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들은 한국의 역사를 징검다리 역사로 비유했다. 또는 칡뿌리 칡덩굴의 역사라고도 했다. 징검다리(□∬□∬□∬□)처럼 징검징검 돌다리 놓이듯 큰 마디만 들어나다가는 중간의 역사는 물에 흘러가버리듯 유실(流失)되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칡덩굴 같이 묻혔다가는 드러나고 또 묻히는 끈질기고도 강인한 역사요 칡넝쿨이 성장하여 온 산을 뒤덮듯 온 세계로 뻗어 나간 역사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여름이 지나고 나면 무성했던 넝쿨은 낙엽져서 사라지고 굵고 튼튼하고 둥그런 덩굴만이 땅속에 파묻히기도 들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산야(山野)에는 칡덩굴과 넝쿨이 번성하고 있는데 우리말에는 의미상으로는 똑 같지는 않지만 덩굴과 비슷한 발음으로 둥글(둥그런, 땡그런), 덩글(덩그런, 뗑그런, 높은), 둥구리(丸木, 장작), 등걸(죽은 고목의 둥그런 뿌리), 달구(바퀴), 떼굴떼굴, 대갈(대가리), 단골, 단군등의 비슷한 말들이 무수히 있고 ‘덩굴한 햇님’이라는 과두문자(文字, 올챙이글자, 알글자)가 기록되어 출토되었다는 석판(石板)의 기록과 같이 ‘덩굴’이라는 발음은 우리의 역사적 대명사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메르어(語)에도 Din-gir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몽고말로 Tengri(Tengeri라고도 쓰이며 텡그리, 뗑어리, 뗑아리로도 들림), 터키말로 Tang-li(탕리), 지나어로 Tien-i(天帝)로 변음되고 한국에서는 ‘덩글’, 단골, 단군을 뜻하게 된다. 모두 유음유의(類音類意)로서 하늘, 신(神), 태양, 알(卵), 높은, 머리, 임금(王)이라는 뜻이 있으며 지명으로는 Tengri산(天山,Tengeri로도 쓰이며 뗑어리, 뗑아리로도 들림), 돌궐(터키), 타클라막간(Takula로 적기도 하는데 곤륜산맥 남쪽 Tibet과 청해성 접경지역에 잇는 산맥)등이 있고 인도말로 신을 뜻하는 Thakur에서 Tagore라는 시성(詩聖)이 태어난 가문(家門)의 성(姓)이 유래하였으니 결국 시성 타골은 우리의 단군과 언어학적 관련성을 갖고 있다고 보겠다.
Din, Ding, Ten, Teng, Tan, Tang, Tien의 발음은 덴, 텐, 텬, 천(天)이라는 하늘을 나타내는 어근(語根)이고 ir, er, ur, eri 등은 얼, 알, 울의 정(情), 난(卵), 하늘을 의미하므로 두 음절을 합하여 신이나 하늘 같은 신성(神聖)을 뜻한다고 보겠다. 또는 Din, Ten, Tan의 전음절과 gir, ger, gur, geri, kur의 후음절로 분리해 보면 하늘(天)의 뜻과 수메르어의 gur(屈) 또는 kur(丘陵, 山, 東方)로서 신성한 거소(居所)나 높은 성산(聖山), 해뜨는 곳(日出之方)으로서 역시 신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ir, er, ur, eri와 gir, ger, gur, geri, kur등이 동음동의(同音同意)의 비음(鼻音, 콧소리)으로서 전음절의 천(天)을 받아 보강하는 알, 얼, 울등의 둥글음(環, 太陽), 높음(高), 정신(精神)등을 의미하게 됨을 알게 된다.
비근한 예로 우리는 눈알을 눈깔, 작은 알을 자갈, 큰알인 대알을 대갈(머리)이라고 하고 있으며 배알도 배갈로 발음하게 될지 모른다. 여기서 天 高 山 이 大 泰 卵(태양, 알) (달 月, 음달, 양달)과 진화과정에서 연관성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사적 관찰을 통해서 우리 역사상 국호인 배달, 고리, 고구려, 까우리(Caule), 꺼레이(Caray),알시라(Alsila)등의 국명이 생긴 배경을 짐작하게 된다.
또한 덩그르(Dingir) 또는 덩굴의 그-ㄹ, 구-ㄹ(丘,屈)에서 원시씨족들이 수렵생활을 하면서 짐승들이나 외적이 접근하기 어려운 절벽이나 고지의 덩그런 굴(屈) 혈(穴)속에서 기거하던 생활을 연상하게 되며 차츰 골(忽,홀)로 내려와 농경을 시작하면서 산골(谷)의 시골이 이루어지고 이 단위가 점점 커지면서 부족의 고을(邑, 城邑)로 확대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부족들의 고을이 지역적으로 연합하여 문화공동체가 형성되면서 평평한 대지의 토양인 평지 삼림지대에 불을 질러 벌로 만든 벌판인 평양(平壤)에 궐터를 잡아 큰 궐(大闕)을 짓고 여러 부족중에서 힘쎈이(쎈이-仙人, 선비)이면서 하늘(一)과 땅(一)의 그 가운데(一) 사람을 연결(ㅣ)해주는 역활을 하는 사제(司祭)였던 왕(王)이 옛날의 굴(屈)대신에 그 궐(闕)속에 거처하게 되었다.
궐터는 통상 높바람이나 하늬바람을 막아주는 뒷동산을 둔 양지 바른 곳에 자리하였으니 궐산(厥山)또는 길게 궁홀산(弓忽山)이라 불리어지게 되고 이것이 바로 구월산(九月山)으로 길게 풀어서 쓰게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주땅에는 궁홀산, 궐산들이 있고 수많은 홀(忽,골谷)이 있으니 할인홀, 홀본(忽本, 卒本), 홀빈(忽濱, 물가빈; 골나루; 하얼빈), 미추홀등이 그것이다.
太白文化의 형성
칡덩굴의 역사는 뗑알, 텡글, 타클, 굴, 골, 고을, 궐, 궁훌, 구월산으로까지 연계되어 그 뿌리가 동북아대륙으로부터 중앙아시아,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한 전세계에 널리 퍼져있으면서 가운데에 있는 큰 강인 속알강(束末里:松花江), 성스런 강인 숭알강 숭아리강(束末里의 지나발음:松花江)의 골나루에서 처럼 대륙의 여기저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역사의 알속인 알이나 정신인 얼은 내 몸 속에도 들어가 숨어서 살아가는 굴이 있고 골이 있으니 높고 존귀한 알굴 얼굴이요, 알골 얼골이다.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짐작할 수 있고 덩굴을 파보면 역사를 추측할 수가 있게 된다.
만주벌판과 내몽고와 황하일대와 신강성에서 역사의 황무지, 지리의 황무지를 칡덩굴과 넝쿨로 다시 녹화하여 옥토화해야 할 것이다. 덩과 울, 굴, 텡과 알, 얼은 붙어 다니면서 하늘의 덩울, 하늘이 거처하는 굴로서 태양같은 알이요 얼이다.
대륙과 반도에는 여러 곳의 구월산이 있고 피양이 있으며 패수, 살수, 아리수가 있다. 한강도 낙동강도 압록강도 송화강도 요하도 북경 근처의 난하도 알(卵)의 수(水) 아리수, 아리라, 아리가람이라 했다. 윤성범 박사는 미국에서도 네가람, 네가라의 뜻에서 나이아가라가 나왔다고 풀이했다.
따라서 지금은 고유명사화 된 인명 지명들이 먼 옛날에는 보통명사나 형용사로 쓰여졌고 역사의 진척과 함께 고유명사화 하여 지명, 인명, 국명으로 이동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단군도 보통명사이며 우리가 그냥 단군으로 알고 있는 1세 단군은 한검단군 또는 단군왕검으로 불러야 옳다.
하늘 가운데 덩그렇게(‘덩글’하게) 높이 떠있는 둥그런(‘둥글’한) 알, 빛을 주고 생명의 원천이 되는 알과 같은 둥근 태양, 높고 크고 알듯말듯한 ‘아리’송한 태양, 따갑기도 쓰리기도 아프기도 한 ‘아릿’한 태양의 광열, 여기서 한’알’님에 대한 신앙이 생김으로써 한얼님, 한울님, 하느님, 하나님이라는 유음(類音)의 하늘을 숭배하게 되고 알에 대한 난생신화가 나타나게 되며 ‘알’,’아리’라는 말을 독립적으로나 혼합하여 쓰는 보통명사 고유명사 형용사가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태양의 밝음과 광열로 인하여 밝, 벌, 불의 태백(太白)문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밝 : ㅂ + 알 + ㄱ― 白+卵+高, 聖:박혁거세는 전형적인 상징
벌 : 초목을 불로 태워 들로 만듬, 태양이 종일 비치는 들판- 火光+野:만주벌판, 황산벌, 달구벌, 서라벌
불 : 불구내(불그레)―赤+川
멀리 중앙아시아에는 알타이(Altai, 몽고어로 황금을 뜻한다함)라는 알태(卵泰)산맥이 있고 그 남쪽에는 뗑아리(Tengeri, Tengri, 天山)산맥과의 사이에 DzungAria(中亞利亞), SungAri(崇牙里,聖阿里), Zangaer, ZungAr(聖卵)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 매우 넓은 알같이 둥그런 분지(盆地)가 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만주에도 Sungari(束末里:松花江)가 있고 그 외에도 아리수가 여러 군데 있으니, 여기서 우리는 속아리-숭아리-Zungari,Dzungaer, Sungaria, 역시 속아리-송아리, 송하리(松花里), 속말리(束末里)-소머리(쇠머리, 牛頭, 牛首里)-슈머리(소머리의 지나變音)-수마루(日丘,해뜨는 언덕, 스-수-시-사=해, su는 Sun의 古語)-수메르(Sumer)등의 전음유음(轉音類音)을 보게된다. 결국 덩그런 알인 태양이 농경민족의 소머리로까지 연관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소머리에서-쉬머리-쉰머리-힌머리(白頭,히말리아)로 유추하면 지나치다고 생각될까.
남쪽에서는 소를 쉬, 또는 시라고 발음하기도 한다. 쇠파리도 쉬파리, 시파리로 돌리고 쉬죽을 시죽,’소먹인다’가 ‘시민다’로 되어버린다. 우리가 높은 사람, 대가리쟁이를 부를 때 그냥 머리라 하지 않고 철교(鐵橋)다리라고 중복하듯이 반드시 우두(牛頭)머리라고 중복하게 되는 연유를 유의하게 되며, 혹자는 ‘우뚝’솟은 ‘우뚝’선이라는 뜻의 웃뚝머리가 우두머리로 됐다는 설도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고대신화나 종교, 설화, 지명 등을 보면 알과 우두머리 혹은 소와 우두머리, 결과적으로 알과 소가 연관되는 사실이 많다.
상세한 예를 다 들 수가 없지만 수많은 난생신화를 비롯하여 인도와 불교의 소에 대한 신앙, 신농씨(神農氏)의 인신우면(人神牛面)에 대한 설화, 한국과 일본에 수없이 분포되어 있는 우두 또는 소우자(牛字)가 들어있는 지명, 소를 의미하는 수메르의 도시 우-ㄹ(ur)도 아-ㄹ(卵)와 유음인 것에 유의할 점이고 알파벳의 첫글자 A도 소머리를 본뜬 것이라 한다.
Ural 산맥이나 Aral해, Ararat산과 그 북쪽 고원에 있는 Armenia(알뫼)라는 여러 지명도 높음과 신성을 나타내는 알, 소, 산등과 관련성이 있는 것 같고 Asia도 솟아오르는 둥근 태양처럼 알해(環日)인 A-rs, A-sa, A-rsia로서 卵始, 卵日, 環日, 日新, 牛首등의 뜻이 있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스,수,시,사라는 발음자체가 동쪽, 새로운, 신성한, 해(太陽), 소(牛)등의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며, ‘아시’는 순수한 우리말로서 처음, 초벌이라는 뜻도 된다.
Tashkent라는 지명에서도 해(Ta)와 성스러움(sh)과 아시(ash)의 발음이 중복되어 있으며 여기에 소를 부리는 미작(米作)전문의 한민족이 이송되어 살게 된 것은 무슨 인연인 것 같기도 하다. 인종적으로나 언어학적으로 핀란드(芬蘭)의 핀족(Fin族)과 같은 계통의 몽고인종인 에스토니아인(에스토니아공화국의 140여만명), 극동시베리아의 북부부터 알라스카 카나다를 거쳐 그리랜드까지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살고있는 46,000여명의 에스키모인도 에스라는 발음에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물론 남쪽의 인디안들이 날고기를 먹는 족속이라는 뜻의 인디안말로 에스키모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고 에스키모 본인들은 자기들을 이누이트(Innuit)라고 부르고 있다지만, 인디안말이든 에스키모 고유의 말이든 아-ㄹ(A-r), 아스(A-rs), 아시(A-rsi), 에스(E-rs, Es),아씨 또는 애씨(ash)라는 발음의 공통성을 지나칠 수 없다.
중동에서도 아씨라아, 씨리아를 위시하여 이스라엘이라는 국명도 아시라엘, 아스라엘, 에스라엘, 애씨라엘의 변음이 아닌지 의심스러우며, 이밝이아반도(이베리아반도)의 에스파니아, 스페인도 그런 유음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에서’라는 발음의 접두, 접미사, 독립된 인명 지명들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인의 조상이 황인종이라는 설이 유력하며 히브리(이브릭)어는 그 구조가 인구어(印歐語)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심지어 아메리카 인디언이 이스라엘 민족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미국 교수들이 있었는가 하면 근래에는 한국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한 맥킨토슈 교수 같은 사람도 있었다.
'알’의 세계분포
우리말에 숭고하고 성스러운, 높은, 처음이라는 뜻의 낱말은 대부분이 ㅅ(시옷)자 발음이 많음을 본다. 신(神), 성(聖), 숭(崇), 선(仙,善,禪), 산(山), 쉰(白), 시(始, 視), 설(正初), 살(歲, 肉), 소도(솟대, 수두), 생명, 소생, 소(牛), 성(性, 姓, 城), 선생, 선비, 사랑, 새(鳥新), 새벽, 시바람, 새녘, 숨쉼(呼吸)등 한이 없고 이것이 ㅈ, ㅊ, ㄷ, ㅌ, ㅎ 발음으로 전음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전음의 예는 생략하기로 한다.
America에서 아음(牙音)이 약해지고(Silence) 뒷음절에 엑센트가 주어’메리카’로 들리듯이, 솟아오르는 둥근 해를 의미하는 아-ㄹ스(A-rs), 아-ㄹ사(A-sa)등에서도 아음(A-r)이 탈락되면서 ㅅ(시옷)자 발음이 강조되었던 것으로 볼수도 있다. 따라서 인류의 언어는 엄마→마마, 아빠→빠빠, 속알→속살 알통→살통처럼 그 첫 발음이 초성(初聖)인 아-ㄹ(卵)과 관계되는 아음(牙音)으로부터 발전되고 다변화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아직 남아있는 알, 아리라는 말은 신, 성, 숭, 시(始), 대(大), 고(高)의 뜻을 가진 발음과 함께 앞뒤로 붙어서 쓰이기도 하고 독립적으로 쓰이기도 하면서 때로는 한알이 하늘, 한얼, 한울처럼 을, 얼, 울, 엘등으로 변화하던가 숨어버리지만 그대로 신, 성, 숭, 등의 뜻을 내포하는 말로 나타나던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중동지역에서는 알라, 할레루야 또는 알렐루야, 엘리, 엘로힘, 가브리엘, 이스라엘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구주에는 흉아리(凶牙里,Hungary)라는 민족명, 국명이 원형대로 남아있고 북극에는 베링해로 가서 축치(Chukchi)의 엘렌디(Elendi)영웅신화에까지 퍼져 있으며 잘 몰라서 그렇지 아마도 남북아메리카의 인디안 거주지까지도 퍼져 있을 것이다. 히말리아 또는 쉼알리아도 흰머리나 흰알 또는 성스러운 알을 뜻하며 Hindukush는 아마도 흰머리 두른 웅장한 성산(聖山)을 뜻함이 아닌가 생각된다.
구쉬는 백제 고어로서 귀중품인 구리(銅) 또는 금(金)을 뜻한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서 널리 분포되어 있는 알, 아리(아리수, 아리랑, 알라리등도 포함), 아시, 에스라는 발음의 말과 지명에서 공통되는 언어학적 역사적 배경을 더듬어 볼만한 것이다. 알과 머리와 소와 아시에 대해서 난삽하게 열거했으나 인류사의 시원과 흐름을 추적해 보는 한가지 언어학적 예로서 문제 제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밝(朴,白,不咸)이라는 소리와의 관계도 유의될 수 있다.
이ㅂ알ㄱ이아반도(이베리아반도), ㅂ알ㅋ안반도, ㅂ알ㅋ우(바쿠), ㅂ알ㅋ트리아(동이트다. 벌어지다), ㅂ알ㄱ다드(바그다드), ㅂ앍ㄱ쉬호수(발하쉬호수), ㅂ알ㅋ알호수(바이칼호수), ㅂ알ㄱ한산 (불칸산), ㅂ알ㄱ해(발해), ㅂ알ㄱㄷ알(박달, 배달)등 불함문화론의 이러한 유사지명은 북구의 분란(芬蘭, 핀랜드)과 중동의 베들레헴을 비롯하여 이집트의 여러 지역까지 분포되어 있다. 결국 알, 아리문명론과 불함문화론은 언어학적으로 지역적으로 일치하게 되는데 김상일 박사가 쓴 한밝문명론이라는 책에서 거론되는 알, 감, 닥, 밝, 층변(層變)문명론을 되새기게 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알(卵), 아리(牙里), Zungar(聖卵), Sungari(崇阿利, 束末利)문명은 송화강, 황화문명을 비롯해서 서쪽으로는 수메르문명과 인더스문명, 이집트문명, 동쪽으로는 인디안문명의 알 즉 우두머리가 되고 우랄산맥에서 이동해 갔다는 Hungary 족이나 에스토니아인, 핀인의 조상은 아마도 그 원고향이 뗑아리산(天山)이나 Zungari분지가 있는 중앙아시아로 추측된다. 뗑아리나 중아리, 흉아리는 모두 같은 말이다. 에스토니아, 에스파니아, 이스라엘, 아씨리아, 에스키모의 접두어도 모두 아-ㄹ(A-r)에서 비롯된 아-ㄹ스(A-rs), 아-ㄹ시(A-rsi)의 태양이라는 말에서 나온 파생어로 보인다.
결국 알(卵)에서 아리, 엘리,얼, 울, 엘로, 한편으로는 아스에스아시애씨로 파생된 것으로 볼수있다. 결론적으로 보면 숭아리강이 있고 최초로 태양이 떠오르는, 동북아의 아시 대륙을 비롯하여 서쪽으로 중아리 분지와 뗑아리산이 있는 중앙 아시 대륙을 거쳐서 서 아시 대륙의 아쉬머리 소머리인 수메르와 아씨리아, 유럽대륙의 아시 땅(에스토니아, 에스파니아), 아리 땅(Hungary), 동으로는 에스키모가 있는 아메리카 대륙까지 알, 아리, 애씨, 에스와 연관되는 아리문명지대임을 보게 된다.
이런데서 바로 타골의 핏줄 속에 흐르고 있는 그 핵(核)으로서의 한국이라는 동방의 등불이 그의 영감(靈感)속에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대야발이 단기고사를 편찬하면서 서역을 수차 방문하고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만들면서 만주땅을 수십 차례 왕래했던 사실들이 대륙지방의 그 무슨 인연들을 대변해 주는 것 같다. 현대의 인류가 파헤치지 못했던 그래서 정사(正史)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고시대 그 어떤 역사적 사실이 칡덩굴처럼 땅 속 깊이 묻혀 있다가는 들어 날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현존의 문헌과 고고학적 실증만으로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묻혀있는 역사적 사실이 너무나 많다. 형이하만 가지고 논하지 말고 형이전의 형이상, 형이후의 형이상을 바로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를 직관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하시키거나 비상시키게 된다. 유대인이 금년을 아담기(紀) 오천 수백 몇 년이라고 우리가 보기에는 그거야 정말 허무맹랑해 보이는 것도 그들은 영광스런 민족사로 확신하여 쓰고 있는데, 우리는 1만년여의 한기(桓紀), 6천여의 개천기는 제쳐두고 심지어 오천년의 단기도 못 믿어워 안 쓰고 있다. 콩트, 버크, 랑케라는 서양 실증사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 나름의 학문적 기법이요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서양이라는 안경을 쓰고서 보지 않고 그 안경을 벗어 던지고 내 자신의 맨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지성과 상상을 사용하는 것을 부끄러워 말라. … 이성의 영역을 넘어 정신적 우주의 세계를 답사하기 위하여 신화를 사용하는데 너무 교만하지도 말고 너무 비겁하지도 말라 〈토인비의 「역사연구」 마지막 10권, Plato가 토인비에게 한 말〉.
신화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역사적 진실을 전달하는데 필요하고도 불가피한 표현의 방식이다(1948년 토인비가 Johns Hopkins대학 토론에서 한 말)
천부경의 始原性
산해경(山海經)에 천독국(天毒國)이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천독국을 덩굴(Dingir)이라는 말과 연관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풀이하는데 몇 가지 학설이 있지만, 천독국은 인도가 아니라 우리 나라가 천주모곡(天主母國)임을 뜻한다고도 한다.
우리에게는 조국(祖國), 모국(母國)이라는 말은 있지만 부국(父國,Fatherland)이라는 말은 없다. 모계중심사회의 영향으로도 볼 수 있겠지만 애비들은 안테나같은 상투를 틀어 얹고 헐렁한 바지가랭이를 대님으로 훌쳐 맨 단정한 차림으로 전사(戰士)로서 개척자로서 뛰쳐나가 천지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집안에는 할머니 어머니 밖에 안 남았으니 조국 모국은 있어도 부국이라는 말이 있을 수 있었을까(고구려 벽화의 무사복인 한복바지저고리는 원래 유목민의 복장, 전투복).알타이산맥 천산산맥 일대의 오지에서는 지금도 상투를 틀고 흰 옷을 입고 살아 가는 풍습을 가진 족속들이 있다 한다.
마찬가지로 모음 자음은 있어도 부음은 없다. 애비가 하는 말 자체가 부음이요 따라서 우리말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보유한 지구의 부음(父音)이었다. 한문화(漢文化)되지 않은 우리 고유의 말은 발해만 일대에 있었던 고대 아시아어의 원형이라고도 하며 그 중에서도 경상도 방언이 가장 가깝다는 설이 있다.
어린 아이(愛의 몽고 발음이라고도 함, 아버지가 山兒를 산속의 굴에서 내 쫓는 것이 가장 엄한 벌이었다고 함)가 울 때 할머니는 ‘애비 온다’고 겁주고 애기는 울음을 뚝 그친다. 애비는 호랑이 같이 지엄(至嚴)하고 보기 드문 무서운 존재였다. 백제의 싸울아비라는 말이 일본의 사무라이(武士)가 된 데서도 이런 면을 엿볼 수 있다.
여기서 하늘 존자( 字)로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의 비유에 대한 실습을 할 수가 없어서 아쉽게 생각된다. 처음에는 바깥에 있는 사방의 토지 ( )로 나가서 애비들이 개척하고 교화하고 다스렸지만 이것이 뒤집혀 져서 이제 밭(田)은 안쪽 중앙에 생기는 것이다 ( ). 즉 먹을 것이 바깥에 있었는데 이제는 안쪽에서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열국들이 이 땅으로 모여들었다. 그 대신 안쪽 중앙에 있던 ( ) 진리( ○ : 한사상 곧 천부경의 상징)는 바깥으로 전파확산( )되는 것이다. 이것을 손 바닥 뒤집듯 하다는 뜻에서 여반장(如反掌)현상 또는 여반장사상이라고도 하는데, ○(無極) □(方極)이 뒤집혀 △(太極) 즉 원방각 천지인(円方角 天地人) 삼극(三極 )의 원리로 윤회하는 것이다.
전지우전변화전(田之又田變化田)
정탈기우미반자(精脫其右米盤字)
요즘 이민 역류현상이 일어나고 있고, 역학가(易學家)들이 이민가지 말고 돌아 오라고 하는 것은 다시 한반도 일대가 중심이 된다는 이치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말 그대로 이민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동양순환사관을 비유해서 역사의 법칙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 모든 사상의 상징(Emblem)인 十亞弓弓乙乙田○등의 표시가 하늘존자( )에 다 포함되어 있는데 원(円○) 방(方□) 각(角△) 천부경의 원리를 나타내는 천부의 기호(:편의상 天符旗라 호칭하는데 上下八方十無極大道가 태양처럼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것을 뜻함)가 위의 상징을 다 포함하고도 독톡한 三·一철학의 원리를 과일의 씨나 알처럼 한 가운데 담고 있다.
원형의 씨알 3극의 색상인 파랑(天) 노랑(地) 빨강(人) 3원색(元色)은 각각 자유 평등 사랑(박애)을 뜻하는데 자본주의(자유) 공산주의(평등)라는 벽이나 방둑을 홍익주의(박애)라는 아리수로 무너트려 은하수처럼 한주의라는 흰색의 대하(大河)를 만드는 것이다.
태양에서 바라보면 지구는 팽이처럼 돌고 있는데 빨노파 3색 팽이를 돌리면 흰색으로 나타난다. 흰색은 평화를 상징하는데 그래서 천부기의 바탕은 흰색으로서 백의민족과 백두와 힌머리아의 기상, 평화스러운 사해동포(세계인류)를 의미하는 것이다. 천부기는 하늘존( )자 이면서 삼일철학을 담고 있는 씨알의 투명한 구체(球體)로서 ( ) 지나간 우리의 역사와 우리가 지향해야 할 역사를 철저하고 선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이로써 ○□△ 천부의 사상이 세계 모든 철학사상의 조종(祖宗)으로서 시(始)와 종(終)이 됨과 동시에 이들 모든 사상의 원리를 배태하고 있으면서 천부경으로서 모든 철학을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서양의 어떤 신학자들은 난해한 요한계시록이 성경의 오점이라고 하면서 성경에서 빼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 모양인데 성경은 요한계시록과 창세기, 출애굽기로 인하여 살아 있다고 모 조선철학자는 역설한 적이 있다(鄭命岳의 <生産論>). 성경에서 그런 것을 빼버리고 나면 성경은 성경이 아니라 유대인의 단순한 역사서요 문학작품에 불과할 것이라고 한다. 우연의 일치라고 말할지는 몰라도 요한계시록과 창세기는 우리의 천부경을 가장 순수하게 설명하고 있고 그것은 천부경의 입문서로서 지나치지 않는다고 한다(상세한 예시 및 내용 설명은 鄭命岳 저〈生産論〉의 ‘철학적 생산론’이라는 분장을 참고할 것).
역경의 하도(河圖)와 낙서(落書), 유경의 태극론, 도경의 무(無), 불경의 공(空), 그리스 철학의 원자론이 전부 천부경의 자연철학 또는 숫자철학에서 나왔다고 주장해도 하등의 하자가 없고, 선철학(仙哲學)의 천부경(天符經), 신고(三一神誥), 전계(參佺戒經), 구월초서(九月招書), 오행론(五行論)은 세계 모든 철학사상의 시원(始源)이다. 우리 풍습에는 선교적(仙敎的) 본질이나 색양(色樣)으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고 특히 장례의식에는 선교적 유습이 뚜렸하다고 한다 (정명악 저「생산론」 참조).
이때까지는 단군사상 (여기서 단군은 보통명사)이 개밥에 도토리가 되어 촌스런 것, 미신, 고리타분한 것으로 터부시 되었지만 이제는 온 세계 지식인이 한국의 역사와 철학을 배우고 공부하기 위하여 이 땅으로 몰려 들 것으로 보인다. 태교하는 심정으로의 기다림, 공기는 염증이 터지기 전의 아리함, 한 훼 두 훼 닭은 울고 때는 다돼 가는데 해뜨기 전의 마지막 어둑새벽이라고 할까. 판 밖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범인들은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는 판 밖에서 도적같이 찾아온다고 선철은 말씀하였다. 꿈틀대는 힘이 있음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천부경은 天鏡
백두영기(白頭靈氣)는 세계 만방으로 분출발산(噴出發散)하고 간역(艮域)의 무극대음(無極大音) 파장(波長)이 진동(振動)하며 동방(東方)의 무극대광(無極大光) 등불이 점화(点火)된다.(金柱鴻著「天符經과 宇宙變化」240쪽)
백두유신(白頭維新)이라는 시바람이 사방으로 불어 내려, 대분묘(大墳墓) 아사달 한얼빈(殯, 염할빈, 죽엄, 하늘의 무덤, 만주의 하얼빈은 러시아어로는 큰 공동묘지라는 말임)의 역사가 어느 날 되살아나서 천부의 철학과 역사가 한얼빈(賓 손빈, 인도할빈)이라는 칙사(使)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무주공산(無主空山) 별읍(別邑, 삼한시대의 소도, 솟대, 이념의 지배를 받지 않는 지역, 나눠짐이 없는 세상, 금일의 特區, 금강산 설악산 특구가 별읍, 別里의 성격이 될 가능성)의 산동 요동 호콩 두 개가 홀빈(忽濱) 골나루터로 모여드는 한얼빈(天使, 한민족)의 튀김판 쟁반 위에서 톡톡 튀고 고요하던 발해는 새벽이 지나고 옛 그대로 사실상의 밝해가 되가고 있다.
언젠가는 필자 나름대로의 천부경 투시경을 통해서 해석해 보고 싶은 과욕이 나오기도 하지만 천부경은 아무리 전체적 입체적 종합적으로 해석하려고 해봐도 불가능에 가까우리 만큼 여러 각도로 방대한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천부경이 어려워서 못써먹을 경서가 아니라 평범한 사고방식으로 단순하게 감당하기에는 그만큼 넓고 깊은 진보(眞寶)한 하늘의 글(天書)이요 하늘의 거울(天鏡)임을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이 유리 거울이라면 유경은 동경(銅鏡)이고 샤먼(巫敎 또는 仙敎)은 수경(水鏡)이며 불경은 석경(石鏡), 무지개, 신기루, Aurora등은 풍경(風鏡), 천부경은 천경(天鏡)에 비유되기도 한다.
성경이 시원스럽게 직반사(直反射)해주는 서양적 성격을 닮은 평면 유리거울(平面鏡)이라면 천부경은 은은한 반사의 표면을 가지면서도 내부가 투명한 극대극미(極大極微)의 구형체(球形體)로서 마음까지 비추어주는 상하팔방 시방원형(十方円型)의 깊이 있는 동양적 투명체거울(透明體 曲面鏡)이다.
우주태양으로부터 단세포 원자에 이르기까지 보는 이에 따라 시공(時空)의 규모가 일정치 않은 다양한 크기의 둥그런 알처럼, 아직 평면 거울밖에는 제대로 써보지 못한 둥그런 곡면체 투명경(曲面體 透明鏡)이다. 따라서 수십명이 써놓은 방대한 천부경 해설서(아마도 70∼80여 편)가 있어도 그것은 해석이 잘 되었다, 간결하다, 깊이가 있다라고 평(評)하기 보다는 거울을 보는 사람마다 자기 얼굴 생긴 대로 다르게 반사되어 나타나듯이 나름대로의 자기 얼굴로서 일리(一理)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평면경이 아닌 곡면경이나 투명경에 비추어지는 얼굴은 실물보다 홀쭉하거나 뚱둥하게 보이기도 하고 일그러져 보이기도 할 것이다. 거대한 곡면거울의 일단면만 본다면 평면거울 보듯이 누구나 쉽게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거대한 우주의 일단면만 보는것 같고 장님 코끼리 만지기이며 극미한 미립자의 입체를 평면으로 한꺼번에 보려는것 같기도 하다. 수백 페이지 수천 페이지 성경 유경 불경이 있어도 그것은 각자 다른 각도에서 살펴 본 일단면이지, 극대극미의 투명경 곡면경인 천부경의 총체성, 종합성, 입체성, 상징성에는 이르지 못한다.
81자라는 초고농도 압축의 경전은 지구상에 유례가 없다. 그래서 조선고추처럼 맵고 ‘아리’하다. 그러나 이 거울의 가치만이라도 인지하고 자신을 바로 비추어 보려는 시도만으로도 범상한 일일 수는 없다.
천부경은 옹글진 한 알(○)의 상징체로서 ‘아리’송한 그 무엇이 용(龍)이 물면 조화를 부리는 맑고 미묘하게 빛나는 여의주(如意珠)와 같다. 여기에서 모든 지엽적인 조화가 나온다. 이론만으로 이해하려다 보면 부질없는 일이 되고 나름대로의 이해를 글로 표현하려다 보면 상하사방 너무 깊고 넓어서 어찌된 일인지 자신이 이해하고 맛보던 것이 오히려 흐려지고 편협된 것이 되고 만다. 심하게 말하면 성경, 유경, 불경등도 이 조화의 획기적 한 단면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그 실상을 알 수 없는 불가해의 서(書)는 아니다. 그야말로 깨달음의 서(書)이다. 스스로의 깨달음을 요구하는 글이다.
정지(情智), 이지(理智), 영지(靈智), 무사지(無思智), 대명지(大明智)를 총동원한 생리(生理), 순리(順理)는 물론이요 시공과 의식을 초월한 성통공완(性通功完)의 달관(達觀)에 도달되는 깨달음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가르쳐서도 배워서도 모자라고 스스로 깨달아야 된다고 한다(自性求子- <삼일신고>의 한 구절). 가르침과 배움은 종국적으로 스스로 깨닫게 하는데 하나의 지름길을 제공하고 길을 안내해 주는데 불과한 것이다. 진리는 배움으로는 모자라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고 선철은 말했다. 천지가 와지끈하면 그 깨달음은 오래 가지 않고 하철(下哲)은 며칠, 중철은 며칠, 상철은 며칠이라고 증산은 명확하게 날자까지 꼬집어 말한 바가 있다. 무언교화(無言敎化)되어야지 말로서 다 표현하기가 힘들다. 더구나 하늘의 진리인 진서(眞書)야 배움보다 가르침보다 스스로 일깨워져야 제대로 된다고 한다.
한국의 역사와 철학이 이와 같다. 다만 배움과 가르침은 깨우치는데(깨도록 치는데)도움이 될 뿐이다. 한편으로는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 훔치 태을천상원군 …, 남무아미타불 …, 주기도문처럼 불경, 도경, 유경, 성경등에 있는 수많은 주문(呪文)이나 문구를 수백 번 수천 번 수만 번 연속하여 몇 년간 반복 외우다 보면 은연중에 육체와 정신에 변화가 일어나 깊은 신비적 묘미를 체험하여 득도(得道)하듯이 천부경 또한 그런 면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주문을 소리내어 염송하는 것은 건강에도 좋고 절대로 미신이 아니다. 스님도 목사도 신부도 똑같은 경문을 평생토록 반복한다. 천부경도 그런 방식으로도 각(覺)할 수 있고 각문(覺門)의 문지방에라도 들어갈 수 있다고 본다.
천부경은 설탕같이 달거나 소태같이 쓴약이 아니라 맹물같이 무미할지도 모른다. 그 무슨 보배라도 들어 있는가 하고 하나하나 껍질을 벗겨내다 보면 양파껍질 벗겨내듯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별것이 아닌 것도 아니다. 물이 없으면 목이 마르고 양파를 까지 않으면 먹지 못한다. 물맛처럼 다만 항상 할뿐이다. 그런 가운데 우주 창조와 생멸(生滅)의 담담한 진리가 들어 있다.
이 천부경이 홍익인간 이화세계로 나타나는 한국 역사철학의 농축된 상징이다. 어떤 이들은 홍익인간이라는 교육법 제1조의 교육목표가 애매모호하니 고치든가 빼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어느 서양 신학자와 같이 그 사람의 인식부족을 나무라기 전에 이 나라 역사교육 철학교육의 맹목성을 반성하게 한다. 소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나라정신의 교육을 되돌아 보게 한다.
그런데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듯이 단제도 신이 아닌 이상 천부경이 위작(僞作)이요 한단고기가 속서(俗書)라고 오판하는 실수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진서다 위서다 속서다 위작이다 사이비다 하고 싸워 본들 부처님 손바닥이다. 천부경은 부처의 손바닥이 문제가 아니다. 육안으로 보는 명경이나 심안(心眼)으로 보는 석경이 아니라 천안통(天眼通)으로 보는 천경이다 〔불교에서는 육안 천안(전자안)혜안 법안 불안으로 불안이 최고 단계의 심안인 것으로 보는 모양이나 여기서는 극대극미한 시공의 우주원리를 궤뚫는 천안통을 최고단계로 보았음〕. 철리가 깊고 이치에 타당하면 하늘의 진리가 담긴 진서요 비록 사마천이나 김부식 토인비가 썼더라도 이치에 맞지 않으면 사람이 조작해 본 사이비 속서다. 요는 보는 눈이 문제이다. 실제적인 저작자가 누구인가 하는 사실을 밝히는 작업목적도 때로는 필요하겠지만 내용 면에서의 가치를 중시해야 할 것이다. 한단고기를 계연수가 썼으면 진서이고 이유립이 합편했으면 몹쓸 위서로 내팽개쳐야 할까? 모두 허황한 싸움들이다. 사실과 이치에 부합되느냐 안되느냐 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어린아이가 하나님이 높은가 부처님이 높은가라는 질문을 했다 하자. 그러면 되물어 보라. 로마의 하늘이 높은가 인도의 하늘이 높은가? 다 같은 한알이다.
고급성직자와 고급무당
어떻든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천부경같은 하늘의 진리를 깨달은 고급 무당(巫堂)들이었다. 그들은 하늘(―)과 땅(―)을 연결(巫)해 주는 사람들(人人)이고 풍류신선도를 하는 풍류무당 선인(仙人)무당들이었다. 속세의 타락된 무당들은 지엽적 세기(細技)로 상도(商道)의 사행(邪行)으로 빠져 들었으나, 최고의 학술을 논하고 연마하며 의술과 장인기교(匠人技巧)를 가진 엘리트 무당들은 나라가 위급시(危急時)에는 전장(戰場)에 나서는 동이무장(東夷武將)들이요 때로는 명산대천을 순회하면서 풍류를 즐기는 천지화랑(天地花郞) 선인(仙人)들이었다.
그들은 신선도인으로 동이교황청(東夷敎皇廳)의 성직자들이었다. 천신강임(天神降臨), 지모승화(地母承華)의 기운을 중보(仲報)해 주기 위하여 음주가무(飮酒歌舞) 천제의례(天祭儀禮)하는 살짝 취한 신바람꾼이요 주술사(呪術師)이며 엄숙한 사제(司祭)들 이었다.
그들은 높이 솟은 곳에 솟대를 쌓고 서북쪽을 향하여 제례(祭禮)를 했다. 서북쪽은 조상의 조상이 내려온 곳이기에 부조(父祖)의 땅에 대한 무의식적 흠모요 자연발생적 향수(鄕愁)이며 높바람 하늬바람 불어닥치듯 몰아쳐 밀려오는 그쪽의 도둑을 경각(警覺)코저 하였다.
소나무 위에 박달나무로 만든 기러기 형상 3마리를 만들어 얹어 놓고 때 찾아 오가며 방향을 잃지 않고 높이 나르는 기러기 정신을 일깨웠다. 그들은 서양종교처럼 ‘맹신적 믿음’으로 제 정신 못 차리는 신의 노예도 아니며 생명의 존엄을 티끌같이 생각하는 물질의 노예도 아니었다.
하느님을 두려운 존재로 멀리하지 않고 조상의 조상으로 가깝게 생각하여 천지신명의 뜻에 융합되는 ‘근신적 지킴’으로 정성껏 제천(祭天)함으로써 조상의 나라에 대한 충(忠)을 일깨우고 조상에 대한 효(孝)를 실천하였던 것이다. 천제를 지내는 기간 중에는 간간이 노래와 춤으로 신명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신명(神明)나게 신(神)나게 흥이 나게 국중대회를 열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껏 모시며 사람끼리는 서로 도와 함부로 살생을 하지 않고 산천초목에 신성(神性)이 있음을 알아서 지신(地神)을 숭배·위로하고 동식물과 자연을 애호하고 물건을 소중히 여겼다. 이런데서 숭천(崇天) 경조(敬祖) 애인(愛人) 애물(愛物)의 인간 정신을 함양하였고 중물사상(重物思想)과 의용애(義勇愛)정신이 나오고 효와 충 화랑오계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한인 한웅 단군도 자부선인 발귀리 을파소 … 고구려 신라 백제의 군왕도 조의선인(旨衣仙人) 화랑도도 모두 신선도인이요 엘리트 무당들이었다. 원효 고운 도선 일연 묘청 무학 세종 충무공 북애자 퇴계 율곡 다산 수운 일부 증산 홍암(弘巖) 소태산 단재 정인보 박은식…… 모두들 그 무엇에 미친 고급 무당들이었다. 강신(降神)무당 접신(接神)무당처럼 신접술(神接術)을 부리는 세기(細技)무당만이 무당박수가 아니라 이들 선인(仙人)들은 신접술을 안써서 그렇지 쓸 수도 있는 고급 무당들이었다. 한국인들은 지구상에 드물게 신명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한사상에 미쳐 횡설수설하고 있는 이 필자같은 사람에게도 무당기는 있다. 낸시도 무당기가 레이건도 박수기가 있었는데 엉덩이에 조선반점(몽고반점)을 띄고 배달민족의 핏줄을 타고난 사람치고 무당끼 신명끼 없는 사람 있을까.
따지고 보면 어떤 종류의 사람이건 점을 친다고 한다. 미국의 나사(NASA)에서는 인공위성 발사 직전에 인디안 무당이, 소련에서도 유명한 시베리아 무당이 굿(Good fortune, 푸닥거리=풀이+놀이)을 하여 행운을 빌고 미국의 지난번 가뭄에는 인디안 무당이 굿을 했다는 해외토픽이 있다. 에스키모에게도 에스키모 병(病)이라는 신내림·신들림 현상이 있고 몽고나 티베트의 라마족 레이족 네팔의 셀파족(동방에서 온 사람이라는 뜻)이 모두가 동이(東夷) 무당의 혈통들이라 한다. 알타이 천산일대에는 아직도 상투를 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한다. 굿(Good fortune)에 대한 이야기와 타락된 샤먼과 고급샤먼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할 수가 없다. 다만 사물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고 존재해 오게 된 긍정적인 실상을 볼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원자탄 한 방으로 로마가 불바다가 되었다고 치자. Batican의 명맥이 끊어지고 1000년 2000년이 흘렀다고 가정하자. 그때의 신부나 목사가 오늘날의 샤먼 무당이 안된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벌써부터 이 땅의 기독교는 목사가 뭐라고 가르치던 샤먼화 되어가고 있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샤먼의 분위기 속에 젖어서 살아온 이 백성에게는 그것이 정상이며 그렇게 안되는 것이 비정상이다.
지금의 샤먼은 교의(敎儀)와 교리(敎理)와 용궁(龍宮)을 잃어버린 무체계(無體係)의 상태이지만 아시아의 황금시절에는 금일의 신부 목사와 다름없는 책임있는 성직자였으며 동북아의 숲속은 동이 교황청의 성역이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샤먼을 단순한 미신으로만 볼 수는 없는 바, 절(寺)이라는 말도 삼신(三神) 혹은 산신(山神)을 모시고 절하는 곳을 절(寺)이라 했고 한웅(桓雄)을 모시는 한웅전을 대웅전이라 했으며 수두(蘇塗)의 스승님을 줄여서 스님이라 부르는 우리 고유 신앙의 용어이었는데도, 불교가 침투하여 도용(盜用)함으로써 오늘에 와서 마치 원래 불교 용어였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고, 우리 고유의 하느님 하나님을 기독교가 들어와서 우리말을 차용하니 주객이 뒤바뀌어 자라나는 아이들은 그 근원을 모르고 마치 본래 기독교의 하느님 하나님으로 잘못 알게 되듯이 샤먼의 참뜻도 곡해되고 착각하고 있다. 샤먼(Shaman)은 살만(薩滿:보살이, 물살 가득하다)의 만주 발음으로 원래 삼한(三韓) 또는 삼신(三神)인데 근세 서양 선교사들이 만주에 들어와서 그들의 무당놀음을 보고 질문하였으나 그 무당들이 고급 Samhan(삼한, 삼신)의 진수를 몰랐거나 체계적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었고 따라서 피상적인 외양적 행위만 보고서 미신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래 종교란 도(道)이다.
옛날 이야기다. 내가 마포에서 넓은 한강을 가로질러 영등포로 볼일 보러 건너 가는데 처음에는 샤먼이라는 뗏목을 하나 붙들고 건너기 시작하였으나 곧 불교라는 거룻배가 하나 떠내려 와서 거기에 올라 탔다. 조금 더 나가니까 유교라는 목선을 만나서 다시 거기에 옮겨 탔다. 때로는 거치른 물결도 헤치고 잔잔한 물결도 지나면서 뱃노래 부르면서 뗏목과 거룻배도 재산이라 끌고서 건너갈 즈음 이번에는 기독교라는 요란한 돛배가 와서 또 옮겨 탔다. 피안에 닿아서 이것들을 놓아두고 백사장을 걸어서 내 볼일을 보고자 한다. 그런데 ‘삼한이즘’은 내 목덜미를 꽉잡아 낚아채고 불교는 내 오른쪽 다리를 붙들고 늘어지고 유교는 왼쪽 다리를, 기독교는 팔을 비틀고 늘어진다. 모두 일역(一役)을 담당해 왔는데 왜 공짜로 가려느냐 선가(船價)를 톡특히 내놓으라고 협박 반 회유 반이다. 선가든 뭐든 조금 기다려라. 일보고 돌아와서 다시 건너간다. 그 때 틀림없이 한 몫을 주지. 미운 놈 고운 놈 가리기 힘드니 선불유 삼위일체 한 몫으로 주지!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맑은 한강물이, 한알속에 감싸여 있으면서 그 안에 한알이 담겨져 있는 아리가람 아리수이며 아리수의 존재를 인식하는 한민족이라는 주체가 있게 되는, 한철학의 본 바탕이다. 강물은 자연이다. 천지인(天地人) 자연은 물처럼 흐른다. 알이라는 아리수의 한알철학 혹은 천지인 세 자연이 하나가 되는 커다란 한철학은 물처럼 바람처럼 자연에 거슬리지 않고 서로 조화하면서 흘러가는 풍류의 철학이다. 물은 돌이나 모래를 씻어주고 돌이나 모래는 물을 씻어주며 바람은 나무를 씻고 숲풀은 바람을 씻으며 사람은 물길을 다스리고 물길은 사람을 먹여 살리면서 서로 조화하여 자연은 흘러간다.
개천사상(한사상)이 이처럼 밝달도(바람풍, 달월-풍류도,배달도)라는 풍류신선(神=자유, 仙=평화)의 도(道)로 형체화 되었는데, 이 사상에서 철학(한철학)이 나오고 이 철학에서 문화(한문화권)가 나왔으며 문화에서 문화의 얼인 종교(선교)가 나오게 된 것이다 (원래 우리에게는 종교라는 말이 없었으나 현대적 표현으로 선교라 부르기로 함). 천지인 우주자연이 하나로 조화되는 이러한 밝음의 도는 선불유(仙佛儒) 만교지도(萬敎之道)를 포함하면서 그 근원이 되는 도(道)로서의 선교(仙敎)는 무당(巫堂)이라 이름해 보는 직칭(職稱)을 갖는 수행선(修行仙)에 의하여 무교화(巫敎化 Shamanism 화)함으로써 본래선(本來仙)이 그 본(本)을 유지하면서 세류 따라 가미·변질·탈색되어 가는 것이다.
즉 샤먼-불교-유교-기독교라는 머슴이나 하인들을 고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때로는 그들의 등에 업혀 산도 넘고 물도 건넜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천사상(한사상)-한철학-한문화권-선교라는 풍류신선도적 자연철학 바탕위에서 무교 도교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원리가 파생될 수 있었고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며 나중에는 그것들로부터 고유의 선(仙)이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철학은 맑은 한강물 같이 고마운 줄 모르고 마시고 사는 무색무미한 아리수의 맹물철학 청수(淸水)사상이요 가물가물 가물 현자(玄字) 현수(玄水)사상인 것이다. 공기가 없으면 죽지만 있는지 없는지 관심을 안두듯 알듯말듯 크게 신경안쓰면서도 기본적인 그 무엇이 존재하는 아리수의 한철학 현수사상인 것이다. 현수가 현묘지도(玄妙之道)의 현학(玄學)이 되어 도교의 현학으로 변화하였은 즉, 선(仙)이 지나(支那)로 들어가 도(道)로 전락(轉落),역수입 되어 친정나들이를 한 것이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새벽녘의 맑은 정화수(玄水:淨華水) 한 그릇, 자리 깔아 상위에 정갈히 떠놓고 멀리 떠나 보낸 내 낭군 내 아들 몸 건강히 잘 있어 달라고 북두칠성님께 비는 것이다. 그 현수(玄水)의 정성어린 염파(念波)의 파장이 지어미의 지극한 뇌파(腦波)를 싣고서 낭군과 자식의 뇌리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나’라는 ①본성(本性)은 하느님(부모님, 조상님)이 주신 것이요 선천 후천으로 주어진 ②이성(理性)과 ③감성(感性)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진 나는 아직도 음양이 갈라지지 않은 상태의 모수(母水)인 알(卵)의 수(水), 아리수라는 무극(無極)의 현묘(玄妙)한 자연철학 바탕 위에서 ①높은 이상으로 날아보고자 기러기와 학을 연상하고 ②무병장수 하고자 단(丹)을 연마했으며 ③웃으며 살아 보고자 가무음주 하였고 이것을 중생(衆生)과 함께 실천하는 과정에서 여광여취(如狂如醉)하기도 무당이 되기도 하였으니(一夫와 증산은 여광여취 무당노릇 많이 하였음) 이것이 곧 풍류신선의 철학 생성 배경이다. 이런데서 아리랑이라는 구슬프면서도 염원의 한이 서리고 생명이 율동 치는 격조 높은 민요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며 ①하늘을 스승 삼고 ②자연을 벗삼아 ③그 속에서 놀 줄 아는 -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워 있어도 즐거움이 또한 그 안에 있으니 …(반소사음수하고 곡굉이침지라도 낙역재 기중이니…)라는 정도의 풍류신선의 경지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①날고자 ②오래 살고자 ③웃고자하는 인간승화의 욕망이 천(天), 지(地), 인(人), 삼재(三才)의 진리를 ①알고자(아릿함의 실상을 보고자, 아리고자, 알이 되고자) ②찾고자 ③얻고자 하여 수행선(修行仙)을 하니 이것이 풍류도요 신선도며, 속인은 ①돈, ②권세, ③명예를 위하여 욕심을 내고 심술을 부리고 샘을 내지마는 선인(仙人,선비)은 ①진리에 입각하여(인식론) ②존재가치를(존재론) ③생각했던 것이다(가치론). 이것이 삼일철학하는 자세요 곧 풍류신선도다. 술에만 얼근(얼이 근질근질)하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얼큰(얼이 큼직)하게 취하는 것이다. 곧 진리에 미친 풍류무당 신선무당이 되는 것이다.
맹신적 믿음의 서방 종교적 맹점과, 우리의 근신적 지킴 및 수행의 선도(仙道, 禪道)는 차이가 난다. 우리에게는 원래 종교(宗敎)라는 말이 없었다. 종교의 교(敎)가 아니라 구태여 이름 붙인다면 종도(宗道)라 할수 있는 도(道)는 있었고 종학(宗學)이나 철학(哲學)이라 할 수 있는 학(學)은 있었다. 우리는 교(敎)의 ‘믿음’이 아니라 도(道)나 학(學)의 ‘지킴’이나 수행(修行)이나 수학(修學)이 있었다. 일상생활이 ‘지킴’의 연속이었다. 일상적 ‘지킴’의 도는 실상(實相)이 있어도 믿음의 교는 허구의 신기루가 되기 쉽다. 심지어 신사들이 지키는 신사도도 실상이 있다. 도는 어느 특정 나라나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고 모든 인류의 이상(理想)이며 절대의 경지다. 도는 특정 종교도 사상도 아니고 만교(萬敎)의 길 일 뿐이다. 옛부터 도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 했다. 말이나 글로써 이해되는 것은 아니며 그저 만유(萬有)의 근본(根本)일 뿐이고 전체의 통칭일 뿐이다. 도를 철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철학이라고 하는 어원도 언어도단과 같다. 철학(哲學)의 철(哲)자를 파자로 풀어보면 절구(折口)학이 된다. 입으로는 불가능한 학문이란 뜻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철학이나 도는 본질로 가는 길이며 사실 그대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서양철학의 변증법은 조직적인 것 같지만 논리를 위한 논리의 전개로 결국 궤변에 빠지고 만다. 공산주의 유물 변증법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도는 추앙이라는 신상(神像)보다는 지킴, 묵조선(默詔禪), 단(丹), 화랑도 등 여러 형태의 길(行路)이 있지만 교는 경전이 많고 추앙하는 신상이 있다.
아무리 말이 많아도 필경에는 말이 없는 진실로 행할 뿐이다. 말이나 글이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절대자니 유일신이니 아무리 소리쳐 구해 보아도 절대차원의 본질은 오직 묵묵히 행하는 자 외에는 얻을 수 없다. 설령 대답이 나오고 어떤 모양이 보였다 해도 그것은 잠깐의 환상이지 절대경지인 묘명(妙明)의 실상 그 자체가 그에게 임한 것은 아니다.
도에는 전당(殿堂)이나 신전(神殿)이 필요 없이 우주가 전당이요 가슴이 신전이지만 교에는 교당이 무성하다. 도는 침묵이지만 교는 요란한 가르침의 소리를 낸다. 도는 두루 통(通)하는 보통(普通)사람을 만들지만 교는 말많은 사람을 만들기 쉽다. 도는 지식을 따지지 않으므로 ‘앎’의 차등이 없지만 교에는 지식의 우열이 뚜렷하다. 도는 믿거나 말거나 그대로 있지만 교의 사상은 유인이 심하다. 도는 자연을 그대로 보지만 교는 신비롭게 본다.
동방의 득천(得天)이 눈앞에
라즈니쉬는 마음을 부정하고 자연에 거역하면 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고 했다. 마음을 긍정하고 자연을 거슬리지 말아야 도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노자의 사상이 그것으로서 그렇게 행함을 무위(無爲)라하고, 그렇게 행하는 자를 무위행자(無爲行者)라 했다. 인위적으로 어떤 개성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따라 자연 따라 무심하게 자연스럽게 행위하라. 행위자가 아니고 그저 수동적으로 따르라. 수용성(受容性)이 되어라. 고체가 아니고 유체(流體)로 남아라. 선별적이 아니고 포괄적이 되어라. 저것이거나 이것이 아니고 전체이며 그대로이다. 지금 이 순간 이대로이다. 자기의식(我執)이 없이 철저하게 무아(無我)가 되는 공(空)으로 돌아가라는 이야기다.
이에 비하여 일반 종교는 대개가 그 가르침이 심리술이 아니면 최면술에 불과하다. 노자적인 도안(道眼)이 그대로 다 옳다고는 할 수 없으나 진공(眞空)의 도론(道論)으로 본다면 오늘날처럼 인위적 행위로 자연을 파괴하고 도덕이 타락된 세상에서는 소극적이 아니고 건전한 어느정도의 무위도(無爲道)가 바람직하다.
진공(眞空)의 이치(理致)를 줄인 말인 진리(眞理)라고 하는 것은 정리(正理), 무리(無理), 망리(妄理)가 있는데, 과학적인 이치가 있는 것은 정리, 도(道)와 해탈은 이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기적이나 신비처럼 이치 초월적인 점도 있으므로 무리, 허깨비가 보이거나 헛소리를 하는 등 허망하게 생기는 정신환각증은 망리에 속한다. 도가 무리를 다루기도 한다면 신을 숭배하는 일반종교는 대체로 다 망리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종파에서는 그럴듯한 교리와 함께 문공부에 등록할 수 있게(?) 형태를 갖추기 위하여 이름은 교라 붙이고 때로는 신상도 모셨지만 그 성격이 선도(仙道, 禪道)적인 대종교 등을 비롯한 한국의 선도와 불교의 불도(佛道)등은 진리의 삼차원을 다 다루었다고 보겠다. 도 닦으러 간다 불도 닦는다 하지 부처 믿으러 간다 부처 믿는다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노자와 라즈니쉬는 마음을 긍정하고 자연스럽게 민감하게 깨어 있으라 했다. 매사에 소극적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마음(摩陰)과 자연에 순응하면 도의 문이 열린다<千明一 「空無虛」 P.27, 314∼318 참조>. 이렇게 말한다 해서 필자나 동서양의 어느 철학자가 이미 도의 문을 열고서 구제를 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한강을 다 건너고 모두 다 털어 버린 빈 마음으로 흰 백사장을 걸어 영등포에 가서 내 볼일을 보고 와야겠는데, 즉 ‘짜릿’한 그 무엇― 풍류신선도를 찾아서 정립하여 이들 유불선을 무마 대치해야 겠는데 깨달음의 힘이 이렇게 미약하니 아직 때가 이름인가. 사해 동포들이 현수(玄水)의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선가(船價)부터 내놓으라고 조르는 것 같다. 씨를 갖고 있을 때는 별 걱정이 안되었는데 씨를 땅에 심고 나면 키울 걱정이 앞선다. 뿌리를 살펴보기 위하여 뽑아만 놓고 빨리 안 심어도 걱정이 되었는데, 한철학사상의 학술적 체계는 이제 어느 정도 표면화되고 그런 대로 어느 정도 논리화 되어 잔뿌리를 내리면서, 좀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생각하게 된다. 즉 벌레가 파먹거나 폭풍우가 치지 않도록 물을 뿌리면서 돌보고 흙으로 북돋우어 주어 나무를 키우고, 조화를 부릴 용(龍)을 그리는 방대한 작업의 소명의식에 여러 동호인들과 함께 즐거움과 동시에 중압감을 느끼게 된다. 용이 여의주를 만들어 가듯 변화무쌍한 조화를 볼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열 가지 불가사의를 갖고 있는 저 바다 깊은 곳에는 용종에 가까운 해룡(海龍)이 있다고 한다. 상상같이 길거나 크지도 않다. 수심이 깊은 4km 이하에서 수압을 받아 여의주(如意珠)를 얻으면 승천한다고 한다. 여의주가 생기는 이치는 사람에게서도 사리(舍利)가 생기는 것과 같고 조개에서 진주가 생겨남과도 같다. 해저 파충과 동물인 이 용종이 물밑에서 300년을 지나면 처음으로 여의주가 하나 생기며, 다시 300년이 경과되면 또 하나가 더 생겨 두 개가 되는데, 이것이 용의 혓바닥 밑에서 생긴다고 한다. 두 개는 음과 양의 성질을 갖고 있어서 엄청난 전기를 일으켜, 자유로이 번개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개로는 천룡이 될 수 없어서, 다시 300년을 더 수양을 쌓아서야 마침내 맑고 미묘하게 빛나는 한 개의 여의주를 얻는다. 두 개가 하나로 된 것이다. 900년 만에야 비로소 득천하여, 마음대로 풍운조화를 부린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짐승도 수양을 하면 불가사의한 신통력을 얻는다. 이러한 설화는 도학자들이 전하는 얘기다. 세계마다 용에 대한 얘기는 있다. 특히 중국사람이 기록하고 있는 용의 생태는 다음과 같다. 용에는 구상(九相)이 있고, 특수한 생김이 있다.
① 두여타(頭如駝) : 머리가 낙타와 같다.
② 각여록(角如鹿) : 뿔이 사슴뿔 같다.
③ 안여일(眼如逸) : 눈이 토끼눈 같다.
④ 항여사(項如蛇) : 목이 뱀과 같다.
⑤ 복여신(腹如蜃) : 배가 조개와 같다.
⑥ 인여리(鱗如鯉) : 비늘이 잉어와 같다.
⑦ 조여취(爪如鷲) : 발톱이 소리개 발과 같다.
⑧ 장여호(掌如虎) : 발바닥이 호랑이 발바닥 같다.
⑨ 이여우(耳如牛) : 귀가 소의 귀와 같다.
이 외에 코 양날개에는 긴 수염이 잇고, 몸에 비늘이 81(八十一)장이며, 목 밑에는 사방 한자의 비늘이 거꾸로 붙어 있다고 한다. 귀로 듣지 않고 수염으로 초음파를 잡는다고 한다. 그래서 귀머거리 농자를 잘 보면 용자(龍字) 밑에다 귀이를 붙여 「귀먹을롱」 (聾)자로 쓴다. 이와 같이 용은 상서와 위신을 상징한 부(符)로도 전한다.
이러한 얘기는 한때에 지구상에 공룡이 생존했던 시기로부터 약간 살아 남은 것을 본 기록이라고 믿고 싶다. 오천년 전에는 이러한 공룡이 희귀하게 남아 있었다.… (이상 千明一「空無虛」P.306∼307에서 인용).
발해가 망하고 900여 년, 이 땅에서 자본주의 공산주의라는 음양의 여의주 두 개가 생짜배기 마른 하늘에 엄청난 번개를 일으키다가 이제 한주의라는 맑고 미묘하게 빛나는 한 개의 여의주로 만들어져서 풍운조화를 일으키려 하고 있다.
그 지루한 ①뜨내기 ②떠돌이 신세 면하고 이제는 동양의 ③토박이 용(龍)으로 살아가고자 여러 사람들의 대륙기행문― ‘옛 땅 우리 얼’에 심취해 가고 있다. 그것은 그리운 고향의 소식, 토박이의 말을 들어 보려는 배달겨레의 본성이다. 의식주, 습성, 언어를 파악하면 역사를 알게된다. 중앙아시아 코사크지역(소련령 초원지대, 인구8000만)의 주민도 몽고계의 피(몽고계혼혈)가 흐르고 있고 생활습성은 몽고인과 같으며 언어는 어순이 같은 돌궐어를 쓰고 종교만은 이슬람이다. 헝가리어, 터키어, 몽고어, 퉁구스어, 에스키모어, 인디안어는 우리와 어순이 동일하다. 그 중에 태극기를 가진 나라가 인류의 주체라 한다. 김치나 된장의 발효문화, 채식문화, 정신문화의 동방문화가 새로 일어서고 있다.
한민족의 소리는 자연음
미국땅에서 히피족은 한물 가고 우리의 거지 각서리 놀음과 품바타령이 대단한 인기라 한다. 각서리(覺瑞理) 각설리(覺說理) 거지(巨智) 각설리(覺說理)가 돌아온다네!
巨智 居智 覺說理
始救 視球 行示求
昨年 賣年 不死來
巨富 拒否 場道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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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始救 視球 是九 들어간다
일자나 한자 들고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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品봐 稟봐 품품품
品破 稟瀋 품품품
뿜빠 뿜빠 뿜뿜뿜
- - - - - - - - -
한민족의 소리는 자연음(自然音:風流音)이요 신음(神音)이라 한다. 세계의 부음(父音)이라 한다. 품(稟, 人稟)은 살리고 품(品)은 조심해야 한다. 명령을 잘하는 입(口), 아부와 이간질을 잘하는 입(口), 잘 뜯어쳐먹는 입(口), 정일품(正一品) 이품(二品)하는 입, 물품만 아는 입은 도려내야 한다(박경진의 「한소식」P.31참조). 品은 없어도, 거기에 빠져도 안되고 田만 있어도 ○만 있어도 안된다.
태국의 거지는 누구인가. 방콕시장(市長)이다. 그야말로 거지(巨智)다. 불쌍(不祥)한 근로자나 병약한 백성의 것을 훔치지 말고 태국의 거지 잠롱(潛龍, 방콕시장의 이름)처럼 한알 것을 훔쳐라. 사람한테서 배우지 말고 한알(○) 한테서 배워라. 아니면 그 속에 퐁당 빠져 죽어라. 죄를 받아 한알(○)속에 퐁당 빠져 뒈지는(사람이 되는) 순간에 용서받고 회개하여 다시 태어난다.
유신 무신 다 병신(病神)이다 내신(裸神 自神)이라야 한다. 삼일철학 삼일신학 풍류신학이라야 한다. 이방 저방 다 들여다봐야 내 서방이 제일이고 이집 저집 돌아 다녀 봐야 내집 내계집이 제일이다. 이당 저당 다 악당이다. 무당(巫堂)이라야 한다. 이것이라야 신들린 사람처럼 신바람이 날 것이다. 신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무아경(無我景)이 나온다. 사물(四物:북, 장구, 꽹과리, 징)놀이나 굿처럼 신(神)이 나고 흥이 난다. 거기는 부귀빈천도 없고 너와 내가 없는 평등과 자유, 해방의 자리다. 오직 삶을 긍정하는 생명의 약동이 있고 협동과 화합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참된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다. 평등과 박애가 나온다.
풍류를 즐긴다는 것은 맑고 밝은 생명의 실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풍류신선도야말로 아무런 죄의식도 고뇌도 없는 생명 본래의 모습이다. 풍류는 자연 그대로다. 우주자연으로 회귀하는 것만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자연스럽게 조화가 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자연 그대로 낙천적 생각이 바로 마음의 성역(聖域)이요 곧 신선의 경지다.
풍류신선도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 그대로의 실상을 삼신성조(三神聖祖)가 영안(靈眼)으로 깨달아 국민교화의 기틀로 삼은 것이다. 이 도(道)야 말로 형언하기 어려우므로 현묘지도(玄妙之道)라 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대도(大道)라 한다(한주형 저 「聖道文明의 建設」 P.13∼154 참조).
風流酒洗百年塵이요, 헛되고 헛되도다 권력 금력이여!
百年貪物 一朝塵이라.
우리의 시조(詩調)나 고시(古時)를 보면 3·3조(調)와 4·3조가 많음을 본다. 육자배기 도리굿판의 육(六)은 천부경의 한 가운데 숫자로서 중정(中正)의 수(數), 완성의 수라 한다. 육각형은 360˚원을 의미하기도 한다. 투명한 육면체( )는 빛(光)이 비쳐도 통과함으로써 그림자를 생성하지 않는다. 서양사상은 직사(直射)로 비쳐서 물체에 닿으면 밝은 면과 반대편의 그림자를 형성하는 광(光)의 태양문명, 인도사상은 명(明)의 명상문화(冥想文化)라면 천부의 한사상은 밝으면서도 투명한 광명(光明)문화를 나타내고 있다.
한(桓)은 전일(全一)이며 광명(光明)이니 전일은 삼신(三神)의 지능(知能)이며 광명은 삼신의 실덕(實德)으로 우주만물의 소선(所先)이라 (太白逸史).
서양사상은 E=MC²이라는 광속에 와서 벽에 부딪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지만, 한의 바탕은 처음부터 맑은 구슬이나 아리수의 청수(淸水)처럼 명(明)의 세계를 관조(觀照)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사상은 광의 물질문명뿐만 아니라 투명한 청수의 심명(心明)문화를 함께 추구함으로써 어둠의 그림자를 생성하지 않으며 기존의 음지를 투명하게 비추어 줄 것이다.
38선이 있는 ‘한나라’에서 투명한 한주의 38정책이 나올 만 하다. 하도·낙서에서 3·8목(木)은 동쪽 생명을 뜻한다. 38선을 해소하는 38정책이요 인류를 구원하는 38정책이다. 3·8합(合) 11의 10(+)과 1(-)은 각각 결실수장(結實收藏)의 씨알을 의미하는 무극(無極: ○)의 숫자, 처음과 출발을 의미하는 태극(太極:一)의 숫자이다.
불교에서도 십일면보살(十一面菩薩) 일명 천수천안관자재보살(千手千眼觀自在菩薩)이라는 것이 있다. 시방(十方)가운데 자기 중심방위가 하나 더해진 것을 말한다. 손으로 말하면 천수만 되겠으며 눈으로 말하면 천안만 되겠는가. 여기 앉아서 자유자재로 만물을 만들고 걸림 없이 두루 살필 수 있다. 우리 마음은 두루하여 어느 방위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역시 입체적 공간성과 자기중심성으로 자성자각(自性自覺)을 의미한다. 여기서 원각성(圓覺性)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이제 3·8따라지 구석(拘席, 개자리, 개자리 보다 더 비천해 질수 없다)의 나라에서 38광땅(땡) 씨알의 중심역사가 막 오르고 있다. 온 세계 구경꾼들이 들어와 어울려 마시고 즐기고 축하하리라. 우리는 공인(工人)노릇, 무당(巫堂)노릇, 거지(巨智)노릇 다시 하여 만들어 되게 하고(造化), 훈장접장 노릇 다시 하여 가르쳐 되게 하고(敎化), 교황노릇 다시 하여 선도하고 지도하여 다스려 되게 하지(治化).
이제는 뒷짐지고 구경만 하는 국외자(局外者)가 아니라 당사자(當事者) 무당이 되어 다 함께 참여할 굿판을 벌이지! 멍석일랑 간섭 말고 내가 알아서 하지! 내가 알이 되어서 스스로 조화를 부리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미리내(龍川)랑 길(未阿里)이랑 얼을 알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고개(高開)를 하여
높은 곳에서 바라보매 넓게 열리니
천지가 확 트이는 구나.
고개(古介)를 하여
옛 것을 중개(仲介)해 알고 보니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나의 본성을 버리고 이성 감성에만 놀아나는 날에는
십리도 못 가서 발병난다.
10(十, 0)이라는 무극대도에 도달하기 전에 밝음의 병이 오고 만다. 그릇 치고 만다.
천부경이 십무극 대도의 알 같은 입체 투명경(立體透明鏡)이라면 아리랑은 은은하면서도 (잔)물결 이는 수경(水鏡)이라서 보는 사람마다 달리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
아리랑은 이상향, 파라다이스, 유토피아, 하늘나라, 극락, 진리의 세계 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수메르의 알라리 연애송(Allari-song)을 연상하기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천궁(天宮)으로 가는 길을 아리랑 고개라 하였고, 인도 조상들은 극락으로 가는 길을 고해(苦海)라 하였으며 서양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는 길을 좁은 문이라 하였다. 우리는 먼길을 떠날 때 가장 힘든 길이 고갯길이었고 인도 사람들은 물 건너는 길이었으며, 서양 사람들은 성문(城門) 통과하는 길이였기 때문에 제각기 생활환경에 따라 표현된 것이다(韓白山의「한마음」 창간호 참조).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진리
加我勢 加我勢 어서 加我勢
백두산 덜미로 어서 가아세!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광복군의 아리랑 4절)
백두산 자락의 역사는 한민족의 역사다. 백두산을 중심한 옥야만리(玉野萬里)는 우리 역사의 무대다. 이 역사와 철학을 덮어 놓고 지내면 인류사와 철학을 논할 수 없다. 덜미는 목 뒷부분이다. 만주로 거쳐서 간다. 한국은 이분(二分)이 아니라 삼분(三分)인데 대륙과 먼저 손잡고 북한은 자연 하나가 된다. 이것은 한국의 애기 업은 배면(背面)사상이다. 서양사람들은 애기를 앞으로 매단다. 우리는 좋은 것을 뒤로 감추어 보호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앞으로 내밀어 자랑한다. 이제는 한주의 시대로서 우리도 당당하게 드러내 보일 것은 드러내어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도 이제 애기를 앞으로 매달기도 한다. 그러나 이성이나 감성에 치우치면 본성을 잃게 된다. 서구의 감칠맛에 빠지면 안되고 이 맛을 걸러서 ‘아리’한 멋으로 환원하면 멋진 한국인이 될 것이다.
줄다리기에서는 힘이 샌 쪽으로 끌려 댕겨진다. 우리의 역사와 철학의 바탕이 깊고 넓어 포용력이 커서 외래 종교와 문물을 우리 손으로 스스로 흡수한 것이지 백인이나 다른 민족의 강압에 의해 일방적으로 들여 온 것이 아니다. 이제는 줄을 환원시켜 주면 되는 것이다. 자본, 공산이라는 감칠맛, 쓴맛을 한주의 홍익주의라는 아리한 멋으로 환원시켜 주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다시 높이 솟은 곳에 솟대를 쌓고 한알님께 칠성님께 조상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려야 할 것이다. 서양과학 서양문명을 질시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소처럼 부려먹고, 동방문명을 위한 하느님의 속죄양으로 만들어 가는 십팔자 사제(十八字 司祭)가 나오기를 기대한다. 씹할(十八) 자(子)는 목자(木子)요 목자란 통상 모지랭이 등신을 말하지만 역설적으로 천자(天子)가 된다. 십팔(一八)은 합(合) 9로서 천부경의 최후 결실의 수(數)이다. 그 다음에는 십지보살(十枝菩薩)이 되는 것이다.
일지 일지 글이나 일지, 한역사 한철학 공부나 하지
이지 이지 지금이지, 때는 다 되가고 있다.
삼지 삼지 신이나 삼지, 고유의 三神철학을 정리해서 체계화 제도화 해야지
사지 사지 여기서 사지, 수메르의 예덴-古天-천국-낙원인 이 땅에서 살지
오지 오지 이리로 오지, 모두들 이 땅으로 모여들겠지.
상품(商品) 중품(中品)다 내주고 하품(下品)밖에 안 남았으니 하품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 같지만 백의종군(百依從軍) 이순신의 거북선 한 척같이 우리는 이미 재기(再起)의 한길을 내 달리고 있다.
우리는 도리깨질 잘하는 백성들이다. 자본주의 공산주의 이념의 도리(道理)를 깨고,
한알(하늘)의 도리가 첫째,
자연의 도리가 둘째,
사람의 도리가 셋째다.
오뉴월 뙤약볕 도리깨질로 보리타작 밀타작 하여 푸성이 껍데기 쭉정이는 다 내보내고 풍성한 알곡을 거두어들일 것이다.
알이랑 알이랑 알알이요, 앵글 탱글 충실한 알알이 모여
알이랑 고개를 넘어 간다. 옛을 살려 백두유신으로 넘어 가세!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짱백이(白頭)에서 투만(頭滿)이 흐른다. 내 머리가 외래사상으로 꽉 차있지만 흰 머리통 자체는 어김없이 내 것이다. 이 머리통을 나의 본성, 이성, 감성으로 새롭게 채운다. 그것이 백두유신이다. 백두산 주위 사방 삼천리는 풍수지리학상 지구의 안전지대라 한다. 거기가 본래 한알의 땅, 에덴의 땅이요 배달의 터전이었다. 짧지 않은 만세월 전세 내 주었으나 주인이 다독거려 화평하게 사는 것은 당연한 권리요 임무다. 백두산 솔꽃 냄새가 젖어 흘러 내리는 솔꽃강(松花江), 앞놀이강(압록강)에서 훨훨 날며 살아나 볼까.
지도자는 지배자여서도 안되고 단순한 애국자여서도 안 된다.
지도자는 선각자(先覺者)여야 한다.
학자나 정치인은 깨어 있어야 한다.
이 땅에는 원래 금(金)이 많이 나왔다. 3김이나 되는 금을 노(爐)에 넣어서 금관을 만들고 있다. 대삼합육생칠팔구(大三合六生七八九:천부경 내용의 일부)-대삼합육의 세 솥밭(鼎足)로 이루어진 육자(六字) 공화국은 국민이 쓸 금관을 만들고 있는 거대한 노(爐)인가. 그렇다면 그 금관 쓸 사람은 7,8.9공화국의 국민이다. 제7한주의 통일공화국, 제8동방공화국, 제9ㅂ알ㅋ알세계공화국(밝고 큰 씨알의 나라-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진리의 나라). 천부경은 말한다-1·2·3, 4·5·6, 7·8·9의 9변도국(九變圖局)이 순화되는 무시무종(無始無終)의 민족사를.
중국에는 소평(小平)이 한국에는 대중(大中)이, 소중화(小中華)가 대중화(大中華), 한국이 대국, 영삼(○三)의 영(○)은 천부경의 원리인 한알(○)을 상징하고 삼(三)은 천지인 우주의 숫자 완성의 숫자 곧 일석삼극 무진본(一析三極無盡本), 일적십거무궤화삼(一積十鉅無化三)의 3·1철학 3·1신고(神誥)의 바탕이 되는 숫자이며, 종각(鍾閣)의 우렁찬 저음(低音)의 역사적 33회 종(鍾)소리가 반드시(必)울려 퍼질 것이다. 운삼사성환오칠(運三四成還五七)-삼사합(合) 제7통일공화국은 삼사십이 오칠합(合) 십이와 십거(十鉅)의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우주원리로 세계 원형(円型)조화사상을 이루어 가리라.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둥근 것을 좋아했다. 둥근 것은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을 상징한다. 그래서 보름달밤 강강술래 원무(圓舞)를 추었고 혼인 예물로 가락지를 끼워 주었다. 구(球)는 본성인 중심(中心)을 잃지 않고 어디든 굴러 다닌다. 그리하여 원만한 공(空)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구(球)가 중심을 잃으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알짜배기 알불이요 씨불인 9×9의 천부경 81자, 그것은 정신을 맑게 하는 주문(呪文)이자 최상의 철학이요 민족의 경전이자 예언서이다. 구구밝은 사람은 깨닫게 되는 이 81자에 지나간 역사가 담겨져 있고 미래의 역사를 이끌어 내어 볼 수 있다. 홍익인간의 배경에는 천부경이 있고 천부경은 ‘한’을 명료하게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한 많은 백성은 한알처럼 높고 넓고 크며, 아리수처럼 잔잔하고 때로는 요동치고 포효하면서 아리랑처럼 유연하고 심금(心琴)을 달래주는 세시풍속으로 유구 만년 살아 왔고 또 사라갈 것이다(알→살生, 肉, 歲, 삶, 사; 살다, 살아지다, 돌아가다).
저 물소리
저 물소리 들으오, 아리수의 물소리
송화강 물소리 흑룡강 물소리 바이칼의 물소리
우리더러 저 물에 젖어라 하오
저 물에 그림자 드리우라 하오
조상의 땅 역사의 땅 우리더러 밟으라 하오
우리가 밟아야 할 땅이라고 저 물소리가 말하오
출렁 출렁 저 물소리 우릴 부르오 오라고 손 짓 하오. (고은의 〈백두산 2〉 P. 109에서 인용하여 고쳐 씀)
(이 글에는 笑明龍人李主贊님의 평소 말씀이 많이 인용되어 있습니다. 그분의 의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어긋나는 점이 있으면 전혀 필자의 소치로서 양해를 바라면서 평소 지도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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