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정운영의 글 | |
그는 경제를 말하되 논(論)하지 않았다. 재미진 동서양의 예를 이리저리 들어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다가, 용 그림에 마지막 눈동자를 찍는 수법으로 당대 경제의 초점을 딱 짚었다. 누구는 안 그런가. 나름대로 다들 개별화된 보편성 획득에 열심이지만, 그의 글은 늘 공부하는 자세로 독특하여 후줄근하지 않았다. 그의 초기 저서인「광대의 경제학」이나「저 낮은 경제학을 위하여」를 보면 경제를 이처럼 쉽게 풀이하는 데 대한 회의와 고뇌가 애초에 컸던 모양이다. 원고지가 칠판보다 넓다는 혹독한 사실을 체험했다고 한다. 난해한 언어와 난삽한 부호로 오염된 경제학을 구해내기 위해 동원한 자신의 ‘잡식성 잡식(雜識)’을 일단 발명하면서도, 그것이 경제학을 타락시키지나 않을까 염려했다. “하고 싶은 얘기만 딱 부러지게 하면 됐지 무슨 놈의 잔소리가 그리 많으냐는 타박도 없지 않으리라”는 술회가 그만큼 진지하게 들렸다. 하지만 ‘펜보다 무거운 것을 들어보지 못한’ 그는, 벽돌을 찍는 사람에게 이론적 실천 노력을 장황하게 강의할 자신이 서지 않아 책을 썼다. 경제학이 요구하는 암호 해득에 질려 일상적인 관심마저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다소 유익한 안내자가 되기를 기대했다. 그만한 연유 덕일 게다. 이번에 출간된「자본주의 경제산책」도 연구서치고는 읽기가 퍽 수월하다.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건대, ‘무슨 놈의 경제 논문’에 조지 오웰이니 어니스트 훼밍웨이니 피카소가 등장하여 담론의 오지랖을 넓히는가 싶다. 이병주의 단편소설 ‘아무도 모르는 가을’과 조정래의 대하소설 ‘한강’은 또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 같은 경제 무식장이는 물론 혹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도 각주(脚註)가 거의 없어 좋다. 어떤 계제에 무슨 논문을 읽다가 너무 많은 각주에 질린 적이 한두 번 아니다. ‘각주의 숲’에 갇혀 미아가 된 기분으로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의 디지털시대에도 논문쓰기 구조는 반석 위에서 끄떡 없는가. 인문학의 위기와는 무관한 격절의 세계인가. 주제넘은 걱정까지 하게 된다. 쉽게 써야 한다는 강박에 휘둘리는 것도 곤란하되 서로 피곤한 노릇이다. 그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객’ 또한 이제는 걸맞지 않는 칭호라고 생각한다. 칼럼니스트 이전의 우리 말로 그냥 둔들 상관 없다면 그만이다. 그만이다만, 삶의 요소요소에서 터저나오는 프로페셔널들의 적절한 탁견과 정보가 한층 긴요한 마당에, 논객은 에헴 하고 앉아 별무신통한 고담준론이나 펴는 이미지를 풍기기 알맞다. 유효기간이 끝났다고 본다. 하긴 글을 쓰는 주체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따위 문제가 뭐 그리 대단하랴. 중요한 것은 내용이고 정운영은 그걸 위해 힘껏 쓰다 갔는데, 나는 그가 부수적이라고 여겼을 표현을 중심으로 이 말 저 말 늘어놓아 민망하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이 사람에게 다가가는 방편의 하나로 중요하다. ‘나라 위해 우리 변절합시다’라는 글에서 그가 토로한 역지사지 사고의 당위를 절감한다. 칼럼니스트 처지를 아무도 제편으로 끼워주지 않는 광대의 고독에 비유한 그의 ‘탄식’을 아울러 떠올린다. 어디에 서 있건, 세월이 어떻게 뒤바뀌건 간에 쓰는 자는 그렇게 고단하다. 하긴 그게 곧 글쓰기의 힘이다. 싫으면 못하는 짓이다. 정운영의 유서 같은 두 책을 읽으며 재삼 통감한다.
| |
|
'Book·Music'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은 기도할 때 우리 아버지가 아닌 우리 아빠로 불렀다” (0) | 2008.12.04 |
---|---|
스님이 펴낸 연애상담서 `연`(緣) (0) | 2008.11.11 |
결국 한 줌, 결국 한 점 (0) | 2008.08.27 |
그곳에 바람처럼 머물고 싶다 /정미숙 (0) | 2007.11.16 |
내 아들아! (0) | 2006.1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