 정도, 경작 여부, 소유자를 정확히 밝히고 그것에 따라 세금을 내게 하는 간단한 방법이야말로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사정은 딴판이었다. 예컨대 수십 년 전에는 경작했지만, 홍수로 흙이 덮여 경작하지 않은 땅에 계속 세금을 물리는 일이 허다했고, 내가 개간한 땅이 남의 땅이 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정확한 양전이야말로 백성들에게 노동의 의욕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왜냐? 노동의 결과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양전은 거의 실패했다. 『정조실록』을 훑어보면 양전은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나마 대부분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행되어야하는가

1790년 선혜청 제조 정창순(鄭昌順)은 정조에게 양전을 청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옥토와 박토는 구분되지 않고, 묵은 땅과 경작하는 땅이 서로 뒤바뀌어 있으며, 토호들은 토지를 겸병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 것은 모두 여기에 근거한 것입니다.” 핵심을 찌르는 정창순의 말에 정조는 “정말 경의 말처럼 서로 그대로 지내며 오늘도 내일도 작년도 올해도 그저 미루어대는 것을 전례로 본다. 수령이 일하려 들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道)를 맡은 자(관찰사)들조차 백성의 일을 이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니, 어찌 크게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답한다.

균전도 양전도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았고, 해결책이 무엇인지도 알았다. 하지만 아무도 실천하지 않았다. 19세기 들어 조선사회가 회복할 수 없는 나락에 떨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유는 관료직을 독점한 지배계급의 탐욕과 복지부동에 있었다. 정조 역시 큰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관료를 탓하기만 했을 뿐 그조차 양전 사업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역시 기득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조실록』을 읽다가 문득 든 의문이다. “개혁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