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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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새 2018. 10. 19. 14:03

실학산책 제518 호

장계향

이 숙 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가문이나 학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피다 보면 집단 혹은 공동체를 가능케 한 걸출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보통 몇 대조 할아버지의 자손들이라든가 ○○선생의 문인이라는 식으로 말해지는 공동체이다. 학문이 곧 출세의 길이었던 시대에 가문의 성쇠는 학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여기서 한 여성의 유입으로 가문이 형성되거나 재건되는 경우가 많은데, 처가나 외가에 힘입어 동성(同姓)의 가문 공동체가 만들어지는 원리이다. 그중에는 처부나 외조부의 지원보다는 한 여성의 비범함이 이루어낸 경우들도 있다. 17세기 안동의 역사 인물 장계향(1598~1680)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장계향은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런데 관련 자료를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음식은 아주 지엽적인 성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음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삶과 사상이 그의 몸통이자 더 근원적이라는 뜻이다. 장계향은 퇴계학이 전수되고 확장되는 과정의 연결 고리를 쥔 인물이다. 그로 인해 친가(親家)와 시가(媤家)가 재건되어 각 가문의 전통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녀가 더욱 빛나는 것은 가문과 학계의 성취만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내 몸, 내 존재에 대한 긍정과 공경을 실천했다는 점이다. 그는 ‘내가 곧 우주’라는 자기 존중감을 바탕으로 사람과 만물을 응대한다. 그래서 그 삶은 희생적이기보다 ‘서로 주체’적이다.

 

이 몸은 바로 어버이의 몸이니, 어찌 감히 이 몸을 공경하지 않으랴.(身是父母身, 敢不敬此身.)

 

10세 전후에 지었다는 시 ‘경신음(敬身吟)’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존재의 의미를 천부인권설이나 신의 뜻이 아닌 부모에서 구한 것은 그 시대 진리의 근거가 효(孝)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는 공경과 삼감으로 자아를 가꾸고 그 정신과 실천을 외부로 확장시킨다는 경(敬) 사상의 자장 내에 자리하고 있다. 장계향은 퇴계의 학통을 이어 후학을 양성하던 장흥효(1564~1633)의 무남독녀로 자라며 그 학문 정신과 실천을 충실히 계승한다.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그는 “『소학』과 『십구사(十九史)』를 힘을 들이지 않고 통달했고, 조석간에 얼굴을 맞대고 말해 주는 모든 성현의 말씀을 실천하려고 했다.”(「정부인장씨행실기」)

 

이 소녀가 목표한 공부는 성인(聖人)이었다. 소녀는 시 ‘성인음(聖人吟)’을 지어 “성인의 시대에 살지 않아 성인 모습은 보지 못했으나, 성인이 남긴 말씀 들을 수 있고 성인의 마음 볼 수 있다네”라며 포부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성인이 만약 인간이 아니었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했다면 따라갈 수가 없겠지만, 그 용모와 언어가 보통사람과 다르지 않고 또한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이 일상에서 하고 있는 것들이니 힘써 배운다면 성인이 되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정부인장씨행실기」)라고 한다. 그 시대 지성의 최종 목표인 성인(聖人)이 경(敬) 공부를 통한 자아완성을 뜻하는 것이라면 17세기의 여자 장계향은 이 목표를 어떻게 구현했을까.

 

장계향은 19세의 나이로 이시명(1590~1673)의 재취 부인으로 출가하는데, 그곳에는 전처소생의 어린 두 아이와 직접 건사해야 할 많은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25년 동안 장 씨는 6남 2녀의 출산과 양육, 자녀의 교육과 혼인을 주관하며 활발한 청장년기를 보낸다. 자신에게 맡겨진 7남 3녀의 자녀들에게 어머니로서의 사랑과 스승으로서의 교육을 어떻게 펼쳤는지 그 일화들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고 있다. 시부모를 모시며 식솔을 건사하는 그의 4반세기는 생명이 교체되는 역동적인 시간이면서 역경과 고난 또한 길벗처럼 늘 함께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타계로 홀로 남겨진 아버지를 위해 3년간의 친정살이를 하며 아버지의 재혼을 성사시킨다. 얼마 후 아버지가 타계하자 달려가 자식으로서의 임무를 다하고, 남겨진 어린 이복동생들과 식구들을 곁으로 데려와 생활 터전을 마련해주고 동생들을 학자로 성장하도록 도운다. 시집과 친정이라는 17세기의 문화적 틀에 얽매이지 않고 나의 도움이 더 절실한 곳으로 달려간 그의 행위는 형식적인 예교주의를 뛰어넘는 것이다. 남성학자들의 경(敬) 실천이 학문적 이론에 상응하여 펼쳐진 것이었다면, 장계향의 실천은 타인의 요구에 반응하고 잠재력을 기르도록 도우며, 방향을 제시해주는 조력자의 역할이다. 퇴계 경 사상의 여성적 실천이 될 이것은 남성의 언어로는 제대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다.

 

퇴계의 경(敬) 사상은 김성일·류성룡을 거쳐 장흥효의 심학으로 전개되었고, 다시 장계향의 일상 의례적 실천에서 그 아들 이현일(1627~1704)의 예론적 퇴계학으로 발전하였다. 장계향은 국난의 여파로 실의에 빠져 은둔의 시기를 보내던 남편에게 ‘자손을 모아 강학하여 미래를 준비시키자’고 제안하여 집안과 지역의 교육 전통을 일으켰다. 일정한 나이에 이른 자식들은 아버지 경당의 문하로 보내 퇴계학을 전수토록 했다. 7명의 아들이 모두 각자의 학문을 이룸으로서 퇴계학의 확장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특히 『홍범연의』를 저술한 휘일과 이조판서에 오른 현일은 나라에 큰 공훈을 남긴 사람에게 주는 불천위(不遷位)의 영예를 받기에 이른다. 1세대 제자들에 의해 지역에 정착한 퇴계학이 17세기에 이르면 정치권에서 소외되는 위기를 맞는데, 그 중흥의 중심에 장계향이 있다.

 

“남이 넉넉할 때 내 많은 재물은 자랑일 수 있지만 남이 모두 없는데 홀로 많이 가진 것은 재앙”이라던 장계향. 비교적 넉넉했던 시집의 살림을 주관하며 노비를 포함하여 20여명의 식구를 건사하던 그가 분재로 얻게 될 부부의 몫을 반납한 것에서 그가 그린 그림이 매우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장계향은 직접 일구지 않은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자식 교육에 도전과 노력보다 더 좋은 게 없다고 여겼다. 또 실사구시적 정신으로 영양 지역의 약초나 토산물을 활용하여 기근과 궁핍, 질병을 해결했다. 왕실에서도 어쩔 수 없었던 높은 유아사망률의 시대에 7남3녀의 자녀들을 잘 길러낸 장계향. 73세의 나이에 〈음식디미방〉을 저술하여 각 가정에 필사하도록 한 것은 생명을 대하고 길러내는 방법과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의 80 여생이 경(敬)을 통한 자기완성을 향해 가는 삶이었지만 어찌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서는 포기하는 대범함을 보였다. 큰아들 휘일과 두 딸 그리고 막내 운일을 먼저 보내게 되자 사람들은 자식 사랑이 각별한 그녀를 먼저 걱정했다. 슬픔으로 자신의 몸을 해칠 것이라는 염려였다. 하지만 그는 “나는 애통하고 절박하다 하여 부모님이 남겨 주신 몸을 해치지는 않는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가 각자 자기 인생의 주인임을 말한 것이다. 그는 83세 전 인생을 통해 현실과 대면하는 삶의 지혜와 열정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 노년의 삶은 ‘성숙과 완결’의 역사적 모델로 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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