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두개의 길!

지성유인식 2008. 3. 20. 17:23

사람의 태어나 살아가는데는 2개의 길이 있다.

 

첫째는 이상을 추구하는 길,

둘째는 현실을 추구하는 길.

 

태어날 때는 똑 같았는데 살아 가면서 2개의 길중 어느 하나를 택하게 되고,

그 와중에 갈등을 격는다.

 

그런 예의 기사가 공교롭게도 어제, 오늘 실렸기에 전재해 봅니다. 

 

 

이 봄날에 눈물 맺히는 까닭 / 강수돌

                                                - 한겨레

 

 

전태일이란 청년이 있었다. 청계천 옷 공장에서 어린 여성 노동자들과 일하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1970년 11월이었다. 산업화, 경제개발, 수출 강국, 선진국 등 구호와 함께 노동자들이 줄 이어 죽었다.

이경해란 농민이 있었다. 2003년 9월,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 각료 회의장 앞에서 “세계무역기구가 농민을 죽인다”고 온 세상에 고발하며 자결했다.

 

정든 고향 농촌을 등지고 도시로, 공장으로 몰려든 수많은 노동자들의 피, 땀, 눈물이 1인당 소득 80달러 나라를 2만달러로 만들었다. 부자의 상징이던 자동차도 집집마다 ‘필수품’이 됐다. 바로 그 자동차 타이어 제조 공장에선 2006년 5월부터 2007년 9월까지 7명이 급성 심근경색, 관상동맥 경화증, 심장마비 등으로 숨지고 5명이 폐암과 식도암, 뇌수막 종양 등으로 숨졌다. 또 1명은 자살했다. 불과 2년 새 같은 회사에서 15명이 죽었다.

 

한경선이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서울교대를 졸업하고 미국서 박사까지 했다. 다른 10만여 강사들처럼 전임 교수 꿈을 안고 비정규 교수로 열심히 강의했다. 그러나 “다년간 시간강사로 버티기는 불가능”한 사회 조건들, “공정한 경쟁에 기초한 상생발전의 원리를 거스르는” 부조리와 모순, 대학의 “불공정한 처사” 등 답답한 현실을 온몸으로 고발하고자 사랑스런 딸을 남긴 채 자살했다. 2008년 2월이다.

 

또, 후안마이라는 열아홉 살 베트남 아가씨가 있었다.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2006년 12월 고향에서 한국 노총각 장씨와 결혼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성격도 몰랐다. ‘번개 결혼’이었다. 2007년 5월 한국으로 이주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문화도 달랐다. 신부는 “당신과 저는 매우 슬픕니다. … 제가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당신이 제게 많은 것을 알려주길 바랐지만, 당신은 오히려 제가 당신을 고민하게 만들었다고 하네요. … 베트남에 돌아가더라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거에요. 당신을 잘 이해하고 사랑하는 여자를 만날 기회가 오길 바라요”란 편지를 놓고 고국으로 떠나려다 술 취한 남편에게 걸렸다. 순간 분이 오른 장씨한테 ‘맞아’ 죽었다. 남편은 ‘사기 결혼을 당했다’고 착각했다고 한다. 후안마이의 애달픈 이별편지가 무망했다. 그를 심판한 판사는 “한국 사회의 야만성에 대해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심정이었다”고 한다.

 

‘야만성’은 끝없다. 2007년 크리스마스에 실종된 초등학생 이혜진은 무참히 살해된 채 77일 만에 발견됐고 우예슬도 비슷한 운명이다. 도대체 누가, 무엇이 이 창창한 아이들을 죽이는가. 그 정든 ‘이웃사촌’은 어디로 갔나?

 

대한민국 헌법 제10조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고 돼 있다.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 사회 대다수는 행복추구권은커녕 매일 ‘삶과 죽음’ 사이를 헤맬 의무만 있다. 향후 한반도 대운하로 상징되는 각종 개발사업이나, 일제고사와 학벌 사회로 상징되는 비인간화 교육은 사람과 자연, 생명에 대한 야만성을 더 강화할 터. 사람 죽이는 사회로도 모자라 사람 살 토대마저 절멸할 건가.

 

전태일, 이경해 등 무수한 노동자 농민의 죽음, 한경선 외 많은 비정규 교수의 죽음, 후안마이를 비롯한 수많은 이주자의 죽음, 이혜진 등 숱한 어린이의 죽음을 깊이 애도한다. 그리고 이들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무얼 할 것인가’ 고뇌하며 하늘을 본다. 따뜻한 봄날, 텃밭의 살아 있는 흙을 일구며 눈물이 맺히는 까닭이다.

 

 

이우재 인천지법 부장판사 “우울증 이겨냈다”

 

자살기도, 입산 수도..정신과 치료 후 완치

 

"2차례 자살을 하려 한 적도 있지만 우울증을 완전하게 이겨냈습니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선 현실을 인정하고 정신과 의사와 상담해 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인천지법 제3민사부의 이우재(43) 부장판사는 19일 이같이 밝히면서 악몽 같은 시간을 뒤로 하고 다시 활기찬 삶을 살고 있다. 우울증으로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그의 사연이 최근 발간된 인천지방변호사회의 회지 '인천법조' 8집에 실려 법조계에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8년 제30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엘리트 법관으로서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춘천지법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2006년 봄 찾아온 시련은 너무나 컸다.

 

주식투자의 실패,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 위암이 발병할 수도 있다는 우려. 위기가 느닷없이 한꺼번에 닥치면서 완벽주의자로 평가받던 이 부장판사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잠자리에 누워 한두 시간을 뒤척였으나 뒤척이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고, 그런 생활이 계속되다 보니 퇴근이 괴로웠으며 나중에는 오후 4시만 되면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불면증을 극복하기 위해 한의원에서 침을 맞고 한약을 복용했으며 수면센터를 찾는 등 갖가지 방법을 써 봤지만 상황은 점점 나빠졌고 그는 집 목욕탕에서 충동적으로 샤워 호스로 목을 감기도 했다.

 

 

그가 수면제를 이용, 2번째 자살을 기도하려던 어느 날.

이 부장판사는 "자살을 하려던 날 깜박 졸았는데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내 몸에서 수의를 벗기셨다"면서 "이때 갑자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병가를 내고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계룡산의 수련원에서 몇 달 간 참선을 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가족의 사랑과 주변의 관심 속에 하산한 그는 정신과 의사를 찾아 꾸준히 치료를 받았고 결국 완치돼 지난해 2월 법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부장판사는 "그 시절에는 한 면만 보는 어리석은 삶의 방식을 살았던 것 같다"고 회고하면서 "살아있다는 것에 무한한 행복을 느낀다.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으며 치료가 가능하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싶어 용기를 내서 글을 기고했다"고 말했다.

 

 

(인천=연합뉴스)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귀를 흥겹게 하는 오후예요
벌써 주말 되었지요
날씨도 포근하고 어제 하다만 집안청소하고
나가면 참 좋겠네요
항상 현실을 직시하되 꿈을 버리지 않고 살면 되겠지요

활기있는 날 되세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희망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행복을 두 손 모아 합장하옵나이다.
이 사회를 이상만을 추구하면서 산다면,
얼마 살지 못하겠죠?

어쩌면,
그래서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생겼는지도 모르고요.

대부분의 사람은 현실에 적응,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그 적응력,
순응력이
인생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다만,
바램이 있다면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는
능력을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