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에게 부모는 하늘입니다. 신하에게는 임금이 역시 하늘입니다. 구시대의 봉건사회에서는 그랬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그런 논리가 성립될 수도 없지만, 요즘의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야 하늘이라고는 못해도 깊고 무거운 관계이며, 나라의 통치자와 정부관리들과의 관계도 하늘이야 아니지만 무관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의 논리로 보자면, 하늘같은 부모에게 설혹 아쉬움이 있다 해도 원망의 마음을 품어서야 되느냐, 또한 하늘같은 임금에게 다소 미흡함이 있다한들 원망을 품어서야 되느냐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산의 짤막한 논문인 「원원(原怨)」이라는 글을 읽어보면 공자나 맹자의 논리를 원용하여 자녀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부모를 하늘처럼 섬겼지만, 부모가 부모의 도리를 잊고 자녀를 자녀답게 여기지 않거나 내팽개친다면 원망의 마음을 품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하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임금을 하늘처럼 섬겼지만, 임금이 신하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고 상관없는 사이로 여긴다면 당연히 원망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면서 원망의 마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시(詩)를 논할 수 있으며, 원망에 대한 의의를 아는 사람이어야 충(忠)이나 효(孝)에 대한 감정을 더불어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다산이야말로 봉건사회 안에서 마음과 제도의 폐쇄성을 열고 인간 감정의 발로를 자연스럽다고 인정하면서 봉건적 억지논리를 과감하게 분쇄하는 일에 앞장섰던 선각자였음이 분명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또는 임금이 신하를 제대로 대접해주지 않으면, 원망을 품을 수 있어야만 잘못하는 부모나 임금이 마음을 바꿀 기회가 있어 세상의 변화가 가능하지, 그렇지 않고 잘못하는 부모나 임금이 하늘이어서 잘못하는 행위에 원망도 못한다면 희망이 있는 세상이겠습니까.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자식이나 관리들이 있기 위해서는 부모나 임금이 책임과 의무를 다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다산의 「원원」이라는 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근대의 여명이 이런 논리로 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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