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민초

영화 서울의 봄으로 본 하나회 결성과정

나는 새 2023. 11. 26. 16:26

5.16 군사정변이 터졌다. 육사 교수는 못되니 대신 ROTC를 장악할 야심에 서울대 교관으로 나가 있다가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전두환은 다음날인 17일에 육사에 나타나 생도들을 이끌고 지지 시위를 하자고 하였다. 강영훈 육사 교장이나 동기생인 강재륜 교수등은 반대를 했지만, 쿠데타에 반대하던 교수들이 한명씩 끌려가자 상황이 달라졌다. 결국 18일에 육사 18기~21기 재학생들의 지지시위가 있었고 5.16 쿠데타를 결정적으로 성공시킨 사건으로 꼽힌다. 덕분에 전두환은 박정희의 눈에 들었다.[24]

이후 박정희는 자신의 경호를 위해 충성스러운 젊은 장교들을 원했는데 박종규 소령과 차지철 대위가 각각 10명씩 선발한다. 이중 차지철(갑종장교 출신) 쪽은 별 볼일 없고[25], 박종규(육사 8기)는 정규 육사 11기생 10명을 차출했는데 이들이 바로 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이상 오성회), 손영길, 권익현, 박갑용, 노정기(전원 경상도 출신. 훗날 하나회 창설 멤버) 등이다. 이들은 경호실 근무로 권력에 핵심에 있었으며 이때 청와대에서 함께 근무하던 박종규와 차지철, 윤필용 비서실장 대리는 훗날 하나회의 최대 후원자가 된다.

이들 청년 장교는 경호실 근무가 끝난 이후[26] 한 계급씩 진급하여 끗발 있는 보직으로 갔는데, 손영길은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 전속 비서, 전두환 소령은 중정 인사과장(김복동, 권익현도 중정), 노태우는 보안사 방첩 과장이 되었다.

그리고 1962년 말부터 오성회 중 김복동을 제외하고 전두환, 노태우, 최성택, 백운택 4명에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를 포함하여 칠성회로 개편되었다.[27] 이들 칠성회는 이후 하나회의 모태가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워낙 보안을 철저하게 지켜 1973년 윤필용 사건 때까지 하나회가 아닌 칠성회로만 알려졌다.

그러다 1963년 2월 18일 박정희 의장이 원대 복귀하고 민정이양을 발표했다. 그러자 군인들은 최고회의 앞마당에서 반대 데모를 하는데, 이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육사 11기의 정치 군인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박정희 의장의 전속부관 손영길을 앞세워서 전두환, 노태우, 권익현, 박갑용 등 5인은 의장 공관에 찾아가 원대 복귀 불가론을 제기한다. 그러자 박정희는 "여러분 뜻은 잘 알아. 그러나 정치는 그렇게 하는 거야."라며 자신의 민정이양이 페이크임을 알리고, "앞으로 일을 하려면 정규 육사 출신들이 똘똘 뭉쳐 나를 도와줘야겠어."라며 육사 장악을 지시한다.

이에 칠성회를 중심으로 노정기[28], 박갑용[29]이 합류했고, 김복동이 복귀하였는데 이를 텐 멤버라고 부르며 이들 10명이 1963년 일심회 창설 멤버가 되었다.(이후 하나회로 개명) 즉 오인회(1951년) → 오성회(1952년) → 칠성회(1962년) → 텐 멤버(1963년) → 일심회(1963년) → 하나회(1963년) 순으로 확대 발전한 것이다.(이상 나무위키 "하나회" 일부)

https://v.daum.net/v/2023112610300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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