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민초

진정한 장인

지성유인식 2008. 10. 6. 11:08

세상에 이름을 남긴다는 것은 역사의 한 자락에 있었던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더구나 희생이란 명목으로 남겨진 흔적은 그 자체가 역사가 되곤한다.


그런 일이 어디 사람의 일이기만 하겠냐만 제 몸을 태워 불을 밝히는 초나 몸이 갈리면서 새로운 글자들을 세상에 뱉어내는 먹은 무생물이면서도 생명있는 것들보다 더 큰 존재로 우리의 가슴에 새겨진다.


"칠십 평생 벼루 열 한 개의 바닥을 밑창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 붓으로 만들었다"는 추사 김정희는 그런 먹의 희생적 삶과 중요함을 알고 '서가의 으뜸은 먹'이라 했으리다.


나무껍질을 태워 만들어내는 먹의 향기는 10미터 밖에서도 알 수 있다.


한국 먹 기능 보유자 유병조씨(68세)를 찾은 건 단풍이 절정을 지나고 초겨울 햇살이 엷어지는 11월중순을 넘긴 때였다. 멀리서 걸어오는 유씨의 몸에서는 진한 묵향이 풍겨나왔다. 그가 안내한 집으로 들어가자 더욱 진한 묵향이 온 집안을 감쌌다.


유씨는 문방사우 중 하나인 먹만들기에 54년을 바쳐온 외길인생 먹 장인이다.


중국 진(晋)나라 명필 왕희지는 "종이는 진(陣)이요, 붓은 칼과 방패이며, 먹은 병사의 갑옷이요, 물 담긴 벼루는 성지(城池)다."했다. 사우(四友) 중 하나만 빠져도 나머지는 쓸모없게 되는 것이다.


유씨가 돈안되고 고생만되는 먹에 집착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역사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는걸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먹 기술이 일본보다 우수하다는 걸 알리고 싶어서다.


우리나라 역대 인간문화재 중 '붓'과 '벼루'인간문화재는 있으나 '먹'분야에는 인간문화재가 없다.


유씨의 '먹'을 '경주시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할만큼 양질의 먹을 만들어온 유병조씨는 '인간문화재'를 신청했으나 심사위원이 없어 보류중이라할만큼 먹에 대한 전문가가 없어 안타깝다고 한다. 성균관대 김종태교수가 유씨를 인간문화재로 만들기 위해 노동부와 인력관리센터에 심사를 의뢰, 1997년 한국산업인력관리공단으로부터 '먹만들기 고유기능전승자' 로 인정은 됐으나 인간문화재 신청 서류를 만들어 올린지 한 달만에 세상을 뜨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우리나라전체를 통틀어 먹 만드는 곳은 현재 3~4곳.


천 년의 흔적을 만드는 그을음의 신화라 불리는 먹의 역사는 신라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 긴 역사에 비해 우리의 먹은 위태롭게 그 명맥을 유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유씨가 먹을 접하게 된 것은 13세부터다.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유씨는 어릴적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던 조부의 유언에 따라 모두가 귀국했다고 한다.


그 후 경주 산내면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울산 작은 아버지의 먹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작은아버지가 소나무 그을음을 주원료로 아교와 섞어만든 송연묵(松燃墨)과 기름을 태운 그을음으로 만든 유연묵(油煙墨)품질이 전국 으뜸이었다.


작은아버지 밑에서 10여년간 먹 만드는 기술을 익힌 그는 1965년 경주로 와 가내공업 형식으로 먹공장을 열었다. 그때부터 그는 양질의 먹을 만들기 위해 직접 기구를 만들고 까다로운 건조과정을 개선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연구했다.


먹만드는 과정은 복잡하지만 좋은 묵은 최고의 그을음을 얻었을 때 가능하다. 그을음채취, 아교녹이기, 반죽, 형틀성형, 건조, 가공(먹), 광택, 글씨새겨넣기 등 7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그을음 채취과정을 빼고도 45일이 걸려야 만들어지는 먹.


상처입은 소나무에서 나오는 관솔의 그을음이 최고의 먹을 만들어 내듯 어렵게 지켜낸 그의 먹인생은 우리나라의 문방사우를 지켜내는 자존심이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잘 만들어도 기온 등 조건이 맞지않으면 깨져버리거나 굽어버린다. 절망의 순간을 수없이 넘으면서 마음가짐을 다진 그는 1970년 당시 전기가 들어오지 않던 산내면을 떠나 조전리로 자리를 옮긴 후 '신라조묵사'란 간판을 내걸고 현재까지 운영중이다.


"단단하면서도 가볍고 부드럽게 잘 갈릴뿐 아니라 찌꺼기가 없고 색이 맑아 붓이 잘 내린다"는 서예인들의 말처럼 그의 먹은 그의 자부심이다.


유씨는 현재 유연묵을 만들고 있다. 하지만 가내수공업 수준을 벗어나기 어려워 누구든 전수하기 힘들어하는 분야지만 "두 자녀가 자신의 가업을 잇겠다고 해 든든하다"고 한다. 타인에 전수할 경우 기술의 완벽성을 익히기도 전에 공장을 차려 제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쉽사리 전수를 못한다고 한다.


현재 유씨가 만든 먹의 판로는 전국 유명 필방이다. 최상급은 가격이 비싸 중·상등급을 주로 만들어 판매한다. 그러나 유씨는 300년 역사를 지닌 일본의 고매원을 능가하는 먹을 만들어낼 자신이 있는만큼 주문이 오면 대량생산도 가능하다고 한다.


먹을 만들면서 가장 보람있었던 건 2005년 해인사팔만대장경 탁본 먹물 20말을 만든 것.


"호남 지역은 주위에서 도움을 많이 주는데 경상도 지방은 소외된 지역"이란 느낌이 강하다는 그는 자신이 세상을 뜨고 난 후에라도 자신의 기술이 일본으로 건너가 우수한 한국의 먹기술을 인정하도록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의 가장 큰 소망은 '인간문화재'로 지정받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꿈인 고아원 설립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돈만 되면 그 소원도 꼭 이루어 질 것 같다고 한다.


경북일보(2008.10.16자) 진용숙기자 ysjin@kyongbu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