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포럼
제 889 호
“매우 영국적인 쿠데타”
고 세 훈 (고려대 명예교수)
‘기록의 나라’ 영국의 정치인들은 학계와 전문 서평자들의 주목을 받는 저술들을 끊임없이 세상에 내놓는다. 그 종류도 전기, 자서전, 회고록이나 편지와 일기는 물론이고 순수문학과 장르소설에 이르기까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다양하게 넘나든다. 지난 연말 전자책으로 읽었던 소설 『매우 영국적인 쿠데타(A Very British Coup)』는 텔레비전 시리즈물로도 제작돼 영국영상예술아카데미(BAFTA)상을 수상했던 정치스릴러다. 저자 크리스 멀린은 최근까지 4반세기 가깝게 노동당 의원으로 있으면서 당과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중진 정치인이지만, 그 와중에도 여러 권의 일기와 회고록 그리고 소설 네 편을 펴낸 중견 작가이기도 하다.
‘민주주의는 진보정권을 어떻게 거부하는가’라는 부제가 어울릴 법한 그 책에는, 새롭게 들어선 노동당 정권이 집권 초에 단호하게 공약사항들의 정책화를 추진하지만, 채 1년도 안 돼 모든 개혁시도가 허망하게 종결된다는 스토리가 시종 흥미진진하고 급박하게 전개된다. 노동당이 총선공약으로 내걸었던 정책들은, 아아, 지금은 아스라한 향수가 된 과거 당내 좌파가 주장하던 단골메뉴들, 곧 유럽공동시장 탈퇴, 연금과 보험기금을 포함한 금융의 국유화, 상원철폐, 서작명단(honours list)과 사립학교 폐지, 그리고 무엇보다 나토탈퇴와 모든 외국 주둔군의 철수, 영국의 일방적 비핵화 같은 것들이었다.
“오늘 밤 우리가 얻은 것은 정치권력일 뿐이며,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다. 영국의 진정한 권력은 의회가 아니라 금융권의 중역회의실, 관료들의 어둡고 후미진 방, 주요 일간지의 편집실에 있다. 이것들이야말로 이 나라 모든 중요한 제도들의 숨통을 조이는 지배계급의 본산이다.” 개표 막바지에 집권이 확실시되자, 노동당 당수로서 곧 총리가 될 소설 속 인물 해리 퍼킨스가 측근들에게 했던 말이다.
소설은 좌파정권 비토를 위한 영국 정보기관과 언론, 종교계, 정부요소마다 포진한 보수적 관리들, 그리고 미국정부까지 연결된 치밀하고도 조직적인 음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언론이 새 정부가 영국을 파탄 낼 듯이 법석을 떠는 가운데, 정책과 무관한 총리와 각료들의 사생활이 낱낱이 뒷조사 되고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삶으로 채색되면서, 정권의 도덕성과 권위 자체가 의심받을 상황을 맞는다. 급기야 납치되다시피 폐쇄병동으로 옮겨진 총리는 ‘건강과 일신상의 사유로’ 사임하고, 영국 민주주의 사상 최초의 명실상부한 진보적 실험은 막을 내린다.
이 소설은 원래 대처정부 시절 처음 선보였지만, 브렉시트를 둘러싼 현 메이 보수당정권의 실책이 거듭되고 노동당의 급진정치인 제러미 코빈 당수의 집권 가능성이 현실로 다가오면서 저자가 새 서문을 덧붙여 재출간한 것이다. 이 소설을 읽고 현 문재인 정권이 겪거나 겪을 험로를 떠올린다면 이는 지나친 비약일지 모른다. 문정권의 개혁 어젠더가 소설과 현실에서 영국노동당이 내세운 개혁과제들과 그 진보성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일 뿐 아니라, 실은 현 정권의 행태에서 구태여 진보라 이름 붙일만한 것들을 찾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모국이라는 영국에서조차 위의 소설적 상상이 가능하다면, 기존의 기득권 구조와 관행이 엄연한데, 이제 겨우 이행단계를 거친 한국 민주주의는 과연 어느 수준의 개혁을 감내할 수 있을지, 혹은 과연 우리에게 의미 있는 개혁이 애초에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아득해진다. 모든 청산이 그렇듯, 적폐청산이란 성공해 봐야 기껏 본전치기, 그 자체가 정권의 목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 개혁은 누적된 과오를 바로잡는 데서 비로소 정당성 혹은 권위를 획득할 수밖에 없으며 나아가서 적폐 위에 조성된 광범위한 기득권 구조를 타파하지 않고 개혁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망한 노릇이다.
요컨대 개혁은 청산을 포괄하는 작업이 돼야 마땅하거니와, 청산 없는 개혁이란 일종의 모순어법(oxymoron)으로서 애초에 불가능한 개념인 것이다. 하루가 멀게 터져 나오는 적폐의 적나라한 실상을 접하면서, 피로감 혹은 정치보복 운운하며 지레 발목을 잡는 일이, 난감하고 딱하되, 그래서 이해 안 되는 바 아니지만, 그럴수록 청산의 당위성과 명분은 배가(倍加)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것 하나가 있다. 청산을 포함한 개혁의 과정은 언제나 공적 가치에 세밀하게 부합하고 전술은 엄중하고 치밀하되, 무엇보다 여론의 향배에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위대한 것은 다수를 ‘위한’ 정치이기 때문이지 다수가 늘 옳기 때문이 아니다. 국민은 위대하다는 말처럼 공허한 말은 없거니와, 이는 여론에 아부하려는 정치인들의 상투적 수사이기 십상이다. 전후 영국노동당 좌파의 거물이었던 나이 베번은 “정치가 여론추이만 좇는다면 정치에서 시적 감흥(poetry)을 탈취하는 것”이라 말했다. 정치를 종종 ‘아트(art)’라 하지 않는가. 사안의 경중에 따라 끌고 당기는 정치력과 정교한 리더십이 절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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