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사람
이승우(소설가/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부자들은 특히 그런 것 같다. 오죽하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겠는가. 부자들은 시기의 대상인지는 모르지만 존경의 대상은 아니다. 시기하고 욕하면서도 다들 부자가 되려고
한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둘 중 하나이다. 욕을 먹더라도 부자가 되는 편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거나 자기만은 부자가 되어도 욕을 먹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욕을 먹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이 어떨 때 부자들을 욕하고 비난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돈을 모으는 과정이 옳지 않거나 돈을 쓰는 내용이 도덕적이지 않을 때 우리는 부자들을 욕한다. 그러니까 욕먹지 않는 부자가 되려면 옳은
방법으로 돈을 모으고 도덕적으로 돈을 써야 한다. 이런 반문이 예상된다. 옳은 방법을 써서 부자가 되는 것이 가능한 줄 아는가? 또 부자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쉬운 줄 아는가? 계속 부자이고, 더욱 부자이기 위해서는 도덕적이지 않은 곳에 도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돈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해서 하는 순진한 말이다. 한 마디로 뭘 모르고 하는 소리라는 것. 다시 익숙한 비유를 사용하자면, 부자가
욕을 먹지 않기가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돈이든 정치권력이든 올바르게 얻고 사용할 수 없나
정치인들도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정치인들 역시 시기의 대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존경의 대상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할 수만 있다면 정치를 해보겠다고 돈을 바치고 뇌물을 주고 사람들을 모은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둘 중 하나이다. 욕을 먹더라도 정치를 하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거나 자기만은 정치판에 들어가도 욕을 먹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선거를 치른다는 것은 진흙탕 속으로 들어가 싸우는 것과 같다. 폭로와 교묘한 조작과 허풍과 비난과 술수가 다 동원되는
전쟁판이 아니던가. 그런 것들을 시도하거나 당해야 한다. 행하는 쪽이든 당하는 쪽이든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에 목매다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은 그곳에, 그런 모든 악조건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좋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정치가 역시 부자의
경우가 그런 것처럼, 권력을 얻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의 부도덕함이 늘 문제이다. 부자들이 그런 것처럼, 정치가들 역시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옳지 않은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지 않기가 쉽지 않고, 얻은 것을 유지하고 더욱 얻기 위해서 도덕적이지 않은 행태를 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괜찮았던 사람이 그곳에 가서 괜찮지 않게 되어 버리는 사례를 여럿 보았다. 정치판에 뛰어 들지 않았다면 존경 받을 이름으로
남았을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러나 물론 치부(致富)나 정치가 악이라는 뜻은 아니다. 돈은 있어야 하고, 누군가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의 핵심은 돈이든 권력이든 선하고 올바르게 사용되지 않는 데 있다. 좀 싱거운 소리긴 하지만, 나는 편법 상속하고
세금 안 내고 부당 거래하고 비자금 조성해서 로비하고 해외로 빼돌리고 하는 재벌들을 보면 부자-고시(考試)라는 게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돈을 합법적으로 모으고 도덕적으로 사용할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부자가 될 자격을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마찬가지로 뇌물을 주거나
받고 부동산 투기하고 술수를 부리고 말과 행동이 다르고 권력을 남용하고 국민을 우습게 아는 정치인들을 볼 때는 크든 작든 권력을 정상적인 수단을
통해 얻고 올바르게 사용할 능력이 있는 사람을 골라내는 무슨 고시 같은 게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물론 답답해서 해보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존경 받는 부자들과 정치인들이 많아지도록 제도와 법이 적절한 기능을 해야겠지만, 공동체와 이웃을 배려하는 건강한 윤리
의식이 사회 저변에 스미도록 교육을 강화하는 것은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하비 콕스라는 신학자가 최근 어떤 책에서
밝히고 있는 하버드대학교의 사례는 경청할만하다. 그는 1980년대 초에 하버드대학교 학부에 '윤리적 사유'라는 교과 과정을 도입하게 된 경위를
<예수 하버드에 오다>라는 책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존경받는 부자들과 정치인들이 많아지기를
전문가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만연한 부정과 비리(그중에는 하버드대 출신도 많았던 모양이다)는 그들의 교육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인문과학이나 자연과학에 정통하도록 교육받은 학생들이 '사실'에는 전문가가
되지만, 가치관에 있어서는 초보생으로 남아 있다는 것, 자기들이 받은 교육을 윤리적 책임을 가지고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교수회에서 '윤리적 사유'라는 교과 과정을 만들어 필수로 이수하도록 했다는 내용이었다.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니다, 라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하버드생들 가운데 윤리적 사유를 할 줄 모르는 이들이 뜻밖에 많더라는 하비
콕스의 술회를 감안하면, 우리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고시가 비현실적이라면 이런 교과 과정을 부자들과 정치인들,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수로 이수하게 하는 것은 어떤가? 적어도 어떻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것인지를 '사유'하며 사는 것은 다른
것을 사유하며 사는 것보다는 윤리적일 수 있지 않을까. 알면서도 행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윤리적이지 않은지를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 않겠는가.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부자들과 정치인들이 많아지기를, 아니, 적어도 욕 먹는 부자들과 정치인들의
수가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쉬운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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