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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正祖)의 두 이름, ‘이성’과 ‘홍재’

지성유인식 2008. 6. 11. 10:06

정조(正祖)의 두 이름, ‘이성’과 ‘홍재’

 

박 철 상(고문헌연구가)

 

정조의 이름은 ‘이산’이 아니라 ‘이성’

 

인기 있는 TV드라마 ‘이산’이 곧 종영된다. 처음엔 생소했던 ‘이산’이라는 이름이 이제는 익숙해졌을 것이다. 보통사람들처럼 이름을 사용한 것은 정조(正祖)의 인간적 면모에 포커스를 맞춘다는 취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조의 이름은 ‘이산’이 아니다.

 

정조는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이다. "첫돌이 되었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들은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 책만 펴들고 읽었다."라고 할 만큼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했다.

 

정조의 이름은 한자로는 ‘李’이라 표기하는데

자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이다. 임금의 이름에 들어가는 한자는 일반 사람들이 함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고 있어서 잘 사용하지 않는 글자를 사용한다. 한자를 좀 아는 분도 자는 옥편을 뒤져봐야 할 것이다. 옥편에 따라서는 음이 ‘산’으로 되어있고 ‘산(算)’자와 같은 의미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조의 지시로 편찬한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을 보면 다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한자를 사성(四聲)에 따라 분류하고 한글로 중국발음과 조선발음을 표기한 음운서이다. 이 책을 찾아보면 이란 글자가 나와 있는데 ‘어휘(御諱)’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임금의 이름자이므로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인 셈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이 글자의 뜻이 ‘성(省)’자와 같다는 설명과 함께 발음은 ‘셩’이라며 친절하게 한글로 달아놓았다. 현대식으로 발음하면 ‘성’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임금의 이름에 자를 쓴 임금은 정조밖에 없으므로 이 글자가 정조의 이름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무튼 정조 자신이 편찬을 지시하여 만든 책 속에 자신의 이름에 쓰이는 글자의 의미와 발음을 설명해 놓았는데, 무슨 다른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정조의 이름을 ‘이성으로 읽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하의 정조는 자신의 이름이 바뀐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좋은 정치를 베풀기 위한 공부를 하려면, 뜻이 커야[弘]

 

정조(正祖)의 다른 이름으로 홍재(弘齋)라는 호가 있다. 임금에게 무슨 호가 있을까 싶지만 그는 홍재(弘齋)라는 호를 썼고, 인장에 새겨 자신이 보던 책에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한 학자의 삶이었다. 임금이란 직함만 떼버리면 그는 분명 조선 최고의 학자 중의 한 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00권이나 되는 그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세손시절부터 학문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현학이나 과거공부 수준의 학문이 아니라 세상을 이끌어갈 큰 비전을 준비하는 공부를 하였다. 정조는 세손시절 자신의 서재에 홍재(弘齋)라는 편액을 걸고 스승인 서명응(徐命膺)에게 그 의미를 시로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서명응이 지은 『홍재기(弘齋記)』는 이렇게 시작한다.

 

왕세손 저하(邸下)께서는 자신이 공부하고 휴식을 취하는 곳의 이름을 주합루(宙合樓)라 하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사람의 도(道)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대개 최고의 경지는 인(仁)을 체득(體得)하는 것 만한 게 없습니다. 인(仁)을 체득한다는 것은 증자(曾子)께서 말씀하신 ‘뜻을 크게 하라’는 것인가요?” 마침내 ‘홍(弘)’을 공부하는 곳에 편액으로 걸었다. 우빈객(右賓客) 신(臣) 서명응이 이전에 주합루(宙合樓)의 기문을 썼다는 이유로 ‘홍(弘)’의 의미를 시로 짓게 하시고 아침저녁으로 경계를 삼으셨다.

 

정조는 이미 주합루(宙合樓)라는 서재를 두고 그곳의 기문을 서명응에게 짓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공부하는 곳에 ‘홍재(弘齋)’라는 편액을 걸었던 것이다. 정조는 학문의 최고의 경지가 백성들에게 인정(仁政)을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책 속에 담긴 지식을 얻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정을 베풀기 위한 공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은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여겼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뜻을 크게 가지는 것이었다. 작은 일에 얽매일 게 아니라 세상을 크게 보고 멀리 생각해야 한다고 여겼다. 언제나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정치가의 길이고 그것이 인정(仁政)을 베푸는 길이라 여겼다. 여기서 정조는 『논어』「태백(泰伯)」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증자가 말했다. “선비는 뜻이 크고[弘] 굳세지[毅] 않으면 안 된다.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인정(仁政)의 실현을 자신의 임무로 여기고 있으니 얼마나 무겁겠는가? 죽은 뒤에나 그만둘 수 있으니 얼마나 먼 길이겠는가?”

 

군주는 인정을 베풀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다. 그 일은 군주 마음대로 그만 둘 수 없다. 자신이 죽은 뒤에야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평생을 가야 할 길이니 얼마나 먼 길인가. 정조는 바로 여기서 ‘홍(弘)’자를 가져다가 자신의 서재 이름으로 삼았던 것이다. 정조는 이 호를 평생 부적처럼 가슴에 품고 살았다. 오로지 인정(仁政)을 베풀겠다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준비하고 준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정조는 자신이 모델로 삼은 세종과 함께 영명한 군주로서 우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오늘 하루종일 정조가 어쨌다는 말을 들었는데
하나도 생각이 안나요
암튼 똑똑한 임금였다고 했던것 같은데...
ㅋㅋㅋ
그것만으로도 큰 공부를 한 셈입니다.
정조가 어�고 세종이 저더고
희숙이가 댓글을 남기던 다 역사의 한페이지..
다녀 가심에 감사하며,
파로호님 넘 거창하십니다.
이 모두가 역사의 한페이지라... ㅎㅎ

즐거운 시간 되세요.
역사공부 엄청 어렵습니다.
파로호님은 여자 사진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딩
말씀도 거창하게 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