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병 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1680년 허적의 서자인 허견 등이 남인과 가까운 복선군(인조의 3남인 인평대군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려 한다는 고변서가 올라왔다. 이에 연루되어 숙종 초반을 이끌어 갔던 남인의 영수 허적과, 서인 송시열의 영원한 숙적 윤휴(尹 :1617~1680)가 사사(賜死)되었다.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정권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다시 넘어갔다. 역모의 당사자인 허견의 부친인 허적은 그렇다 치더라도 윤휴가 역모의 불똥을 맞고 죽은 까닭은 무엇일까?
북인의 학문을 이어받고 다양한 학문을 추구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배척했다. 윤휴가 주자의 학설에 반대하고 독창적인 학설로 주자를 비판하는가 하면, 「중용주설」을 저술하여 주자의 중용장구에 정면으로 도전했기 때문이다. 송시열과 윤휴는 그야말로 앙숙인 관계였다. 현종 때 두 차례 벌어진 기해예송(1659년)과 갑인예송(1674년) 때는 서인과 남인의 대표 주자였던 이들은 정치적, 사상적으로 치열하게 맞섰다.
갑인예송으로 남인이 정권을 잡았던 숙종 초반 윤휴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윤휴는 무엇보다 당시의 주류 이념인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학문과 사상에서 독창적인 측면과 다양한 학문의 섭렵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조선중기 사색당파 중 가장 자유로운 성향을 보였던 북인(北人)과도 일치하는 측면이 많다. 실제 윤휴의 아버지는 광해군대 북인의 핵심 인물인 윤효전이었다. 윤휴전은 광해군 때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정치적으로 북인의 입장을 대변했다.
윤효전은 서경덕의 문인인 민순(閔純)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화담선생의 1책은 다른 유학자 수십 권과 비등하다’고 할 정도로 서경덕을 존경했다. 이러한 경향은 윤휴에게로 계승되었다, 윤휴는 『화담집』의 중간(重刊) 발문을 쓰면서 『화담집』을 중간하는 것이 실로 자신이 바라던 사업임을 술회하였다. 『숙종실록』의 사신(史臣)의 기록에서 ‘휴가세본소북( 家世本小北)’이라 한 것 역시 윤휴 학문의 뿌리에 북인적인 기반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윤휴는 다양한 학문을 추구였다. 그의 연보 56세 부분의 기록을 보면 서울 쌍계동의 하헌(夏軒)에 기거하면서 천문·지리학 등의 여러 책을 섭렵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단사상으로 배척받던 책인 『노자 도덕경』의 서문을 쓰기도 했으며, 병법과 무예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윤휴의 학문은 서경덕, 성운, 이수광의 학문적 영향에서 형성되었다는데 이들에게서는 노장학, 양명학에 경도된 모습이 나타난다. 이와 같은 학문적 영향은 윤휴가 영남 남인이나 기호 서인과는 달리 주자학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여건이 되었고, 나아가 실학적인 사고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무 겸비로 강한 조선을 꿈꾸다
윤휴가 살았던 17세기 중반은 외적으로는 북벌론, 내적으로는 주자성리학의 의리와 명분론이 힘을 확산시켜 나가는 시기였다. 그 핵심인물은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었고, 윤휴는 송시열에 치열하게 맞선 라이벌이었다. 그럼 윤휴가 지향한 조선사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윤휴는 효종 이후 북벌을 구호화 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천해 보고자 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윤휴는 이를 위해 무(武)와 국방 강화를 강조하였다.
“문(文)과 무(武)는 왕의 2가지 술(術)이다. 문은 무엇인가? 교화에 힘쓰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다. 무는 무엇인가? 위엄 있는 정치를 권장하고 화란을 막는 것이다. 일문일무(一文一武)는 때에 따라 소장이 있는데, 숨기면 밝혀지지 않고 남용하면 위엄이 없어지는 것이니, 어느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다.” ( 『백호집』 권24, 잡저, 「만필상」)
윤휴는 과거제도 폐단의 하나로서 학자·사대부의 문약함과 무를 천시하는 경향을 지적하고 무의 천시는 결국 국방력의 약화를 가져온다고 인식하였다. 윤휴의 상무(尙武) 경향은 「사실(事實)」이라는 편목에서 이순신의 유사(遺事)를 비롯하여 ‘제장전(諸將傳)’이라 하여 정운, 송희립, 이억기, 유형, 정사립, 이완, 진무성, 안형, 김대인, 원균 등 여러 무장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순신의 서녀(庶女)는 윤휴의 부친인 윤효전의 첩으로 들어가 윤휴의 서형(庶兄)인 윤영(尹鍈:1612-1685)을 낳은 만큼 인척으로 연결된다. 윤휴가 「유사」의 첫머리에 이순신의 행적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가계상의 인연도 큰 작용을 했을 것이다.
윤휴는 북벌론을 추진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으로 병거(兵車)와 화차의 개발과 보급, 무과인 만과(萬科)의 설치, 호포법(戶布法) 실시, 지패법(紙牌法) 실시, 군권의 통합을 위한 도체찰부(都體察府) 설치 등 적극적인 개혁 정책을 제시하고 추진했지만 서인을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기반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독불장군’ 방식으로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려한 것 역시 많은 이들의 반발을 샀다. 윤휴에게는 흔히 법가적인 요소가 있다는 평가도 있었는데, 상당히 공리적인 측면을 추구하는 측면이 강했다.
낙인찍혀 견제 받고 배척되었지만
윤휴가 꿈꾸었던 강한 조선은 문무 겸비로 국방력을 강화하여 마침내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그의 비명횡사와 더불어 묻혀버렸다. 『당의통략』에는 윤휴가 경연에서 자성(慈聖: 왕의 어머니)을 단속하라고 한 것과 도체찰부의 설치를 실각의 이유로 들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남인의 핵심이라는 점과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기 때문이었다. 경신환국으로 권력을 다시 찾은 서인은 위험한 사상의 소유자이며 행동가적인 기질이 다분한 그를 결코 살려둘 수 없었던 것이다.
윤휴 사후 조선사회는 그를 제거한 서인, 노론들이 주도하는 주자성리학이 대세가 되고 의리론과 명분론이 지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후에도 그는 시대를 거스른 위험한 인물로 계속 낙인찍혀 갔다. 그의 문집인 『백호문집』이 1927년 진주에서 비로소 간행된 것은 그가 조선후기 내내 얼마나 견제를 받았던가를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윤휴의 존재는 조선후기 사상계에서 조선사회의 모델을 둘러싼 치열한 진통이 사상계에 꾸준히 전개되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그리고 이러한 진통들은 결국에는 실학이라는 꽃을 피워주는 또 다른 토양이 되었다.
다산연구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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