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민초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이 된다.

지성유인식 2010. 3. 1. 22:46

 

백초월은 1939년 용산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낙서를 한 사건의 주모자로 일본 경찰에 구속됐다. 재판에서 3년형을 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될 당시의 모습과 수형자 카드.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사진이다. 진관사 제공 

 

 

 

3·1절이 나흘 앞으로 다가온 25일 오후 전국에 비가 내렸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이날 시작하는 ‘진관사 태극기’ 특별전에 참석한 진관사(서울 은평구) 주지 계호 스님이 기자에게 말했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초월 스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것 같네요. 아직도 한이 많으신가 봐요.” 백초월(白初月·1878~1944)은 진관사 태극기를 숨기고 진관사를 거점으로 항일운동을 한 스님이다. 계호 스님의 얘기가 이어졌다. “‘한국 독립운동과 진관사’를 주제로 세미나가 열린 지난해 12월 3일, 진관사 유물 발견 기자회견을 했던 8월 11일 모두 비가 왔어요.”
1993년부터 초월 스님을 연구한 김광식 동국대 연구교수는 “희한하네… 91년 초월 스님 고향에 기념비 세운 날에도 비가 왔었는데…”라고 했다.

 

3·1운동과 상하이(上海)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90주년이던 지난해 5월 26일 진관사는 예상치 못한 귀한 자료를 얻었다. 일장기 위에 덧그려진 태극기를 포함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들이다. 삼각산에 위치한 진관사는 1011년 고려시대 현종이 진관대사를 위해 창건한 사찰이다. 건물 보수를 위해 칠성전(서울시 문화재 제33호)을 해체하던 중 불단 안쪽 벽에 숨겨져 있던 태극기 1점과 신대한신문·독립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 등 당시의 신문과 경고문 19점을 발견했다. 진관사 법해 스님은 “오전 9시쯤 됐는데 인부 한 명이 칠성각에서 나왔다며 보자기 같은 걸 들고 왔어요. 뭔가 해서 살그머니 열어 봤죠”라고 말했다. 같은 자리에 있었던 계호 스님은 “보자기를 자세히 보니 태극무늬가 보이더라고요. 그때부터 심장이 쿵쾅거렸죠”라며 “태극기 안에는 아주 곱게 접은 신문들이 있었다”고 했다. 두 스님은 조심스럽게 보자기를 펼쳤다. 법해 스님은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울컥하면서 눈물이 나요. 불에 그슬리고 여기저기 찢어진 자국을 보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더라고요”라고 말했다.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두 스님은 평소 친분이 있던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에게 연락했고 곧바로 달려온 문 교수는 유물을 확인하고 안전하게 보존 처리했다. 이후 불교계와 역사학계에서 진관사 유물들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그 결과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6종 20점이 2월 25일자로 문화재청 등록문화재(제458호)로 등록됐다. 김주용 독립기념관 연구원은 “진관사에서 나온 유물과 항일독립운동의 연결고리는 백초월 스님”이라며 “그동안 묻혀 있던 불교계의 독립운동과 백초월 스님의 업적이 지난해 유물 발견으로 확실히 입증됐다”고 말했다.

 

1919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백초월은 4월 서울로 올라와 불교 중앙학림(동국대의 전신) 안에 한국민단본부라는 비밀 독립운동 조직을 만들고 군자금을 모았다. 7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독립운동단체의 활동 내용을 요약해 정리한 지하신문 ‘혁신공보’를 발간해 배포했다. 동시에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와 국내 조직과의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통해 국내에서 모집한 군자금과 독립운동에 활용할 청년을 상하이와 만주로 보냈다. 외국에서 만든 항일운동과 관련된 신문을 국내로 들여와 조직원들에게 배포했다. 신용하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이 나온 것을 보면 진관사가 연통제 조직의 서울 연락본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며 “같은 신문이 두 부씩 있는 게 있는데 이것은 진관사가 외국에서 들여온 독립신문류를 국내 다른 조직에 나눠 주는 중앙본부 역할을 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1919년 백초월은 불교계 독립운동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4월 상경한 그가 곧바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김광식 교수는 “이미 3·1운동 이전부터 중앙학림의 초대 강사로 내정될 정도의 실력과 명성을 가지고 있었다. 실력이 검증된 상황에서 한용운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수감되자 자연스럽게 지도자 역할을 대행하게 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백초월은 12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는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을 얻은 그는 석방된 뒤 진관사와 진관사의 마포 포교당(극락암)에서 지냈다. 다음 해 1920년 2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3·1운동 1주년을 맞아 도쿄 유학생들과 독립운동을 일으키려다 체포됐다. 4월에는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신상완 스님과 ‘승려의용군’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다 또다시 체포됐다. 신용하 교수는 “당시 일제 경찰에 수차례 체포되면서 백초월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죽은 거북과 얘기를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인 덕에 체포된 뒤 정신병으로 금방 풀려나기도 했다. 김주용 연구원은 “백초월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오뚝이 같은 분”이라며 “일제 경찰에 잡혀가 고문을 당한 이후에도 계속해 독립운동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항일운동을 지속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5월 26일 진관사(위) 칠성각에서 신대한신문·독립신문·조선독립신문·자유신종보 등 당시 신문과 경고문 19점이 태극기에 싸여(오른쪽) 발견됐다. 진관사 제공
 
태극기와 함께 발견된 신문들의 발행일이 1919년 6~12월 사이인 것을 근거로 김광식 교수는 “이 시기에 일제 경찰에 몇 번씩 체포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백초월 스님이 만약을 대비해 진관사에 태극기와 신문을 숨겼을 것”이라고 했다. 김주용 연구원 역시 “당시 독립신문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큰 처벌을 받을 만큼 중요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중요한 것이어서 백초월 스님이 직접 숨겼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진관사에서 발견된 태극기가 일장기를 개조해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밝혔다. 한철호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가 일장기 위에 덧칠해 제작된 것을 보면 1919년 후반에서 20년 초반 당시 백초월이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일장기를 개조해 태극기를 만들어 일본에 엄청난 모욕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당시 제작 기법대로 박음질해 태극기를 만들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태극기 전문가 송명호씨는 “일제치하에서 일반인들은 태극기를 보기도 어려웠던 만큼 백초월 스님이 직접 일장기 위에 그려 만든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1939년 백초월은 또다시 구속된다. 당시 철도국 노동자 박수남이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군용열차에 ‘대한독립 만세’라는 낙서를 한 사건이 있었다. 박씨를 체포한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일으킨 주동자가 백초월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체포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때 수형자 카드를 작성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 현재 유일하게 남은 백초월의 사진이다. 하지만 백초월은 3년이 지난 뒤에도 석방되지 못하고 대전·청주형무소 등으로 이감되다가 해방을 1년 앞둔 1944년 6월 66세의 나이로 청주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삼형제 중 둘째였던 백초월의 유일한 혈육은 막내 동생의 아들 백남기(1919~91)였다. 백남기씨의 아들 백외식(68)씨는 “우리 집안에도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있다고 어릴 적 아버지가 항상 말씀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백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삼촌(백초월)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고 얘기해 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20대 초반일 때 집이 너무 가난해 쌀을 구하러 다니다 삼촌(백초월)은 스님이니까 혹시 절에 가면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삼촌을 찾아갔다고 했어요. 아버지는 삼촌이 마포에 있는 포교당(극락암)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서울까지 갔대요. 마포에 도착했는데 하필 그때 삼촌이 포승줄에 묶여 일본 경찰에 연행되고 있었던 거예요.

 

영문도 모른 채 삼촌이 연행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옆에 있던 친척이 여기 있다가 큰일 난다며 아버지를 떠밀어 도망쳤답니다.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삼촌을 본 것이죠.”

1980년대 중반 독립기념관 건립을 위한 모금운동이 시작되자 백남기씨는 “이름 석 자라도 찾아 드리자”며 아들 외식씨와 함께 본격적으로 백초월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휴일이면 전국의 사찰을 구석구석 찾아다녔다. 백초월을 기억하는 스님들을 만나면 자필로 그 내용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손도장을 찍어 주는 스님도 있었다. 백씨는 “아버지는 스님을 만나야 한다며 아무리 험한 산을 갈 때도 구두를 신고 정장만 입고 다녔어요. 한 번은 산속에서 탈진해 죽을 뻔한 적도 있었죠”라고 말했다. 백초월의 흔적이 있는 곳이면 사찰뿐 아니라 전국 어디든 찾아갔다. 백씨는 “백초월의 글씨나 그림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기 위해 내복이나 쌀을 사 주기도 하고 한 번은 중매를 시켜 준 적도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몇 년간 모은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했다. 그 결과 1986년 정부에서 건국포장(건국훈장 다음 가는 등급)을 줬고, 4년 후 90년에는 재심사 뒤 애국장(건국훈장 가운데 넷째 등급의 훈장)으로 등급이 높아졌다.

백씨는 지난해 8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백초월의 서예 4점과 사군자 3점을 진관사에 기증했다. 신문으로 진관사에서 태극기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백초월과 관련 있다고 느낀 그는 곧바로 진관사로 향했다. 백씨는 “백초월은 독립운동을 하다 감옥에서 돌아가신 유일한 승려였다”며 “백초월의 독립운동 정신이 후손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임현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